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10 17:37
목회자가 된다는 의미
- 초서의 목사 상(像)을 중심으로 -
류호준 목사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오늘 우리가 읽을 본문은 영국의 문호 초서(Geoffrey Chaucer, 1340 ~ 1400)의『캔터베리의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중 서문 479행부터 530행까지입니다. 독자를 위해 한글번역을 싣습니다. 이 본문을 중심으로 본문 해석과 그 적용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초서는 종종 반(反)-성직주의자(anticlericalism)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그는『캔터베리의 이야기』에서 종교적 인물이나 성직자들을 종종 냉소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성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종종 성직자들을 향하여 불평과 냉소를 퍼부어 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비난하고 불평하고 있는 대상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지고한 소명에 부적합하고, 그러한 소명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러한 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 내가 여러분들을 향해 말하려는 내용이 여러분 중 어떤 이들에게는 반-성직주의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초서가 의도했던 내용과 비슷하다고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일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일이 문자 그대로 신체적으로 위험하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것입니다. 그가 만나고 사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교인들이요, 그가 맴도는 삶의 반경도 틀림없이 종교적인 영역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교인들이 그러하듯이, 성직자들은 적어도 그들의 면전에서는 존경의 대상이며, 명예와 신망을 받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감히 목사를 향하여 불손하게 대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위험천만한 공사판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며, 폭력배를 추격하는 경찰수사대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되는 일은 결코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또한 정신적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물론 수많은 스트레스에 싸여 좌절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의 스트레스는 오히려 소위 세속적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의 교인들에게 더욱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의 일이 위험천만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된다는 것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죽음과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모든 것, 그가 입에 담고 있는 모든 것, 그가 머릿속에 생각하는 모든 것,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들입니다. 목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촉각을 다투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신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우리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읽혀집니다.
목 사 (The Parson)
본문
479 착하고 경건한 어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480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하였지요.
481 그러나 그는 거룩한 생각과 일에 있어서는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482 그는 역시 학문의 사람, 학자-성직자였습니다.
483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으로 설교하려고 힘썼으며
484 그의 교인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곤 하였습니다.
485 그는 온화하였으며 매우 근면하였습니다.
486 역경의 시기에는 인내하였으며 모든 일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487 종종 이 사실은 증명되곤 하였는데, 그는 항상 유쾌하였으며
488 십일조를 받아 가지기 위하여 출교 선언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습니다.
489 그러나 그는 의심 없이 기꺼이 주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490 특별히 교구 안의 가난한 교인들에게 그러했습니다.
491 그는 수입 중의 일부분만 아니라 그의 소유 중에서도 기꺼이 주었습니다.
492 그는 적은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것을 풍족하게 사용했습니다.
493 그의 교구는 매우 넓었고 교인들의 집들은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494 그러나 그는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치거나
495 아픈 사람이든 죄지은 사람이든, 그 어떠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거나 상관치 않고
496 가장 멀리 있는 가정이나, 큰 자나 작은 자들 방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497 그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도보로 걸어갔습니다.
498 그는 이러한 훌륭한 모범을 그의 양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499 그는 먼저 몸소 실천하였고 그 후에야 가르쳤습니다.
500 복음으로부터 그는 이러한 본문을 발견하였습니다.
501 그리고 이러한 것을 덧붙였습니다.
502 즉, 금도 녹이 쓴다면 불쌍한 철이야 오죽하겠는가?
503 만일 우리가 신뢰하는 목사가 부정하고 더럽다면
504 평신도가 향락에 빠진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인가?
505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목사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506 빌어먹을 못된 목자가 깨끗한 양들을 친다는 것이.
507 목사는 좋은 모범을 주어야 마땅할 뿐만 아니라
508 자신의 청결함을 통해 그의 양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509 그는 결코 성직(록)이 삯으로 전락하도록 하지 않았으며,
510 그의 양떼들이 수렁 속에서 허덕이도록 방치하지 않으며
511 런던으로 올라가 옛 성 바울 성당으로 가서
512 죽은 영혼들을 위한 명복의 기도를 드리지도 않으며,
513 어떤 형제단에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514 그와는 반대로 그는 집에 머물면서 양 울타리를 잘 보살피며
515 이리가 그의 계획들을 유산시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516 그는 목자였으며 삯꾼이 아니었습니다.
