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예언서 강의 1

 

 

[본 원고는 류호준 목사가 2011. 10. 7일 저녁 시간에 분당 샘물교회(박은조 목사)에서 한 강의를 이종석 전도사가 녹취한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별로 반가운 눈치는 아니시지만 어쨌든 분당 샘물 교회에 오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계신 데가 분당이시지요? , 분당입니다. 그런데 분당이란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원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은 천당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주소는 분당이라고 그러지요. 제가 말하는 분당은 나눌()()자입니다. 깨어지고 일그러지고 왜곡된 세상 가운데 산다는 뜻이지요.

 

달리 말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향은 에덴동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지요? 에덴의 동쪽. 그렇지요? 에덴의 동쪽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지요? 누군지 아시지요? 에덴의 동쪽하면, 제임스딘(James Dean, 1931-55)이 생각나잖아요. 그리고 제임스 딘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유 없는 반항이라던가요?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한 3일 동안 여러분에게 예언서 전반에 대한 조감도를 그려드릴 생각입니다. 예언서나 선지서나 교차적으로 사용하겠습니다.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분당과 천당, 에덴동산과 에덴의 동쪽에 관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다 가지고 있을 텐데, 성경의 제일 첫 번째 두 장하고 성경의 마지막 두 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의 첫 번째 두 장은 창세기 1장과 2장이고, 그리고 성경의 맨 마지막인 요한 계시록의 두 장 즉 21장과 22장이 있습니다. 이 두 장들은 모두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번째 두 장인 1장과 2장은 영광스럽고 찬란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시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제일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좋다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면, ‘토브’(טוב)라고 합니다. ‘좋다.’ 좋은 말 할 때 따라서 하세요. ‘토브.’ 무슨 뜻이라고요? ‘좋더라,’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제일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좋다는 것은 사이가 좋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창조세계의 모든 것들에는 사이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모든 우주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는 다 사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에게도 사이가 있고 사람과 사람에게도 사이가 있고 다 사이가 있습니다. 좋음이라는 뜻은 그 사이가 좋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제자리에 있을 때 모든 것들은 사이가 좋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좋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있고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과의 사이가 있고 목사님과 교인들의 사이가 있고 세상의 모든 것에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 사이는 넘어서도 안 되고 모자라서도 안 되고, 하나님이 딱 정해놓은 상태 가운데 있을 때, 이것을 히브리어로 뭐라고 한다고요? ‘토브.’ 번역하자면 좋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할 때, ‘의롭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의롭다 할 때의 ’()라는 개념 말입니다. 그러나 라는 것을 아주 쉬운 말로 한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의 상태입니다. 즉 의롭다는 것은 사이가 좋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저희 학교에 유명한 가수 교수 시인과 촌장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지요? 있어요. “시인과 촌장하면 떠오르는 사람, 하덕규 아시지요. ~~, 하덕규. 저와 같은 학교에 있는데 제가 정말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후배 교수입니다. 재작년인가 목사안수를 받았어요. 그런데 하덕규 교수가 부른 노래 가운데 여러분이 잘 아는 노래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가시나무지요? 하덕규가 지어서 부른 노래인데 조성모 에게 준 거레요. 그냥요. 또 그분이 부른 노래 가운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어요. “풍경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하덕규의 풍경이라는 노래 말입니다. 하덕규의 풍경,” 이 노래는 굉장히 짤막한 노래입니다. 그 짤막한 노래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 2장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간결하게 표현한 구절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이라고요? 어떤 풍경이라고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 놓았던 그 제자리, 물은 물, 바다는 바다, 하늘은 하늘, 달은 달 ,별은 별, 사람은 사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서 서로 사이사이가 좋을 때, 이것을 좀 더 유식한 말로 의롭다하는데, 그 것이 제일 좋은 상태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1, 2장을 보면 영광스럽고 찬란하고 멋진 출발(beginning)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에도 영광스럽고 멋지고 찬란한 끝(end)이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신부처럼 내려오는 광경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 다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그럼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는 뭡니까? 달리 말해 창세기 3장에서부터 계시록 20장까지, 성경의 첫 두 장과 마지막 두 장 사이에 있는 그 가운데 토막을 사자성어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따라서 하세요. “엉망진창!” 따라서 하세요. 하시라니까요. “엉망진창!” 그것이 소위 역사”(歷史)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역사의 시작인 창세기 3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 20장까지인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입니다. 이 엉망진창을 제가 다른 말로 표현했지요? 에덴의 동편, 다시 말해서 반항하고 대들고 저항하는 그런 세상이란 말입니다. 아니면 또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천당(天堂)에 살지 않고 분당(分黨)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누어지다는 분()자예요. 우리는 나누어지고 깨어지고 일그러진 곳에 삽니다. 따라서 엉망진창과 같은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에덴의 동편에 살고 있는, 그리고 분당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우리의 마음속에 깊고 깊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대한 그리움이지요?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에요. 고향에 대한 그리움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C. S. Lewis)는 그의 유명한 설교영광의 무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inconsolable secret. 그 어느 것으로도 무엇 할 수 없다고요? 위로받을 길이 없는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질문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인 창세기 3장부터 계시록 20장까지를 사자성어로 무엇이라고요? “엉망진창!”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캄캄한 밤과 같고 엉망진창과 같고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기 힘들고 갈팡질팡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기에 너무나 좋은 이 세상 가운데서 여러분과 제가 똑바로 걷기가 쉬워요 어려워요? 똑바로 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 바로 이 엉망진창과 같은 이 길고 긴 스토리 가운데서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대하드라마입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성경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목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떤 사람들은 유식하게 소명’(召命)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목사나 사역자만 소명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Come home, come home, come home. 어디로 오라고요? 집으로 오라는 소리입니다. 더 이상 멀리 가지 말고 다시 길을 찾아 집으로 오라는 이야기가 성경의 처음서부터 마지막까지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면 여기서 누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어떻게 해요? 여러분과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분과 내가 노력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길을 잃고 있을 때, 엉망진창과 같이 있을 때,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찾아오는 이야기가 바로 무엇이다?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소리를 많이 듣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누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먼저 사랑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응답하는 이야기, 이것을 가리켜 우리가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부르셨을 때, 한 개인을 부르시기도 하고 때때로 가족을 부르시기도 하고 때때로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떻게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세상 가운데서 이것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성경은 우리의 이야기요 나의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는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야기 주셨습니다. 어찌 보면 아,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구나 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이야기예요? 참 이스라엘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짝퉁 이스라엘 말고 가짜 이스라엘 말고 거짓된 크리스천 말고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그 스토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야기를!

