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이사야서 제 2 : "이 짐승만도 못한 자식들"

 

류호준 목사와 함께 하는 무지개 교회 열린 신학강좌

(2012 03 18 오후 2시, 이종석 전도사 녹취)

 

오늘은 계속해서 지난번과 같이 이사야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지난번은 이사야서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했고 오늘도 이사야서를 강의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번 강의 내용을 기억하신다면, 이 사순절(四旬節) 기간에 예언서들 가운데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그리고 에스겔서를 묵상하고 읽고 또 읽는다면, 엄청난 도전을 받고 엄청난 은혜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메이저리그(Major League) () 예언서입니다. 메이저리그 하면 어디요? 어디라고요?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입니다. 마이너리그(Minor League) 말고 메이저리그 급 말입니다. 사순절에 특별히 예언서를 읽는다면, 정말 많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네 명의 대표적인 예언자 하면, 누구죠? 불러주시겠어요? 처음에 누구? 시작!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입니다. 그들 중에서 우리가 아모스 공부했고, 호세아도 좀 공부했고, 이제 이사야입니다. 요즘말로 할 때, 이사야가 관료(官僚)로서 높다고 했어요 낮다고 했어요? 매우 높다고 했지요. 이사야는 굉장히 높은 사람 즉 요즘말로 대통령 기록 실장처럼 높은 직위에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왕궁에서 사역을 많이 했고, 국제 정세에 대해서 많이 알았고, 또 이스라엘이라는 자그마한 나라는, 또한 유다라는 작은 나라는 주위를 둘러볼 때 강대국(强大國)들 사이에 끼여서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마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골리앗과 같은 버거운 상대를 많이 만나는 것처럼, 즉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할 때 어려운 일들이 많았던 것처럼, 자그마한 유다라는 나라는 주변에 골리앗 같은 나라들 즉 강대국들이 있었습니다. 저 동북쪽에는 어느 나라가 있었다고요? 집에 가서 안 읽었지요? 집에 가서 공부했는데 기억이 안 나시나요? 유다라고 부르는 자그만 나라의 동북(東北)쪽으로는 그 당시 커다란 강대국이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바벨론입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신()바벨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이야기한다면, 어느 쪽인고 하니, 이란(Iran)과 이라크(Iraq)입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Mesopotamian Civilization)을 좌우하고 있는 큰 나라 즉 신()바벨론 제국이 있었습니다.

 