517 그리고 그는 성결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518 죄인들에게 대해서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519 그의 언사는 오만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신적(神的)이지도 않았으며,
520 오히려 그의 모든 가르침 안에는 신중함과 유쾌함이 있었습니다.
521 그는 무리들을 공정하게 하늘로 인도하였으며
522 좋은 본보기는 그의 바쁜 일과였습니다.
523 그러나 어떤 자들이 죄를 짓고도 완고하면,
524 그가 누구이든 -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상관없이 -
525 그를 책망하였으며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526 그 어느 곳에서도 이 보다 더 좋은 목사(사제)는 없었습니다.
527 그는 헛된 명예나 존경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았습니다,
528 그렇다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독선적인 양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529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열두 사도들의 교훈을
530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것을 친히 실천하였습니다.
해설
[479] “착하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하였지요.”라고 본문은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낀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초서 당대의 많은 교직자들과는 달리 이 사람은 그의 소명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직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마음속 깊이 모시고 그분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설명되어 질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경건의 모습을 추구하려는 성향은 많은 목사로 하여금 위선자로 만듭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은 정직과 순결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 시대의 목사들 가운데 ‘선함’(善)을 추구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아니, 교인들로부터 ‘우리의 목사님은 선하신 분이야’ 라고 칭송을 받으시는 분이 얼마나 되는지 매우 회의적입니다.
본문의 목사님은 또한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는 재물과 돈을 모으는데 우선권을 두지 않은 목사였습니다. 그의 진정한 재산이 있었다면 그것은 ‘거룩한 생각과 일’에 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물론 내가 재물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거나 멀리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들의 근면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부요하게 된 자들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기는 자들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경향을 매우 혐오합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이 흔히 하듯이, 목사들도 빈곤서약(vows of poverty)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만일 물질적 이익에 관한 생각이 여러분의 가치관이라는 저울 속에 상당한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는 교회의 봉사 중 가장 최고의 가치를 요구하는 이 직업(성직)말고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십시오. 초서의 목사님이 ‘가난’하다고 한 것은 초서 당시의 많은 목사들이 돈과 재물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추구하였는가를 반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는 무엇이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거룩한 생각 대신에 치졸하고 불경건하고, 저속한 것을 은밀한 가운데 계획하고 생각하는 우매한 목사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속으로는 돈을 추구하고 재물을 탐내면서도, 겉으로는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아래 교인들을 착취하는 어리석은 전문 부흥사들이 이 시대에 없다고 단정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연말 예산결산 위원회의시 내년도 목사 사례금 책정 문제에 초연했던 목사들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물론 초서의 목사님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생각과 일에 있어서는 부요한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개탄할 정도로 목사의 이미지는 땅에 추락하여만 가고, 은밀하게 세속적인 물질을 추구하는 목사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일꾼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겠습니다만, 목사직이 ‘전문인’(professional)이라면, ‘전문인’이란 용어 자체의 정의는, “통상적으로 이윤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월급이나 사례금 그리고 교회로부터 반드시 받아내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혜택(예를 들어, 자동차, 사택관리비, 자녀 교육비, 학위를 위한 목사 교육비, 출장비, 심방비, 손님 접대비, 판공비!)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평신도들이 보았거나 들었을 때처럼, 그들의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내고 그들로 하여금 사역자로부터 가장 빨리 등을 돌려대게 하는 일들은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기보다는 적당히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상황아래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물질과 돈은 마치 탄탈로스의 깊음처럼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482] “그는 역시 학문의 사람, 학자-성직자였습니다.” 초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초서는 이 사실에 독자들이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그가 그려놓은 목사는 당시 중세의 일반적인 목사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목사들, 특별히 그들의 일생을 시골의 교구에서 보내야만 할 정도의 목사들은, 많은 경우 무식했으며 천박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예배 시에(미사) 라틴어를 말할 수 있는 목사라면 유식하고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배움이 있는 학자 성직자가 시골교회의 목사로 겸허하게 소명에 응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하며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심지어 매우 ‘비정상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학벌이 좋고 유식한 목사들은 종종 좀 더 명성이 있고 전통이 있는 교회들을 추구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권위와 품격을 고양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긍지와 명성을 추구하며 권위와 자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불쌍한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덜 배우고 학벌이 낮은 동료 목사들에게 그들의 교구를 떠맡기고(참조, [509]) 런던을 향해 갔던 것입니다(참조, [511-513]). 요즈음 말로 부자들이나 학식 있는 사람들, 혹은 권세 있는 자들이 많이 산다는 서울 강남삼구에서 목회하기를 소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유명 인사들의 추도예배를 인도하거나 그들의 어린애들의 돌잔치 설교라도 맡으면 여간 즐겁고 뿌듯한 일이 아닌지요! 