 

오늘날 교육계도 그렇지만 이야기처럼 감동적인 것이 없습니다. , 논리적으로 1, 2, 3, 4 하면 그때는 알지만 다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면 다 알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그 앞부분인 구약성경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창세기부터 어디까지입니까? , 강의할 때, 여러분들이 응답을 하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종말론적인 현상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아니하고.

 

~, ~,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이것을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눕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제가 히브리어 선생이기 때문에 잘 압니다. 구약성경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구약성경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일 먼저 첫 부분을 토라’(תורה)라고 부릅니다. 혹시 아시는 분? 여러분, 토라를 뭐라고 번역하는지 아세요? 토라, 토라. 토라라는 소리를 들어보기는 하셨지요? 덮어놓고 들으셨을 거예요. 토라는 보통 율법이라고 번역이 되지만 그 말 그대로 하면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다 같이, “가르침!” “가르침!”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오경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전문적으로 토라라고 합니다. 토라를 보통 무엇이라고 번역했다고요? 율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참, 저의 강의는 조금 약간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듣지만 않으시면 돼요. 여러분, ‘율법하게 되면 검사가 생각납니까?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생각납니까? 대부분 검사라고 답하시는 군요. , 그렇군요. 다시 묻습니다. ‘율법하면, 여러분, 추운 겨울이 생각납니까? 따스한 봄이 생각납니까? , 대부분 겨울이라고 답하시는 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런데 이제 머리에서 그런 대답을 싹 씻어내야 합니다. 왜 그러하냐 하면, 제가 증명을 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토라의 원래의 뜻은 율법이 아니라 가르침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까지 전체를 죽 읽어보시면, 그 가운데 법조항이 많습니까? 이야기가 많습니까? 성경을 안 읽어 보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그래도 읽어 보신 분은 뭐가 많지요? 이야기’(narrative)이지요. 창세기를 봐도 다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를 봐도 다 이야기입니다. 레위기는 뭐 제사법이 있어서 좀 그렇지만 수면제로 사용하시는 분들이 있는 곳 같고, 그 다음에는 민수기는 광야에서 방랑하는 이야기고, 신명기는 모세의 고별설교이고 이제 모세가 죽기 전에 고별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보면, 대부분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다섯 권의 책을 가리켜 전문적인 용어로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토라!” 다 같이 토라!” 토라의 뜻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가르침이라고 할 때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일 것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겠지요. , 가르침이 일어나는 장소가 어디인가? 보통 누구와 누구 사이에서 가르침이 일어나는가? 부모와 자식사이에서 가르침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앞쪽에 여성분 있는데 자녀에게 미적분 가르치나요? 못 가르치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요? 영어 가르쳐요? 못 가르치지요. 그렇다면 자식에게 무엇을 가르치지요? 영어나 수학이나 논술 같은 것은 학원에서 가르칠 수 있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의 길에 관한 것을 가르칩니다. 삶의 길!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보다 짓밟고 먼저 올라가라! 그런 것을 가르칩니까? 그것은 아니지요.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선인지 이것이 가야할 길인지 가지 말아야 할 길인지, 이것이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말아야 할 것인지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제대로 된 교육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또 가르침이 있는 곳은 또 어딘가요? 스승과 제자 사이이겠지요? 스승과 제자 사이도 똑같습니다. 요즘에는 학교들이 학원 선생노릇해서 지식만 많이 가르쳐서 정보(information)만 많이 가르치지만 그것은 진정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잘못되면 야단을 쳐서라도 그렇게 가면 안 돼! 하는 것이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지요. , 가르침이에요. 제가 썰렁한 joke를 할 테니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예수님이 제일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였습니까? 요한입니다. 영어로 John입니다. 그런데 John을 영국식 발음으로 하면 입니다. 존 말할 때 따라서 해봐요. 그런데 미국에 가면 이라고 발음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 소리를 내어 대답해보세요.