이 신()바벨론 제국이 나타나기 직전에 큰 나라가 있었습니다. 무슨 나라이지요? , 앗시리아(Assyria)가 있었습니다. 앗시리아가 있었을 때, 이스라엘은 크게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다요 북쪽으로는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잡아먹었던 나라가 바로 그 앗시리아 제국(Assyrian Empire)이었습니다. 그 나라를 완전히 초토화시켜서 잡아먹었던 나라가 앗시리아입니다. 성경에서는 앗수르(אשור)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주전 721년경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북이스라엘이 다 없어져버렸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호세아와 아모스가 그렇게 목 놓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발 좀 하나님 앞에 돌아오시오. 회개하고 돌아오시오. 사회적인 모든 불의(不義)들을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 사십시오! 사십시오!’ 하고 그렇게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얼마 후에 지진이 일어났었고, 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북쪽에서 앗시리아가 침공해왔습니다. 그들이 침공해 와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Samaria)를 비롯해서 전()국토를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북이스라엘은 지구상에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만 남았지요? 남유다만 남았습니다. 남유다만 남았어요. 그런데 남유다만 남았을 때도 이 사람들이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느냐? 그들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똑같았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 갈라졌는데 그들이 언제 갈라졌는지 아시지요? 옛날 즉 조금만 더 한참 위로 올라가보면, 솔로몬 왕국 때에 솔로몬(Solomon)이 성전을 짓느라 백성들에게서 세금(稅金)을 많이 거두어 들였어요. 요즘말로 하면, 교회당(敎會堂)을 건축하느라 교인들의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았어요. 솔로몬은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해서 어마어마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 성전을 지어놓고 솔로몬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이 지은 이 돌과 흙으로 만든 이 성전에 즉 예배당에 계실 수 있겠습니까?”(왕상 8:27; 대하 2:5-6; 6:18)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이 기도를 들을 때마다 묻는 질문은 그런 줄 알면서 왜 그렇게 크게 지었을까?는 것입니다. 성전을 엄청나게 크게 지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무엇을 많이 냈지요? 세금을 많이 냈어요. 세금을 엄청 많이 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르호보암(Rehoboam)입니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 다음에 백성들이 민원(民願)을 많이 제기했습니다. “이제 세금을 좀 감면해 주십시오. 우리가 그동안 성전을 짓느라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세금을 조금 감면해 주셔서 우리가 좀 편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때 르호보암이라는 젊은 왕은 자신이 왕이 된 후에 소위 말해서 보좌관(輔佐官)들을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청와대에 보좌관들을 심어 놓을 때, 누구를 심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두 파()가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자기 아버지 당시에 계셨던 원로(元老)들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 또래의 젊은 이상한 국장들이 쫙 있었습니다. 양쪽에 있는 이 두 파의 사람들에게 각각 물었습니다. ‘앞으로 국정(國政)을 운영할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원로들은 말하기를 그 동안 백성들이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세금을 좀 감해 주어서 백성들이 여유 있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줍시다하고 원로들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아닙니다. 지금이야 말로 계속 강공(强攻) 드라이브(drive)로 나아가야만 할 때입니다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두 파가 생겼습니다. 원로파와 젊은이파! 두 파가 생겼습니다. 르호보암이 누구의 손을 들었을까요? 원로파의 손을 들었을까요? 아니면 젊은 엘리트(elite)파 그룹의 손을 들었을까요? 젊은 엘리트 그룹입니다. 손을 잘 들은 것 같아요 잘못 들은 같아요? 젊은 엘리트 그룹 편을 들어서 더 세게 한 거예요. , 더 세게 하자 소위 변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루살렘이 서울이었는데 그 수도권에 있었던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저 변방에 있었던 사람들 즉 전라도에 살고, 경상도에 살고, 강원도에 사는 이 민중들은 너무 합니다! 너무 합니다!’ 하면서 계속 불평불만을 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 때에 저 지방에 아주 똑똑한 일급 공무원 즉 아주 탁월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은 여로보암(Jeroboam)이었습니다. 아까 말한 왕은 르호보암이고, 이 사람은 여로보암입니다. 그 사람이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렇게 선동하면서 여로보암이 이야기하기를, ‘우리가 일주일에 한 차례씩, 일 년에 서너 차례씩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면 얼마나 힘듭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양(漢陽)에 가서 예배를 드리려면 저 진주에서 올라오려면 진주에서 한양이 얼마나 걸려요? 진주 천리(千里)길이라고 했잖아요. , 진주에서 오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 걸리고, 광주에서 오려면 한 달 이상 걸리고, 올라오다가 모텔에도 들어가야 하고 하려면, 이것하고 저것하고 뭐하고 하려면,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마련했습니다. ‘, 당신들이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까지 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에 큰 것 하나 만들고, 광주에도 또 하나 만들고. 또 어디에요? 부산에도 하나 만들고, 강원도에도 하나 만들고. 여기에 가서 우리가 예배드리도록 합시다!’ 하고 거기에 성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있는 르호보암 왕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조세(租稅)를 좀 약하게 해 주세요. 세금 좀 약하게 해 주세요. 왜냐하면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중앙정부에 있는 르호보암과 그의 젊은 팀들은 아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 철권통치(鐵拳統治)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민들이라는 것은 뺑뺑이를 돌려야 말을 잘 듣는다고 말합니다. ‘교인들도 뺑뺑이를 돌려야 정신없이 따라 오지. 여유를 주면 그 다음엔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뺑뺑이 돌린 것입니다. 그때에 르호보암 말고 아까 말한 그 여로보암과 여로보암을 추종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치적인 이념 때문에 남과 북이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이 북쪽에 있는 아까 말한 사마리아라든가, 벧엘(Bethel)이라든가, 저 북쪽에 있는 단(Dan)이라든가 하는 곳에 무엇을 만들었다고요? 지역성소(地域聖所)를 만들었습니다. 그 성소를 만들어 놓고, 북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성당(聖堂), 여호와 신당(神堂), 교회당, 이렇게 말해놓고, 성소에다가 또 무엇을 만들어 놓았냐하면, 여호와 대신에 실제로는 그 안에다가는 무엇을 만들어 놓았는고 하니, 십자가가 아니라 뭐요? 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왜요? 왜 송아지 상을 만들어 놓았느냐 하니,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 한번 따라 하세요. 기복신앙(祈福信仰). 무슨 신앙이라고요? 기복신앙. 기복신앙이라는 뜻이 뭐지요? 기복신앙은 복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건강도 주시고, 장사도 잘되게 해 주시고 하는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기복신앙, 이 기복신앙의 본산이 바알(Baal) 종교였습니다. 이 바알 종교가 섬겼던 형상이 무슨 상이라고요? 송아지 상이었습니다. 특별히 황소 상이었습니다.

