2009.05.28 10:40
안녕하세요, 교수님.
교수님께서 쓰신 글을 읽으며 저 또한 마음 한켠에 흐르는 비통함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엇그제 서울역에 있으면서 느낀 것들을 교수님의 방에서 함께 나누고싶어 글을 올립니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더 생각나는 이 아침입니다...
1
학창 시절 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예수적인 것입니다”
처음엔 그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 말이 일리가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무엇일까...
누군가가 아파하면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고, 함께 고통받고...
누군가가 손해보아야 한다면 내가 좀 손해보고, 희생하고, 가진 것이 있다면 조금 더 나눠주고...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직장에서 일하고 교회에서 섬기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엇그제 서울역 광장에 조문을 기다리는 내내 그분을 생각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손가락질하는 암울한 정치판 속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과 타협할 수 없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먼저 손해보고, 힘들고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한때 자신이 즐기던 것마저도 그것이 자기가 섬겨야할 이들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것조차 버렸던 그분.
그분은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가셨지만 그리고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이었습니다.
2
언제부턴가 그분을 참 많이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분이 아니었나?’ 저의 가치관을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내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교회의 헌금으로 구호선교비로 낸 적은 있었지만 정치인에게 주는 것만큼은 아깝고 쓸데없는 짓이라 치부했던 생각을 접고 처음으로 그를 위해 성금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탄핵이 발의되었던 날, 신학교정에서 수업을 받는것보다 여의도로 나가 촛불을 드는 것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해 광장에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좋은 것이 아닌 바른 것을 위해, 이로움이 아닌 의로움을 위해 걸어오신 그가 지키기 위한 가치와 신념을 함께 지지하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진않지만 그냥 그렇게라도 해야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보니 광장으로 나갔던 5년전 그날 밤, 참 공교롭게도 그때도 ‘謹弔’ 라는 말을 수많은 사람들이 되뇌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추진 등의 현안들이 결정되고 집값이 붕괴될 때, 조금씩 실망하게 되고, 밀려오는 배신감은 컸습니다. 비단 저뿐이었겠습니까.
보수언론은 그렇다쳐도 진보적인 언론과 진영까지 그를 향한 비판과 쓴소리를 해댈 때, 이제 더는 정치에는 관심조차 가지지 말아야지 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퇴임 후, 참여정부의 인사들과 가족들의 도덕적 가치 붕괴로 인한 기사가 연일 들릴 때면 결국 이제는 자승자박의 형국까지 가는구나 했습니다.
3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집창촌에서 지내는 한 여인이 한달에 서너 번씩 약을 복용하고 자기 몸을 피칠갑하면서 골목의 건달에게 대어듦으로 자신을 지킨다고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다가가 그러한 그녀의 열악한 삶을 그대로둔채 그녀를 정죄하면서 그녀의 사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삶을 도리어 파괴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폭력과 위선이라고...
그녀가 살아온 지난 삶의 궤적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마음과 입장을 체휼하지 못한채 그녀의 삶을 함부로 제단하고 평가하며 바꾸려하는 만큼 가혹한 행동이 어디있겠습니까.
야당 국회의원 노무현, 그리고 일국의 대통령 노무현은 분명 달랐습니다. 그가 처한 자리가 달랐기에 책임도 달랐고 선택 또한 달랐겠죠.
분향소 앞에서 한 시간 남짓 서있으며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야당 정치인 노무현과 일국의 대통령 노무현은 비록 다른 자리였지만 그는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와 지역주의와 부패사슬을 끊어내고자 어느 누구도 쉽게 도전하지 않았던 길을 걸었습니다.
야당 정치인 노무현을 이해했던 만큼 대통령 노무현을 이해하려하지 않았던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누군가를 함부로 쉽게 평가하고 판단한다는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저 이쪽저쪽 언론이 전해주는 소리, 대중이 평가하는 소리에만 쉽사리 귀를 기울였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제 밤, 서울역 시계탑 아래 서있는 내내 지난날 그러한 소리에만 쉽사리 귀를 기울였던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왠지모를 서글픔이 밀려들었습니다.