초서 당시에도 많은 식자층 목사들이 런던의 유명한 성 바울 교회당에 가서 부잣집의 친지나 가족들 중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기회를 잡으려고 런던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런던에는 여러 종류의 ‘형제단’들이 있었는데, 이 형제단들은 일종의 중세의 상공인 연합회(guild)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단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단체의 기관목사(사목: chaplain)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마치 밤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이중적, 혹은 음성적으로 돈을 버는 자들과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초서는 말합니다. 우리의 목사님은 “목자이지 삯꾼은 아니었다.”[516] 삯꾼으로 번역된 용어 mercenary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라틴어를 말할 줄 아는 사제(목사)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언변이 유창한 자들로서 이 교구 저 교구를 순회하면서 배우지 못한 목사들이나 교인들을 위해 미사를 라틴어로 집전하였습니다. 둘째로, 이 용어는 한글 번역을 통해 나타나듯이 ‘삯꾼’, 혹은 ‘용병’을 가리키는데 ‘돈 벌레’(money-grubber)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즘말로 앵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목사는 학문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목회 사역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할 조건과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학교의 학생으로서 여러분들은 이미 문학사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현대 교회의 교인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가는 현실 앞에서 사역자가 무식할 수는 없으며, 적어도 신학수업을 받기 위하여서 인문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현재 ‘문학사’라고 불리는 B.A(bachelor of arts)는 인문계 대학 교육학위 명칭으로 사실상 중세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 경우 bachelor(학사)는 어떤 이들이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동일한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학사’란 인문계 학문에 있어서 도제(徒弟: apprentice), 견습공, 혹은 훈련병을 가리킵니다. 평생을 ‘그 책’(The Book)을 다루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만 할 여러분들은 도제적인 정신이 없이 훌륭한 장인(匠人)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책’을 올바로 이해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이미 여러분들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기본적인 소양과 인문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좋은 도구가 되어서 신학을 수립하고 성찰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한 정신들을 함양한 고전들을 가까이하고, 창조적인 생각과 여유를 위하여 음악을 사랑하며 ―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에 관하여, 최근에는 독일 튜빙엔 대학교의 천주교 신학자 한스 큉이 다시금 모차르트에 관한 책을 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 ― 다양한 언어 습득을 통하여 (특별히 헬라어와 히브리어!) 하나님의 ‘책’을 심도 깊게 이해하는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육에서 신학원어 과목이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중요한 과목으로 남아있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공부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신학교육 3년으로 마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소명에 진정으로 진실하고 성실하려면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교육시켜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나는 이점에 있어서 목사들이 많은 핸디캡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교수들이나 교사들이 그들의 학생들을 위하여 강의를 준비하는 것이나, 목사가 그들의 교인들을 위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적어도 첫 몇 년간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 교회에서 3년 정도 시무하다가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교인들의 기억력이 매우 짧거나 하지 않은 이상, 목사들은 교수나 교사들보다 훨씬 많은 핸디캡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장래 목사로서 여러분들은 우리 교수들이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같은 과목을 가리키는 강의를 개정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옛 설교를 단순히 개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스스로를 교육시키지 않으면 소명을 불성실하게 감당하는 일이며 심지어 직무유기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도 잊지 않은 한 개인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한 교회에서 목회하던 4년째 되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번 설교했던 설교문은 다시 사용하는 일이 없었던 나로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설마 하는 심정으로 주일 아침 강단에 섰습니다. 3년 전에 설교했던 설교 한편을 꺼내 들고 강단에 섰던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몹시도 아팠기 때문에 설교 준비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누구도 이 설교를 기억치 못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배 후 교회당 현관에 서서 교회당을 나오는 교인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년의 어떤 집사님이 악수를 하면서, “목사님! 오늘 설교는 3년 전 3월 25일에 하신 설교지요?” 당황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나는 얼떨결에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그 교회에 부임해 와서 세례를 베풀었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좋아서 성경에 날짜와 설교 제목과 그 내용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이! 그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후로 나는 설교한 후에는 반드시 날짜와 청중들에 관한 기록을 설교 원고 끝에 남겨 놓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방어심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금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일주일의 상당한 시간을 따로 할당하여 독서하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많은 경우 상당수의 목사님들이 다음 주일 설교를 위한 탄약을 장전하기 위해서 독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불행한 습관입니다. 또한 나는 여러분에게 신학에 관련된 책을 읽을 것을 권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대학이나 신학교시절 읽을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고전적인 소설들이나 희곡들, 혹은 국어 개론시간에 스쳐갔던 어떤 저자들의 시(詩)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던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들, 훌륭한 언어의 스승들, 언어를 표현함에 있어서 치밀성과 단순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체가들, 문법가들, 언어학자들의 글들을 가까이 하라는 권면입니다.