 

이 황소 상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이것은 첫째로 힘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은 무엇이 있어야 살아요? 사실 힘이 있어야 살잖아요. 사실 역()자를 써보면 권력(權力), 금력(金力), 재력(財力), 또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분이 붙일 수 있는 모든 힘들, 그 힘들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행사하거나 휘두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힘을 원했습니다. ! 그 다음에 이 황소 상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고 하니, 이것은 힘과 함께 번성, 번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육하고 번성해서 잘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건강과 번영의 신학(繁榮神學, the theology of prosperity)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건강과 번영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저를 한 번 따라 하세요. 건강과 번영의 신학!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으면, 당신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면, 건강과 번영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제일 많이 팔리는 복음(福音)입니다. 사실은 이 건강과 번영의 복음(繁榮福音, the gospel of prosperity)이라는 것은 1970-80년대에 미국에서 수입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옛날부터 있었지만, 미국에서 제일 많이 들어온 것이 웰스 앤 헬스”(wealth and health)입니다. 웰스(wealth)라는 것은 재물, 헬스(health)는 건강입니다. 건강과 번영의 복음이라는 것, 이것은 외국에서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미 아까 무슨 신앙이라고요? 기복신앙으로 있었습니다.

 

이 기복신앙은 본래 구약으로 보면 무슨 종교가 가르쳤다고요? 바알 종교가 가르쳤습니다. 바알 종교의 핵심은 당신들이 신()을 믿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이유 중에 하나는 딱 그것이다. 건강을 주시고, ()을 주시고 자녀들이 잘되고, 또 무엇 하고, 무엇 하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입니다. 이것이 민중들이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바라는 것 때문에 잘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여호와 종교라고 붙여놓고, 여호와 성소라고 붙여놓고, 그 안에서 설교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했던 모든 내용들은 황소 상으로 대표되는 건강과 번영 혹은 기복, 이런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니 북이스라엘이 종교생활 혹은 여호와 산당, 여호와 신앙, 여호와 종교,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갔을까요? 안 갔을까요? 많이 갔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꽉 찼어요. 왜 찼을까요?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들이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거나 바라는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정말 희한(稀罕)합니다. 복음이 나가더라도 그중에서 내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이 강화되고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 당시 가장 커지게 된 교회당 이름이, 아까 이야기했던 그 교회당 이름이, 호세아 선지자가 설교하고 그 다음에 아모스가 가서 설교했을 때, 북이스라엘에서 제일 가장 큰 교회당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거기에 있던 목사님의 이름이 아 씨라고 했어요. 아마샤 그랬어요. 그런데 그 교회당에 가서 이러면 안 됩니다하고 외쳤던 선지자의 성()이 뭐지요? 그것도 또 아 씨에요. , 아모스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당 이름이 벧엘입니다. 벧엘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지요? 벧엘(בית־ּאל)하나님의 집입니다. 벧엘이라는 이름은 언제서부터 유래했습니까? 어디서부터 유래했지요? 야곱에서부터 유래했잖아요. 야곱에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북이스라엘의 민족에게 있어서 오래된 전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무엇을 자랑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들의 오래된 전통을 자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신통방통하다. 여기에 오면, 언제요? 야곱이 멀리 떠날 때, 하나님이 나타난 것처럼, 여기 오면, 누가 나타난다고요? 하나님이 나타난다. 요즘 말로 하면, 여기는 용한 교회이다. ‘여기에 와서 기도하게 되면 용한 데가 있다하는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 벧엘이었습니다. 벧엘에서도 전파하고 가르친 내용이 무슨 종교라고 했어요? 기복신앙, 건강과 번영의 복음을 계속 가르치는 것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기복신앙이었다.