지역주의에 도전하며 네 번을 연거푸 낙선하고,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듯 굳게 닫힌 문에 몸을 부딪치며 권위주의와 구태정치를 청산하기 위한 시도들.
누군가가 말했듯 모두가 이로움을 향해 내달릴 때 그는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거센 파도를 거슬러 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정치가가 되고 싶다며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면서도 탄핵이 발의된 날 국회의장석을 점거하고 몸싸움을 벌이던 한때 기도했었던 제가 알던 어느 정치인의 모습에 비견했을 때 그는 훨씬 바보같은 지도자였습니다.
4
조문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한강을 지났습니다.
어둠속에서도 유유히 강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강물은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늘 그렇게 역사의 희노애락을 품고 흐르겠죠.
그 강물 위로 한 시간전 시계탑 아래 조문행렬 속에 엄마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의 눈빛이 떠올랐습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진보한다는 E.H Carr의 고백처럼 그 아이의 세대에는 더 발전되고 사람다운 세상, 살맛나는 세상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아이는 이 땅에서 인간적인 삶을 살기위해 살다간 한 사람의 넓은 추모의 장에서 고동치는 역사의 숨소리를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했으니 훗날 그 아이가 시대의 가운데에 서있을 때는 이곳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이고 상식이 통용되는 세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한 지도자의 서거로 인한 눈물이 뿌려진 한강은 바다로 흘러가겠죠.
그리고 그 바다로 흘러간 모든 강 지류가 하나로 모아져 더 넓은 대양을 향해 나아가듯 내가 속한 이 나라가 진실로 하나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그런 곳이 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위에 숨겨진 도시를 환하게 밝히는 세상의 빛줄기가 이 땅에 가득해지길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기도합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 류호준 | 2020.08.24 | 2523 |
583 | 교수님~~ ^^* [2] | 이순화 | 2009.06.13 | 4551 |
582 | 한학기동안 감사했습니다. [1] | 정미현 | 2009.06.12 | 4755 |
581 | 첨으로 인사 올립니다 [1] | Dorcas | 2009.06.03 | 1 |
580 | "꽃"이 되던 날! [2] | 이용준 | 2009.05.28 | 4564 |
» |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서서... [1] | 정정환 | 2009.05.28 | 5165 |
578 | 교수님 너무 오랜만이지요~~보고싶네요~~~ [1] | 이동진 | 2009.05.27 | 5 |
577 | 감사드립니다. [2] | 리시엔지 | 2009.05.25 | 4448 |
576 | 새로운 출발 앞에서... [2] | 원택진 | 2009.05.25 | 5 |
575 | 인간에 대한 예의 [1] | 성미강 | 2009.05.25 | 5 |
574 | "지금 우리는?" (비보에 접하면서) [1] | 류호준 | 2009.05.23 | 4904 |
573 | 다정한 빗소리 [1] | 꿈꾸는 무지개 | 2009.05.23 | 1 |
572 | 스승의 날에 [1] | 갈렙 | 2009.05.16 | 1 |
571 | 샬롬^^* [1] | 강종원 | 2009.05.16 | 1 |
570 | 말로 다 할수 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2] | 원택진 | 2009.05.15 | 5 |
569 | 교수님께... [2] | 권혁필 | 2009.05.15 | 4 |
568 | 교수님 ^^ [1] | 이호수 | 2009.05.15 | 1 |
567 | 교수님 건강하신지요? [1] | Jeremi | 2009.05.15 | 3 |
566 | 주 예수께서 가르쳐 준 기도 이제는 외우지 않습니다. [2] | 신재국 | 2009.05.13 | 4049 |
565 | 감사합니다. 교수님.... [1] | 원택진 | 2009.05.08 | 3 |
564 | 짧은 여정을 뒤 돌아 보며... [3] | 원택진 | 2009.05.05 | 12 |
말을 잃은 요즈음이네.
그저 하염없는 눈물만 나오니, 이거 원 참!
땅에 가까울 수록 하늘에 가깝다네. 신앙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