다시금 말하거니와, 학자‧성직자가 되십시오. 그들은 모두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다루게 될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자료가 하나님의 바로 그 말씀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모든 목사들은 언어를 다룸에 있어서 ‘학자’(clerk)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교인들을 무시하거나 경홀히 취급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뻔한 것을 말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또한 교인들을 마치 초등학교 2,3학년생이나 되는 것처럼 낮추어서 말하지 마십시오. 문체의 위대한 스승들을 공부하시고, 빈틈없는 구절들을 기억하시고, ‘정확하게 선택된 단어’들을 사용하시며, 생각된 것을 그 보다는 달리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는 그러한 ‘참된 기지와 해학’을 개발하십시오.
[483/484]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으로 설교하려고 힘썼으며 / 그의 교인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곤 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적어도 여러 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무엇에’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이들이 그들이 받은 소명을 저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따라갔다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목사에게 있어서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 속에서 목사의 역할을 다양한 교인들만큼이나 다양하게 이해되고 요청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 사역자’의 일차적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그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만이 그가 해야 할 유일한 기능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초서도 목사의 소명 안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심방하고([493-496]) 구제하고([489-491]) 상담하고 치유하는 것들이 그것들입니다. 또한 설교와 교육 이외의 다른 봉사는 질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여러분들이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먼저 복음을 기꺼이 선포하고 설교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여러분 가운데서 교인들에게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싶거나 크리스천 카페를 운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혹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운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미혼모들을 위한 보호소를 설립하기 원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생겨난 아이들을 위해 입양기관을 만들고 싶거든 기꺼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부탁드립니다. 제발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할 여러분의 의무를 희생하거나 외면해가면서는 하지 마십시오! 먼저는 여러분이 받는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나라의 그러한 사역을 위하여 여러분을 적절하게 준비시키지 못할 것이며, 둘째로는 교인들에게 여러분 자신들을 복음의 사역자라고 알리면서도 실제로는 위에서 언급한 다른 일들에 시간을 투자하고 힘쓴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정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485] 우리의 이상적인 목사는 “온화하였으며 매우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경과 고난의 때에는 인내하였고 자족할 줄 알았습니다([486]). 더욱이 자신의 봉급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무서운 열쇠를 휘두르지도 않았습니다. [488]을 한번 원어로 읽겠습니다. “As he was right loath to curse to get a tithe.” 나는 “십일조를 받아 가지기 위하여 출교선언 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curse라는 단어는(초서의 원문에는 cursen임)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듯이 ‘저주하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초서 당시에 교회에서 선언하는 ‘저주’(curse)는 곧 출교를 말했습니다. 중세시대에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서서히 죽는 것’을 의미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출교당한 사람과는 그 어떠한 거래도 금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에게 음식이나 거할 곳을 제공하거나, 혹은 일자리를 주어서는 안 되었으며 만일 누구든지 그것을 범하면 그 사람 역시 출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여 몇몇 방자하고 무법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출교로 위협하면서 돈을 뜯어내었던 것입니다. 초서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강단에서 ‘쌍칼’(?)을 ―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무당이나 박수 같은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현실입니다: “목사를 잘 섬겨야 축복을 받는다.”, “주의 종을 잘 받들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통사고나 질병 등과 같은 재앙으로 죽는 수가 있다.” 등과 같은 문구들이 때로는 직설적으로 혹은 매우 완곡한 표현으로 교인들에게 주입된 신학적 명제들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이며 암울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목사님은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적은 수입(사례금)과 가진 물건들 중에서 얼마를 떼어내어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족하고 살기 위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목사님은 알았습니다.(참조 [492]).