 

그것도 문제였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은, 자기의 일상생활 즉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은 뭐가 많았을까요? 불의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종교생활은 열정적으로 하지만 자신의 삶은 뭐가 없었다고요? 정의롭지 못하고 공의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중해서 섬겨준 사람이 누굴까요? 아모스 목사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목사님은 남()에서 살았기 때문에 계속 공의와 정의를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거기 북()쪽 출신으로서 그래도 내 식구들, 내 나라가 불쌍해서 하나님께서 그래도 당신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돌아오시오! 돌아오시오!’ 하고 호소했던 목사님이 호 목사님이지요? 호세아였습니다. 이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이 돌아왔어요? 안 돌아왔어요? 안 돌아왔기 때문에 그런 메시지를 전한 후에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다시 말해서 한 세대가 몇 년이에요? 30년이지요. 한 세대가 가기 전에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에 의해서, 앗시리아 대군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의 수도(首都)였던 사마리아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그렇다면 이 북쪽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어디로 피난을 갔을까요? 그렇지요. 남쪽으로 피난을 갔어요. 그렇게 해서 북이스라엘은 존재 자체가 없어져버렸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예수님 당시에 사마리아 여자 들어보셨죠?(4:7) 사마리아는 북쪽인데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갔지만(4:4)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놈들은 개와 같다고 해서 남쪽 유다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형편없이 알았어요(4:9). 왜 그렇게 했냐 하면, 그들은 민족의 순수성을 갖지 못하고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을 때, 그 당시에 다른 나라 남자들, 다른 나라 여자들하고 결혼해서 피가 깨끗지 않다는 이유로 그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누가 가졌다고요? 남쪽 사람들이 가졌어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아주 좋지 못한 혈통적 순수성, 한국 사람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을 무슨 민족이라고 하지요? 배달민족이라고 하지요. 배달민족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배달민족? 제가 만들어낸 뜻으로 하면, ‘배가 다르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민족.’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요? 피를 중요시 여기잖아요. 그래서 한국말로 이런 말도 있잖아요. 물론 외국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무엇이 진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것을 제일, ()세계에서 그런 말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이 우리에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물보다 피가 진한 것이 아니라 피보다 물이 진한 것을 아시죠? 여러분 제가 쓴 책을 보면 알아요. 원래 이 말은 서양에서 나온 말이에요. 물보다 피가 진하다는 말이 아니라 피보다 물이 더 진하다는 말은 세례로 인해 나온 말이에요. 세례를 베풀 때 무엇으로 베풀어요? 인종적인 차별, 즉 혈연적인 모든 것들을 끊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엇으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차별(人種差別)이라든지, 성차별(性差別)이라든지 혹은 신분차별(身分差別)이라든지 이런 것을 가져서는 돼요 안 돼요? 안 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북쪽으로 걸어갈 때 사마리아 지역을 돌아서 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지요? 사마리아로 지나갑니다. 사마리아로 지나가면서 여자를 만납니다. 그 여자에게 묻습니다. 당신 남편이 몇이요? 그러잖아요? 몇 명이라고 하죠? 여러분이 경험하지 못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다섯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했잖아요(4:16-8). 물론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가 그 여자가 살았던 곳, 그 여자가 예배 드렸던 곳이 주로 어디인지 아시지요? 성경을 보면, “이 산”(4:20)이라고 했는데 그 산이 그리심 산(Mt. Gerizim)입니다.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지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린다는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저 북쪽의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교회 공동체라 하면 항상 무엇을 연상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설교했는데요. 장소에 대한 집착이 강했어요. 여기서 저기서. “때가 오리니 더 이상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고.” 다 같이 외워보세요. 사람이 어떻게 예배할 때가 오나니?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4:23) 그랬지요. 예배란 어디, 어느 곳, 어느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핵심은 신령과 진정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가지 즉 이 두 낱말은 첫째로 성령(聖靈) 안에서라는 뜻이고, 두 번째로는 진실로, 외식(外飾)이 아니라 진심(眞心)을 가지고라는 뜻입니다. 진심 혹은 진정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眞理)입니다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예배를 드리는 것, 이 두 가지가 예배자의 핵심입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이제 몇 년도로 가냐면 예수님 당시로부터 한 8 세기 전으로 돌아갑니다. 북이스라엘은 없어졌고 이제 어디만 남았지요? 남유다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남유다 사람들이 무슨 오해를 했느냐? 한 번 저를 따라서 하세요. ‘우리가! 우리가 정통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북에 있는 사람들하고 남에 있는 유다 사람들이 항상 경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하니까 남유다 사람들이 아이들 말로 샘통이다. 잘됐다. 역시 저쪽은 짝퉁이고 우리가 진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에게 위험천만한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냐 남이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이 있는 것은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사람이든지 하나님 마음에 합하여서 정말 정의롭고 공의롭게 사느냐 안 사느냐! 이것에 문제가 있었지 하나님은 혈연이나 인정으로 간다 안 간다? 가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남쪽에 있는 사람들이 오해를 한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에 북이스라엘을 쳤던 나라의 이름은 어느 나라였죠? 앗시리아였습니다. 이 앗시리아가 멸망하고 그 앗시리아를 대신했던 큰 나라가 있었으니, 무슨 나라요? 그것이 바벨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 지금 남유다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저 밑에서는 누가 있었다고 했죠? 이집트. 그리고 그 두 나라 사이에, 거기에 끼어 있는 나라가 유다였습니다.

