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와 복음주의"
류호준 목사
그렇다면 개혁신학 전통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할 것인가? 우스꽝스럽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개혁주의적 신학적 행보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학적 중도를 걷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서 있다고 믿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 있어야한다고 믿는 개혁주의의 위치는 일차적으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중간 지점 어디일 것이며 그곳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고 서 있어야한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초자연주의에 관해서는 과감하게 근본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문화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와 보조를 같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는 것이 개혁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개혁주의는 처음부터 신학적 대안들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제시하고 실행에 옮기는 신학적 운동이다. 양쪽 진영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발전 시켜나아 가야할 개혁주의 전통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변혁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를 피력하는 자유주의, 초자연주의를 반대하는 이성주의, 개인적인 죄와 구원을 얻기 위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해 언급을 꺼려하는 현대적 감성주의와는 한 배를 타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개혁주의 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은 신앙의 반지성적 경향, 과학과 학문에 대한 일방적 의심, 기독교 문화 창달에 대한 이해와 참여의 부족, 현실 도피적 신앙관,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보다는 개인의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경향 등을 가진 근본주의적 신앙 체계로부터 자신들을 분명하게 구별 짓는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의 관점은 자유주의 및 근본주의로부터 완전히 구분되어야하며, 이러한 구별은 특별히 양극화로 치달아온 한국의 신학적 전통에 대안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입장을 ‘제 3의 입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P. Wolterstorff)가 미국에서의 기독개혁교회(CRCNA: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의 입장을 “제 3자의 사고방식”(The third-party mentality)이라 부른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미국의 진보주의 장로교회와 보수적인 장로교회들 사이에 있는 신학적 긴장과 대치 국면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쳐다보았던 네덜란드 계통의 개혁교회들이 보여주었던 태도와 정신을 그런 용어로 표현했었다. 개혁주의는 자유주의자나 근본주의자와는 달리 어떤 특정한 논쟁에서 취했던 입장에 따라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천명하고 자신들의 역사적 신앙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개혁주의는 요한 칼빈과 종교개혁자들 및 어거스틴에 기초한 신학전통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규정된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듯이, 신학적 계보에서 개혁주의의 줄기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복음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찾는 일이다. 물론 “복음주의자”(evangelical)라는 용어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한국에서 복음주의적 감리교인이나 성결교인들이나 오순절 교인들이, 심지어 복음주의적 기장 교회의 교인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복음주의자라고 말할 때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정통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역사적 개신교의 일원된 교인들로서 복음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개혁주의자들은 복음주의 자들과 상당부분 중복되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아무런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풀러 신학교, 트리니티 신학교, 고든 콘웰 신학교, 혹은 시카고의 위튼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의 바이올라 대학교, 캐나다 밴쿠버의 리전트 대학, 대중적 기독교 잡지인 Christianity Today나,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과 같은 기관들, 존 스토트(John Stott), 제임스 패커(J. I. Packer), 존 파이퍼(John Piper), 챨스 콜슨(Chuck Colson),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제임스 돕슨(James Dobson) 같은 인물들은 모두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이나 교단의 신학적 입장이 개혁주의는 아니지만,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의 상당 부분에 있어서 자신들은 신학적으로 개혁주의라고 간주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한세대학교, 안양대학교, 평택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성결대학교, 나사렛대학교, 침례신학대학과 같은 교육기관들이나 [목회와 신학]지와 같은 기독교 잡지, 조용기, 이동원, 하용조와 같은 목사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것이고 그런 명칭에 대해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개혁주의적 장로교 전통에 서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개혁주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복음주의자라고 해서 개혁주의자는 아니다. 개혁주의는 복음주의보다 범주가 좁지만, 신학적 정체성이 강하고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신학적 성격을 갖고 있다.
결국 각 교파는 개신교라는 공통분모에서 어느 정도 공통적 유산이 있지만,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개혁주의가 가장 훌륭하고 좋은 신학적 전통을 지녔으며, 제가 개혁주의자인 것에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