[493] 이후는 ‘가정 방문’(심방)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장로들에게 심방을 떠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둥과 번개 치는 날에도 스스로 심방에 나섰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동일하게 찾아갔습니다. 요즈음처럼 목회상담실로 불러낸 것은 아닙니다. 병들었거나 - 육신적이든지 영적이든지 - 혹은 건강하거나 상관치 않고, 또한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걸어서 갔던 것입니다(참조, [493]-[497]). 당시 그의 동생은 농부였는데 ‘토마스 베케트 성소’(shrine of Thomas ἁ Becket)에 순례하기 위하여 종종 밭가는 말을 타고 갔지만 우리의 목사님은 걸어서 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지 않고 솔선수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나는 미래의 목사님들에게 권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이 목사님의 모범을 따르십시오. 만일 당신이 복음전도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당신이 마땅히 하기로 약속한 일을(복음 전도),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당신이 돈을 받고 있는 바로 그 일을(복음 전도) 당신이 하지 않고 교인들이 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조직을 짜는 데 당신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초서의 목사님처럼 되십시오. 교회의 다양한 활동과 행사와 프로그램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행동으로 교인들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오래전 내가 미국 개혁교단에서 목사직 안수를 받던 날 설교를 맡아 주셨던 잭 허팅가(Jack Huttinga) 목사님의 권면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목사의 삶이란 마치 유리 집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설명하면서 “자, 이제부터 당신은 대중의 면밀한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매우 소름끼치고 두려운 감정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교인들에게 드러내어진 삶을 사는 사람이 목사라면 그는 강단에서의 말과 그의 가정에서의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여러분은 존경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존경과 명예는 버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99] “그는 먼저 몸소 실천하였고 그 후에야 가르쳤다”라고 초서는 말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초서는 다시금 본문의 마지막 두 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열두 사도들의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것을 친히 실천하였습니다.”([529-530]) 이 구절은 적어도 동사의 순서에 의하면 마태 5:19의 예수님의 말씀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초서의 목사님은 그가 설교한 삶을 살았습니다. 실천이 먼저라는 것을 그는 항상 명심했던 것입니다. 말하기는 쉽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만 실제로 성육신화 된 설교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설교의 성육신화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사역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면제되는 적어도 두 가지 힘든 짐을 짊어지고 노동합니다. 첫째, 그는 그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 즉 ‘성결함’과 ‘거룩성’의 조달자라는 사실입니다. 문학교수가 그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있어서 문학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국어교수가 언어사용에서 어법에 정확해야 한다고 일반 대중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심각하게 문제를 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그들과 별로 차이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 가운데 그들보다 더욱 문학적이고 문법적인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한편 목사는 성결의 선생이며 신성(神聖)의 교사입니다. 그들의 삶은 그 모든 자세한 내용까지 대중들의 끊임없는 조사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목사님의 삶이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견디기 힘든 현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장래의 목사들이 이 사실을 깊이 마음에 새길 것을 권합니다.
초서는 목사를 금에다, 교인들을 철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금은 산화작용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녹이 슬지 않습니다. 반면에 철은 쉽게 산화되어 붉은색으로 녹이 씁니다. 만일 금이 녹이 쓴다면 철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초서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초서는 질문하기를, 더럽고 깨끗지 못한 목자가 어떻게 깨끗한 양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착한 목사에게 착한 양떼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만일 양떼들이 더럽고 깨끗지 못하다면 목사는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우리의 속담은 진리입니다. 좌우간 목사에 대한 평신도들의 특별난 기대와 요구는 모든 목사들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짐이며 핸디캡입니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 목사들이 짊어져야 두 번째 짐은 다른 어떠한 직업의 사람들도 지지 않는 짐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자신사이에 매우 친밀한 관계가 수립된다는 점입니다. 전형적인 신학교육은 사실상 신학생을 현장 목회에 충분히 준비되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졸업하자마자 즉시로 그의 양떼들의 심리와 정서들을 다루고 사역하도록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불가피하게 그는 그의 교인들과 정서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곳에 그의 소명의 특수한 위험이 가로놓여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직업은 이러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지는 않습니다. 학생들이 교수에게 와서 그의 남편이나 아내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불평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그들이 와서 할 수 있는 불평이 있다면, 당신의 강의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느니, 혹은 당신의 시험이 너무 어렵다느니 하는 종류일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이 정직하게 피할 수 있는 관계 속으로 그를 강제로 끌어들입니다. 목사는 영혼의 의사입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목사 역시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연약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연약할 수밖에 없어 스스로의 짐을 감당키 어려운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과 고뇌와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하고 치료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자신도 고통 하는 환경가운데서도, 자신도 유혹받고 감당키 어려운 일들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잘못하면 자신도 심각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기 쉬운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경건한 사람(선교사 Davidson)이 어떻게 조금씩 보이지 않게 간음에 빠지게 되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되는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서머세트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의 단편,『비』(Rain)가 보여주는 교훈과 덕을 상기하여 보십시오.