이런 유다에 유명한 왕이 있었습니다. 50년 동안 통치했던 유명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이 웃시야였습니다. 그 웃시야가 죽던 때에 부르심 받았던 사역자가 있었으니, 누구라고요? 이사야 였습니다. 평생을 웃시야를 모시고 살았는데, 다시 말해서 자기 관료적인 온순성을 가지고 평안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웃시야가 죽자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던 안전장치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완전히 뒤집어 지면서 그 때에 비로소 이사야가 누구를 만날까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이사야서 몇 장이요? 여기잖아요. 이사야 6장입니다. 이사야 6장에 바로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가 어떻게 부르심 받았는가? 저를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무너질 때, 비로소 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라고요? 이사야입니다. 현대적으로 좀 이야기하면, 내가 알고 있는 요 세상 가운데서 내가 기반을 두고 있는 그 세상, 그 세계를 그냥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편할까요? 편하지 않을까요? 편하지요. 그것이 지난번에 했던 관료적 온순성이라고 합니다. 관료적 온순성은 그런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과 내가 안주(安住)하고 있는 세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편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안주하는 그 세상이 지진을 만나고 뒤집어지거나 깨어지거나 일그러질 때 충격이지요. 그 혼란과 혼선에서 사람들은 그 혼잡(混雜)과 혼돈(混沌)을 경험하기 힘드니까,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 대안(代案)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붙잡고 살 수 있고 할 수 있는 그런 세계.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것에 대해서 NO하시고 자기의 세상을 보여주시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끌려가기 시작한 사람이 이사야입니다. 그렇게 해서 끌려가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세상 가운데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자기가 살고 있는 그 나라! 북이스라엘이에요 남유다예요? 남유다예요. 이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겉으로 볼 때에는 이게 말짱한데 실제적으로 들어가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그들에게로 가서 남유다 사람들에게로 가서 외쳐라하는 것이 무슨 성경이지요? , 이사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이 어느 정도 감을 잡으셨을 텐데. 이사야서의 메시지는 우리가 애완동물들을 기르듯이 잘 다듬어 주고 보살펴주고 ! 참 얼마나 힘들지?’ 이렇게 시작할 것 같아요 안 할 것 같아요? 아니라는 것이지요. 매우 충격적인 메시지가 나와요. 충격적인 메시지의 첫마디가 무엇인지 아세요? ‘예라! 짐승보다 못한 자식아!’ 이렇게 나와요. 그게 무엇보다 못 하다고요? 짐승, 한국말로 예라! 개보다 못한 자식 같으니라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 이사야 메시지의 첫마디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메시지입니까? 우리는 그냥 겉과 속이 있지만 그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우리가 그 처음 부분만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1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하셨도다.

 

다시 2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보면 여러분 각자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하고 좀 다른 것이 있을 것입니다. 뭐가 다르냐하면, 여기를 보면, 이쪽은 내어서 쓰고 이쪽은 들여서 썼지요. 내어 쓰고 들여 쓰고, 내어 쓰고 들여 쓰고. 또 하나 3절을 보시면, 내어 쓰고 들여 쓰고, 내어 쓰고 들여 쓰고. 원래 성경이 저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시()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시로 되어 있다는 말은 좀 썰렁한 이야기지만, 여러분들이 교보문고에 가서 시집(詩集)을 샀다고 합시다. 시집을 샀는데 시가 100 페이지짜리 시집이에요. 그런데 그 시집을 보니까? 1-100페이지 까지 빡빡하게 쓰여서 인쇄된 시집을 보신 적이 있어요 없어요? 그런 시를 보신 적이 있어요? 없지요. 그런데 대한민국에 있는 교인들만 그런 시집을 가지고 다녀요. 멍청하게도 왜 그럴까? 우리의 한국어 성경에 구약의 거의 2/3가 시예요. 그런데 인쇄를 어떻게 할까요? 다 빡빡하게 하는 문체(文體)로 해요. 여러분들이 혹시 외국어 성경을 보신 분은 구경만 해봐도 알겠지만, 외국어 성경은 시를 다 시처럼 인쇄해 놓았어요. 그리고 시처럼 인쇄를 해 놓았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다 해놓았어요. 내어 쓰고 들여 쓰고를 다 했다는 거예요.