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모든 소리는 영국식으로 하면 무슨 소리라고요? 존 소리! 그런데 아이들은 항상 미국식으로 받아들여서 뭐라고 하지요? 잔소리! 그렇습니다. 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언제 자녀들은 자기 부모가 하는 소리를 존 소리로 받아들입니까? 언제요? 철들면 그렇지요? 그런데 노인네들이 하는 말이 철들자 망령난다고 그러잖아요. 사실상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하는 모든 소리는 영국식으로 하면 존 소리예요. 아까 좋다는 말이 나왔잖아요. 이대로 가면 우리의 삶의 사이들이 다 좋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좋고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도 좋고 사람과 피조물 사이에도 좋고 모든 것이 좋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율법으로 생각해서 하라 하지 말라는 소리로만 들으니까 그것이 무엇이 돼요? 잔소리! 그래서 영국 사람이 미국 사람들을 쌍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소리는 다 좋은 소리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신 모든 소리는 좋은 소리입니다. 그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Ph. D 필요 없어요. Ph. D하면 머리만 희어져요. 골치 아파요. 필요 없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가 꼭 가야 할 길, 가지 말아야할 길을 이야기체로 써놓은 것이 토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창세기 11절을 볼 때마다 자, 다 같이 창세기 11절을 다 같이 외워보겠습니다.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오늘 정말 마음에 안 들게 하시는데 다시 한 번 크게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무슨 뜻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좋은 소리라고 했잖아요.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치고 하나님께 존재의 빚을 지지 않은 것이 있다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좋은 말씀을 하시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열어주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라를, 그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 제약회사 로고송으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송대관과 태진아가 함께 부르는 이가탄 선전 로고송 말입니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4 박자예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생각해 보세요. , 운율을 타세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이것이 성경을 묵상한다는 말의 본래 뜻입니다. 여러분 시편 1장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무엇 한다? 번역은 묵상으로 되어 있지만 단순히 묵상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저한테 배운 학생들도 있겠지만 성경에는 가만히 앉아서 묵상한다는 개념이 없어요. 원래의 뜻이 무엇인지 아세요? 성경에 보면 읊조리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방식 중에 하나입니다. 제가 제약회사의 영업부장은 아니지만 히브리어의 그 단어 즉 주야(晝夜)로 주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번역되는 하가’(הגה)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한국말로 무엇이 가장 좋을까 연구해 봤더니 그 뜻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다는 것입니다. 외식을 좋아하시면, 아웃백(Outback)을 가거나 T. G. I. Fridays에 가셔서 스테이크를 먹습니다. Midium으로 해드릴까요 Well Done을 좋아하십니까? , 골라잡으세요. 기가 막힌 스테이크를 앞에 놓았을 때, 포크를 잡고 칼질을 하고 포크로 집어서 입에 탁 넣는 순간 온 입속에 퍼지는 그 육즙의 맛을 아셔요? 침 삼켜보세요. 그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씹고 뜯고 그렇게 맛보고 즐기는 것이에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시편 1장은 진짜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어 번역에는 그냥 복 있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지만 제가 히브리어 학자니까 저 믿으시지요? “아쉬레 하이쉬”(אשרי־האיש)로 시작되는 이 말은 진짜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다른 곳에 즐거움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소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양식 삼아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일을 자기 일생의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 이런 사람이 누구라고요? 도대체 가르쳐도 여기는. 하하, “진짜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워지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만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단순히 정보(information)의 축적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information 축적 정도를 넘어야 합니다. 영어를 써서 죄송하지만 in-을 빼면 무엇이 되지요? formation! 