앞으로 목회하다가 혹시 여자 혼자 있는 가정을 심방하여야 될 경우, 여러분의 아내와 함께 가십시오. 어떠한 유혹이나 온당치 않는 의혹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실의 문에는 조그마한 유리 창문이라도 만들도록 하며, 아니면 항상 어느 정도는 열어놓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503, 504] “만일 우리가 신뢰하는 목사가 부정하고 더럽다면 / 평신도가 향락에 빠진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인가?” 그렇다면 당신과 양떼들 사이의 그 어떠한 부정하고 온당치 않은 관계를 암시하는 일들을 피하십시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어떤 소설 속의 설교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 무릎에 앉아 있는 여인은 여인이 아니라 양떼 중의 한 어린 양(lamb)일뿐 입니다.” 그때 그의 장로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대해 말하기를, “형제여, 다음에 양떼 중 어린양을 당신의 무릎 위에 앉히려거든 분명히 그것이 수컷 어린양(ram lamb)이 되도록 하십시오!”
1980년대 말경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 미국의 몇몇 유명한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들의 몰락이 있었습니다. 짐 베이커(Jim Baker), 지미 스웨거(Jimmy Swagart)등과 같은 당대의 유명한 TV 전도자들의 몰락은 당시 교회의 신뢰성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혼외정사로 몰락일보 직전에 처한 지미 스웨거트(Jim Swagart)는 공중파 TV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역사상 가장 극적인 참회를 연출해 낸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지가 그 광경을 표지에 실을 정도로 유명했던 참회였습니다. “O, Lord, I have sinned against thee, thee only!” [“오, 주여!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나이다!”](시 51:4). 그러나 그는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성적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한 번은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사창가에서 창녀를 자동차에 태우고 일방통행로로 역주행 하다가 교통경찰에 잡혔습니다. 잡힌 그가 이번에는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놈의 마귀 때문입니다!”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본인이 아니라 마귀라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가장 최후로 지켜져야 할 처녀의 순결성과도 같습니다. 도덕성을 상실하면 그의 사역은 힘을 상실한 삼손이 되고 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다 알다시피 그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이상적인 목사님은 몇 가지 본보기가 될 만한 것들이 더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집에 머물면서 양 울타리를 잘 보살피며 / 이리가 그의 계획들을 유산시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514-515] 부패하고 게으른 목사는 무섭고 소름끼치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도록 양떼를 방치합니다. 직무를 유기하는 목사가 많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정작 돌보아야 하는 양들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일들’에 수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각종 기관의 ‘장(長)’자리를 추구하다가 목이 길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 열등감에 빠진 사람일수록 그런 성향이 많이 있습니다. ‘시찰장’, ‘노회장’, ‘총회장’, 각종 ‘교단장’ 자리들을 탐하고 목말라 하는 우리시대의 어리석은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슴 칠 노릇입니다. 물론 내가 독선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어울리지도 않는 박사학위를 고집하여 혈세와 같은 교인들의 헌금을 남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의 ‘목회학 박사’ 학위 취득예배를 교회 재정으로 드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한국 교회라면 그 장래는 매우 암울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낸 헌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 노회장, 총회장이 되는데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무서운 죄악일 것입니다.