 

짐승보다 못한

 

1:2 들으라, 너 하늘들이여, 귀담아 들으라, 너 땅이여

야웨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아들들을 길렀고 그들을 양육하였도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대항하여 일어섰구나.

1:3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통찰력]

나의 백성은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판단력]

 

3절에 보시면, 내어 쓰고 들여 쓰였다는 것은 그 둘을 합해서 하나의 시행(詩行)입니다. 하나의 시행이 몇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요? 몇 부분이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고 할 때, 이것이 하나의 시행입니다. 하나의 시행이 몇 부분?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소리를 두 번씩 하기 때문에 이것을 딱 부딪치면, 그것이 더 심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소는 그 주인을 알거든! 이제 이사야가 그런 말을 해요.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는 그 주인을 알거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거든!’ 이렇게 나가는 거예요. 이 말만 보더라도 소는 누구를 안다고요? 그 주인을 알아요. 여러분들 집에서 애완동물들도, 개도 누구를 알아요? 주인을 알아보지요. 그런데 여기 나귀는 주인을 안다? 모른다? 안다(하하!). 알긴 뭘 알아요? 여기 보니까? 나귀는 뭘 알아요? 유대인들이 볼 때, 짐승 가운데 가장 멍청한 짐승이 뭐에요? 멍청한 나귀예요. 나귀니까? 주인을 몰라요. 그래도 지 밥통이 어디 있는 줄 안다. 아무리 멍청한 나귀라 할지라도 지 밥통은 어디에 있는 줄 안다는 거예요.

 

, 이 정도 이야기하면, 예언자가 설교할 때, ‘여러분, 소는 그 주인을 알거든요.’ 소가 얼마나 충성스러워요. 주인을 위해 충성스럽잖아요. 주인을 위해 밭도 메고 결국은 눈물 뚝뚝 흘리면서 죽잖아요. 소는 그 주인을 알고 짐승가운데서 가장 멍청한 짐승이라고 생각했던 나귀는 주인은 몰라도 뭐는 안다? 자기 밥통을 안다는 거예요. 그럼 그다음 말은 뭐가 나와요? 그러면 너희들은 소보다 나? 멍청한 나귀보다 나? 나은 것이 뭐가 있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이해하지 못 한다고 할 때, 이 말을 한마디로 하면 예이! 이 짐승보다 못하고, 개보다 못한 자식들.’ 이것이 누가 설명한 것이라고요? 누가요? 이사야가 누구에게? 왕궁에서 설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에게 설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고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많을까요 적을까요? 둘 중에 하나에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는 회개하거나 아니면 성질부리고 나가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복음은 원래서부터 우리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촉구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멍청한 나귀는 주인은 몰라도 뭣을 안다? 몇 시에 어디에 가면 내 밥통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여기서 주인은 누굴까요? 하나님이죠. 그런데 주인이라고 쓴 단어를 보면 아주 독특해요. 바알(בעל)입니다. 바알이라는 원래 뜻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혹은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집에 가셔서 자기 남편보고 바알님이여해보세요. 그게 무슨 뜻이죠? ‘남편이여혹은 주인이여하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말을 쓸 때는 이중적인 의미라는 것이에요. 너희가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말고 가짜 주인 같은 누구? 바알 신(Baal )이라는 거예요.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그런데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그렇다면 알지 못한다는 말의 목적격(目的格)이 있을 것 아니에요. 누굴까요? 목적격 있어요? 없어요? 국어 공부하는데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했는데 목적격이 있어요? 없어요? 여기 목적격이 없어요. 그런데 없어도 알 수 있어요. 저게 누군지 알지요. 이스라엘은 정작 하나님을 모르고, 한 번도 자기 주인도 몰라보고, 내 백성은 뭣도 없다? 이해력도 판단력도 없는 멍청한 백성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가겠습니다. 1절 첫 번째 보면 들어라, 너 하늘들이여! 귀담아 들으라! 너 땅이여.” 이 말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초로(初老)의 한 50대 내지 한 60, 뭐 이런 초로의 어떤 아버지가 시골에서 해가 뉘엿뉘엿 지는데 긴 곰방대를 물고 동네 산 중턱 동산에 올라가서 먼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폭폭 내시면서 곰방대를 치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 속이 너무 상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그러다가 저 밑에 보니까 갓을 쓴 김()삿갓이 지나가요. 김삿갓이 지나가니 처음 본 사람이에요. 만나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지나 가니까? 철노의 그 노인이 지나가는 나그네여, 내 말 좀 들어보소.’ 그 당시 이사야 때는 어디다가 말하고 있죠? “하늘이여, 들어보소! 땅이여, 내 말 좀 들어보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 속상한 마음을 하늘이여, 들어봐! 땅이여, 내 말 좀 들어봐! 땅이여, 내 말 좀 들어봐!” 그래 뭘 들어볼까요? 여기에 나오지요. “내가 그들을 길렀고 내가 그들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는도다.” 거기 본문을 보면 누가 이야기하는 말이지요? 여기 나와 있잖아요? 그래요.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여 봐라! 내가 아들들을 길렀는데 아들들을 기르고 아들들을 양육하였다.” 그렇다면 누구와 누구 사이의 문제이지요? 여기에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문제를 표현한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 독특한 것은 동사(動詞)가 두 번씩이나 쓰였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길렀고, 자식을 양육하였다는 말입니다. 보통 시()를 지을 때는 동사는 한번만 써요. 그런데 두 번씩이나 쓴 것은. 개나 짐승들은 태어나자마자 24시간 내에 다 걷지요? 짐승들은 다 걷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언제 걸을까요? 일 년 지나서요? 뭐가 일 년이에요. 평생이지요(하하!). 자식들이 무슨? 사실 자식들은 10, 20년이 되도록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잖아요. 짐승들은 딱 태어나자마자 힐떡힐떡 하더니, 벌떡 일어나서 걷잖아요. 그런데 사람들만 긴 시간 동안.