그렇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머릿속에 집어넣는 정보, 내가 너보다 많이 알아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formation시킨다는 거예요.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고 형성시킬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야 말로 한 길로 똑바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여러분이 성경을 대하는 방식이기를 바랍니다. 우리 샘물교회도 그런 교회이지요? 그러기를 바란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한 개인이든지 가정이든지 한 국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서 좋은 말씀을 많이 했어요.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토라!’ 토라를 주셨어요. 그런데 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토라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데 언제 주셨습니까? 여러분이 다 사지선다형으로 찍고 살았기 때문에 사지선다형입니다. 하나님께서 토라를 언제 주었을까? 1, 애굽에 있을 때 주어졌다. 2, 출애굽 다음에 광야여정을 시작할 때 토라를 주었다. 3, 광야여정을 마쳤을 때 토라를 주셨다. 4,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주셨다. ~, 찍어보세요. 1, 2, 3, 4. 무슨 질문인지 몰라요?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주셨어요? 토라를 주셨어요. 하나님 말씀을 주셨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 율법을 주셨다는 거예요. , 이 토라(율법)를 주셨어요. 토라의 핵심인 십계명 같은 거지요. , 이것을 언제 주셨습니까? 골라잡으세요. 첫 번째, 애굽에 있을 때 주었다. 두 번째, 광야여정을 시작할 때 주었다. 세 번째, 광야여정을 마칠 때쯤 주었다. 네 번째,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 주었다. , 찍어 보세요. 몇 번이요? 3번이요. 잘못 찍으셨어요. , 1. 더 더욱이 잘못 찍으셨어요. 덮어놓고 찍으시는 것 같은데 몇 번이요? 2. 그렇지요. 언제 주셨어요? 광야여정을 시작할 때 주어졌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여정을 시작할 때 왜 토라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한가지예요. 광야가 어떤 공간인가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지요? 그런 장소 없잖아요. 그때에 하나님께서 토라를 주었다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끔 하기 위해서 광야여정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과 제가 진정으로 광야를 살고 있는 순례자로서 여러분과 제가 천성을 향해 길을 떠나는 순례자로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것은 광야를 가면서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백(back)도 아니요 학연(學緣)도 아니요 혈연(血緣)도 아니요 스펙(spec)을 쌓는 일도 아니라 연줄을 갖는 것이 아니라 머니머니 해도 머니도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기 위해서 광야여정의 시작 때에 주어진 것이에요. 또 하나만 더 말씀 드릴게요. 광야라는 곳은 지도에 길이 없는 곳입니다. 길이 없는 곳이에요. 한강다리에 가서 보면,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한강다리에 투신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혹은 지금 어디에선가 알약을 먹고 내일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 사람에게 마지막 가서 한번 여러분 인터뷰를 했다고 해봅시다. 왜 이런 비극적인 일을 저지르려고 하십니까? 한다면 다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뭐가 안 보여요? 길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광야는 뭐가 없다고요? 길이 없는 거예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이 없는 곳. 이제 광야의 여정을 시작할 때, 하나님이 토라를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지요? 길을 보여준다는 뜻이에요.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 이것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성경은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을 살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액세서리(accessory)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뺐다 꼈다 하는 것이 아니라 좀 어려운 말로 신앙의 성경이라는 것은 우리 신앙에서 본질적인 구조(structure)의 문제이지, 단순히 치장하고 장식하는(ornamental)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풀어 해석한다면 신앙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구조적인 문제이지 장식용이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편하게 여기서는 크리스천인 것처럼 하고 교회에서는 크리스천인 것처럼 하고 사업 터에서는 크리스천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크리스천인 것처럼 하고 학교에서는 아닌 것처럼 하는 두 집 살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중적인 두 집 살림 말이에요. 한 번 물어 봅시다. 일요일은 누구의 날이지요? 하나님의 날.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누구의 날이지요? 누구의 날이지요? 