목사는 무엇 때문에 분주해야 합니까? 양떼를 돌보고 양 울타리 보살피는 일 말고 목사에게 우선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저 멀리 산 중턱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양들이 항상 있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늑대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양떼들을 위협하여 왔습니다. 속이 좁은 근본주의자들, 자유적인 사회복음주의자들, 무 율법을 가르치는 보편주의자들, 정신 치료적 설교로 현대인들을 유혹하는 사람들, 할리우드적 감상주의로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은 안으로부터 발생하는 무서운 위협들이며, 마약과 술, 성적 자유와 향락, 개인주의와 방종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외부적 위협들이기도 합니다. 초서의 시대보다는 지금에 더 많은 늑대들이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풍요와 기동력을 감안할 때 양 우리는 더욱 쉽게 공격당하여 부서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양떼들이 수렁에 허우적거리도록 방치하고 있으면서[510] 자신은 개인의 영리영달과 이익을 위해 런던으로 올라가려는[511] 목사들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를 몹시도 서글프게 합니다.
우리의 목사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떼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해왔습니다. “가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한국 교회는 수많은 개종자들을 얻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순수한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많은 목사들이 불순하게 응답하여 왔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즉 교회성장을 통하여 세를 확장하고 자신들의 명예나 능력을 보이지 않게 자만하고 과시하는 일입니다. 큰 교회의 목사들은 적은 무리를 보살피고 있는 목사들을 향해 고자세를 나타내곤 합니다. 적은 무리를 이끌고 있는 목사들 역시 보이지 않는 분노와 허탈감, 증오와 시기를 외형적인 겸손과 자책으로 위장합니다. 결국 목사들 간에는 천국 사역의 동료의식이나 하나님의 목동들이라는 생각들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수적 팽창주의는 개 교회주의를 가속화시켰으며, 목사들 간의 이질감을 조성하여 왔으며, 목사들의 개인적 성취를 위하여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크나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목사들이 심각할 정도로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병든 마음을 가진 목사들이 목회를 하니 양떼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양육 받을 수 있을지 의문시됩니다. 자연히 그러한 분노와 좌절감을 교인들을 향해 여러 모양으로 발산하고 있으니 불쌍한 것은 교인들뿐입니다. 마치 목자 없이 방황하는 양떼들이라고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다시 우리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양 무리들을 희생해가면서 전도에 종사하는 경향은 매우 큰 우려를 자아냅니다. 목사들은 먼저 양 우리 안에 있는 양떼들을 지키고 먹여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하시오. 그러나 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리하십시오.”라고 한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중 선한 목자에 관한 비유는 우리 안에 있었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 중 어느 한 마리도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떠나있는 동안에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위탁된 양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이제 초서의 목사님의 성품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485]에서 “그는 온화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를 설명이나 하듯이 [518-519]에서는 그가 “죄인들을 경멸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사는 오만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신적(神的)이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긍휼과 애정을 갖고 죄인들을 질책하면 그는 그 질책과 꾸중을 감사히 듣고 돌이키지만, 마치 목사가 하나님이나 되는 양, 오만하고 불손하게 징계하고 책망하면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법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매우 오만스럽게 교인들을 야단칩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사역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가르침은 목회자도 교인들이 죄를 지을 때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간주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일에 유약하게 대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온화하고 겸손하다는 것이 곧 모든 일을 부드럽게 타협해 나아간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세의 온유함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었으나, 그는 백성들의 잘못과 죄악을 엄히 지적하고 꾸짖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이 그처럼 통렬하게 비판했던 “평화다! 평화다!”를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아닙니다. 다시금 말씀드리거니와, 우리의 목사님은 “그러나 어떤 자들이 죄를 짓고도 고집적으로 완고하면, 그가 누구이든 ―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상관없이 ― 그를 책망하였으며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523-525] 혹시 여러분은 교회에서 누구에게 머리를 수그립니까? 누구를 무서워하십니까? 스스로의 양심에게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재력이 있는 장로가 아닙니까? 세상의 지위가 높은 교인에게 아부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직업적인 목사일 수는 있어도 소명에 충실한 진실한 목사는 아닙니다.