 

그렇게 내가 양육하고, 내가 그렇게 길렀는데.” 제가 번역을 이렇게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을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기르고, 내가 양육한 것은다름이 아니라 뭐예요? “내 자식이었다.” 강조점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니 깃달티 베 로맘티”(בנים גדלתי ורממתי). 뜻이 무엇인고 하니, 목적어를 맨 앞에다 놓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도치법(倒置法)이라고 했지요? 강조하는 것은 맨 앞에다 꼽아놓는다는 것은 강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기르고 내가 양육하고 내가 등록금대주고 했던 것은 개나 돼지가 아니라 내 자식이었다. 두 번째도 강조예요.

 

그런데 바로 그 자식이 나에 대해서 대항했다. 이러고 나갔다는 거예요. 요즘말로 하면 부모에게 주먹질하고 대들고 소리 지르고 나갔다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마음이지요? 아버지의 깨진 마음이에요. 깨진 마음을 어디에다 하소연 할 데가 없어서 곰방대를 물고 뱅뱅 돌고 있는데 누가 지나갔다? 김삿갓이 지나갔다. 그래서 김삿갓에게 하는 말이 지나가는 나그네여, 내 말 좀 들어보소.” 그것을 하늘이여, 들어보라! 땅이여, 들어보라!” 이것이 한국식입니다. “하늘이여, 들어보라! 땅이여, 들어보라!” 얼마나 속상하면 내가 양육하고 내가 기른 것은 개나 돼지가 아니라 내 자식이었는데 그런데 내 자식이 나를 향하여 대들었다.” 그래서 3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자기 탄식이 나오지요.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나귀라도 누구를 몰라도? 주인은 몰라도 자기 밥통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마지막이 펀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 있어서 그런데 이스라엘 이 백성 이 자식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내 백성은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이것이 이사야의 첫 출발입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처음 전했을 때에 충격이 컸을까요? 안 컸을까요? 엄청나게 컸겠지요. ‘뭐라고? 우리를 개자식? 우리를 짐승? 우리가 소보다도 못해? 나귀보다 못해?’라고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이 메시지에 대해 둘 중에 하나이겠지요. 이사야의 메시지에 대해 그 당시 보여야 할 반응이 둘 중에 하나예요. ‘맞아!’ 회개하고 돌아오거나, 아니면 그럴 수가 있어!’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리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듣기에 좋게 하는 것 즉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살게끔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가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세 가지만 딱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전문적인 용어로 법정소송이라고 이야기해요. 즉 하나님께서 이사야가 원고가 되어서 누구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어디다 세우는 거예요. 피고석에 세워서 고발하고 고소하는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천상(天上)의 어전회의(御前會議) 법정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일까? 여기 한번 보세요. 2절에서 보시면, 2절의 죄가 무엇일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반역의 죄. “그러나 그들은 나를 대항하여 일어섰구나.” 그들이 나를 향해 대항했다. 반역의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대드는 것이 죄입니다.

두 번째로, 3절에 보면 무엇이 죄냐?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슨 단어인 것 같아요? 무지(無知)라는 죄! 무지가 죄입니다. 공부 많이 안 했다는 그런 무지 말고요.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나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들을 우리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이것이 무지의 죄입니다. 이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첫 번째는 반역이고 반항이고 대드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잘 이야기한 것처럼 제가 여러분에게 문제를 하나 이야기하겠습니다. 길거리에 5만 원 짜리하고 만 원 짜리가 떨어졌을 때, 00집사님, 어느 것을 줍겠습니까? 5만 원짜리? 만 원짜리가 있으면, 어느 것을 집습니까? 두 개다 집습니다(하하!). 지옥도 두 가지 지옥이 있지요? 하나는 무지 무지 뜨거운 지옥이 있고, 하나는 무지무지 추운 지옥이 있어요. 만약에 가야한다면, 어디에 가겠습니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지옥은 뜨거운 지옥이지요? 풀무불이다 뜨겁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곳에 누가 가느냐 하면, 이곳은 하나님 앞에 대항하고, 대적하고, 대들고 반역하는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열 받으시게 하면, 열 받는 곳으로 가는 거예요. 성경의 표현자체가 뜨거운 지옥은, 풀무불은 하나님 앞에 반역하고 대항하고 대적하는 반역하는 사람이 간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추운지옥도 있다고 했어요. 왜 추운 지옥이냐?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둘 중에 하나에요. 하나님을 공격하고 대들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보기 싫어서 하나님이 싫어서 멀리 멀리 도망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쉬워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가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교회에서도 신앙도 점점 멀리 멀리 가기 시작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면, 결국 빛이신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면, 어디로 가는 거지요? 어둠으로 가는 거지요. 그 뜻이에요. 가인(Cain)이 살았던 데가,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멀리 가기 시작하면, 그곳이 밝은 곳이 아니라 어두운 곳이지요. 어두운 곳을 한자어로 음부(陰府, שאול)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어두운 곳! 지옥이라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싫어서 멀리 멀리 가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너희가 어두움 가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2:13). 성경에 지옥도 두 가지가 있다. 만약 여러분이 가야한다면 어디로 가겠어요?(하하!)

 

여기 이사야가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 유다가 반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반역이라는 것은 정치적 용어입니다. 파샤(פשע)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정치적인 용어예요. 왕이 있는데 그 왕에 대해서 반역하다라는 것. 그 뜻입니다. 그럼 딱 맞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왕이라고 이야기하고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저항하는 모든 행위들은 무엇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틀림없이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아니면 그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즉 무지한 것, 그 무지도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 두 가지를, 이것을 이야기 하고자 왕과 백성의 관계, 주인과 가축의 관계,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 적어도 세 가지 은유를 통해서, 은유법 알죠? 이 세 가지 은유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 가지 은유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처음 부분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충격적이지요? 그렇잖아요. 아마 오늘날 어느 설교자가 우리 교회에 와서 이 개보다 못한 자식들아!”하면, 너무나 충격적이지요. 그러나 진짜 교인이라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개보다 못하지요할 것입니다. ? 말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인이라고 하면서요. 우리가 원래 무슨 죄인이지요? 몹쓸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항상 우리는 뭐라고 생각해요? 괜찮은 죄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는 것하고 우리가 나아오는 것하고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이야기 한 것처럼 나는 나오미(נעמי)입니다. 나는 당신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나는 구세주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는 거지입니다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늘 반응할 때, 둘 중에 하나가 되요. “맞아! 저것은 나를 향해서 하는 말씀이구나!”하고 회개하고 돌이켜야지!” 돌이킴을 하거나 아니면 끝까지 반항하는 것. 반역한다면 그 길이 어떻게 될 것인가? 유다에게 처음 오프닝 멘트(the first opening announcement)가 이렇게 시작되었다는 사실들을 기억하고, 그렇다면 다음 시간에 무엇이 이스라엘 즉 유다의 죄였던가? 하는 것은 우리의 죄였던가? 하는 것은 우리가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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