교인들이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마땅히 질책하고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할 경우로부터 움츠려 드는 소심한 겁쟁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적인 목사님은 그가 누구이든 ―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상관없이 ― 그를 책망하였으며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개혁신학의 가르침에 따르면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 중에 하나가 ‘권징’(勸懲, discipline)입니다. 권면하고 징계한다는 뜻의 전문용어지만 주로 책벌(責罰, 책임을 물어 벌을 내린다)의 의미가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교회 안에 책벌이 시행되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정당치 못하게 시행된 사례들도 없진 않았습니다. 나의 소년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어떤 여신도가 당시 이단이었던 ‘장막성전’에 가입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명문대학의 피아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으며, 시골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놓친다는 것은 커다란 교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담임목사님은 눈물로 그녀에게 권고하였고, 듣지 않자 공개적으로 교회에서 책벌을 내렸습니다.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도 그 사건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러나 이제는 시계추가 정반대의 쪽으로 쏠린 것 같습니다. 교회 안의 ‘책망’은 잊힌 단어들이 되었고 ‘책벌’은 사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고어(古語)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너무나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죄의 고백 없는 사죄, 죽음 없는 부활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본회퍼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값싼 은총’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울러 하나님의 존엄과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설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에 대한 지적이 없이는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진정한 위로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서 우리는 ‘우리의 죄들과 비참함이 얼마나 큰 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죄들과 비참함을 단지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치부하여 버리거나 그냥 넘어간다면, 혹은 신약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십계명의 ‘하지 말라’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린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위탁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는 어리석은 자들의 낙원에서 스스로 안위하면서 사는 바보들일 것입니다.
최근에 여러분의 교회의 강단으로부터 죄에 대해서 혹은 지옥에 대해서 두려운 설교를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물론 내가 말하는 두려운 설교란 협박성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인간의 죄와 비참함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해 주는 두려운 설교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설교는 하나님의 은총의 불가피성을 온몸으로 전율케 하는 설교입니다.
그가 책망할 때는 공정성이 있었습니다. 누구라고 봐주고 누구라고 눈감아 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지위에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사람의 재물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그는 목사의 직무를 공정하게 행사하였습니다. 물론 교회 안의 유명한 인사를 책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종종 이러한 일에 실패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오만과 대결을 위해서 나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처럼 배금주의의 제물이 되어 버린 곳이 또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의 일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악성 전염병이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가장 돈을 멀리해야 할 단체가 가장 돈을 사랑하고 돈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비극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변명하고 핑계를 댄다 하여도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계십니다.
한편, 동전의 다른 면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낮은 사람을 질책하고 책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처럼 죄책감에 찌든 사회의 기류아래 약자나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의 죄들을 지적하고 책망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흔히 불공평하고 부당한 사회의 희생자들로 치부하여 버리면서 그들의 죄들을 간과하거나 덮어버리는 것도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의 성적 간음이 점점 높아만 가는데도, 그들의 감정과 기분을 상하지 않는 정도 안에서만 ‘권면’을 할뿐입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간음자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적으로 활동적’(sexually active)이라고만 부를 뿐입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좀 더 가진 자의 알량한 자비심이 가져다주는 합리화이며, 사람의 생명을 단순히 경제적 측면으로만 바라보는 잘못된 인간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범죄자를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초서의 이상적 목사상은 특별히 우리 시대에, 특별히 헛된 명예나 존경에 대해 목말라 하는 많은 목사를 가진 우리 한국 교회를 향하여 매우 처방적이며 지시적입니다. 그는 “헛된 명예나 존경에 대해 목말라 하지 않았습니다.”[527] 그는 그가 받은 특별한 소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특별한 대우나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보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상상하건대, 그는 그에게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출하였으며, 결코 교회 회계 집사로 하여금 돈을 지출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엌을 스스로 고쳤을 것이며 사찰에게 목사의 개인적인 일들을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교인들이 그에게 신형 자동차를 선물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돈을 들여 자신의 자동차를 구입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재정을 마치 자신이 맡겨 놓은 돈으로 착각하여, 주의 사업이라는 미명아래 함부로 사용하고 남용하는 빌어먹을 못된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신의 이력서에 줄이 모자랄 정도로 거짓되고 헛된 명예로 가득 채우는 자들이 우리들의 목사라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신학도 가운데 명예와 권력을 밝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 매우 큰 재앙과 불행의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長)’자리가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목사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초서가 우리의 목사님에 대해 잘 말한 것처럼, “그렇다고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독선적인 양심을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528] 나나 여러분이나 동일한 목표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사역자요 복음의 수종자들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본문의 마지막 두 행이 참다운 목사상의 결론 부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열두 사도들의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것을 친히 실천하였습니다.”[529-530] 이 자리에 모이신 형제자매들이여, 그리고 미래의 복음의 사역자들이여,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가서 이같이 행하십시오.”
죄송합니다 하나님, 참으로 죄송합니다.
언제까지. 어떻게. 울어대면 될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