대답은 잘 하셔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잖아요. 십의 일은 누구의 것입니까? 십일조 안 하셔요? 십의 일은 누구의 것이지요? 십의 구는 누구의 것이에요? 대답은 잘 하셔요.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체제상 이층집 구조예요. 이원론적으로 살잖아요. ()과 속(). 여기는 거룩하고 침대는 세속적이다? 아니거든요. 여기는 거룩하고 내가 친구와 커피를 마시는 것은 세속적이다?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온 피조세계에 여러분의 가정이든지 내 가정이든지 교회이든지 직장이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잖아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사고가 균열되지 아니하고 생각이 균열되지 아니하고 집안에 자기 마음속에 칸막이 방들을 만들어 놓지 않고 일관되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일관성 있게 산다는 것이에요.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애굽에서 종 되었던 사람들이 늘 노예근성(奴隸根性)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불러내어서 너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너희는 자유로(自由路)로 가는 것이다. 자유로로 가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토라예요.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토라는 이정표와 같아요. 무엇과 같다고요? 다시금 이야기해 주세요. 이정표.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김상진이 부른 이정표 없는 거리를 좋아해요. 아세요? ‘이리 갈까?’ 같이 불러 봐요. ‘저리 갈까?’ 여기 경건해서 안 해요? ‘차라리 돌아갈까? 세 갈래길.’ 제가 그 노래 가만히 어디서 불렀을까 생각해보니 아마 대전에서 부른 것 같아요. 이리 가면 경상도. 저리가면 전라도 돌아가면 경기도. 여러분은 이것이 통속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에요. 정 그러시다면 세련된 것으로 하나 알려드리지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Prost) 아시지요? , 로버트 프로스트, 그 사람이 쓴 유명한 시가 뭐지요? , “걷지 않는 길.” ‘어느 날 내가 숲속을 걸어갔습니다. 갔더니 여기서는 세 갈래 길이 아니라 두 갈래 길이었습니다. 한 쪽은 사람들이 많이 다녔던 길이었고 한 쪽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았던 길이었습니다. 결국은 나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던 길을 선택했습니다. 바로 Then it makes all different. 그것이 결국 내 인생을 확 바꿔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까보다 품위 있어 보이지요? 한 십여 년 전에 우리 아이돌(idol) 젊은 아이들 가운데 G.O.D가 있었어요 G.O.D 아시지요? G.O.D이라고 부르면 안 돼요. H.O.T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처럼. G.O.D가 부른 노래 가운데 유명한 노래가 이었습니다. . 젊은 아이들이 인생을 살면서 내 앞에 길들이 있는데 어느 길을 갈까? 이 길을 갈까? 저 길을 갈까? 하는 모래입니다. 영상을 보면 참 멋집니다. 결국 여기에 주제가 무엇입니까? 길에 관한 거예요. .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는 것, 이것이 신앙이에요. 그런데 한 개인 뿐만 아니라 한 민족도 똑같았습니다. 광야를 가면서 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좀 더 쉬운 이야기로 한다면 이러다가 예언서 안 할 것 같은데. 그래도 해야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자마자 그 다음 홍해 바다를 지났어요. 홍해 바다를 지나는 것은 마치 세례를 받은 것과 같아요. 아니면 다른 말로 한다면 어머니의 양수가 터져서 무엇이 터졌다고요? 어머니의 양수가 터져서 새로운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그런 과정이에요.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바로 약속의 땅으로 집어넣지 않고 어디요? 광야로 집어넣었어요. 광야에서 걸음마를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초기 이야기는 다 광야에서 걸음마를 하는 거예요. , 저는 취미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의 걷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갈지()자 걸음을 걸어요. 어떤 사람은 팔()자 걸음을 걸어요. 어떤 사람은 안짱다리 걸음을 걸어요. 왜 그럴까? 아마 어려서부터 제대로 걷는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이곳에 에어 걸(air girl)들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플라이트 어텐던트(flight attendant)라고 부르는 비행기 그런 사람들. 거기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차밍스쿨(charming school)에 들어가는 것이라네요. 차밍스쿨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똑바로 걷는 거예요. 어떻게 걷지 않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걷는 거예요. 하기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요. 세계적인 골퍼(golfer)가 나와요. 그건 알지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골퍼도 좌로 가면 훅(hook)이요 우로 가면 슬라이스(slice)나지 아니하고 좌우간 뭐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똑바로 그런데 그 아가씨들이 걸어갈 때 똑바로 걸어갈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어떻게 걸어야 하지요? , 따라서 하세요. “똑바로 걷되 우아하게 걷자!” , 따라서 하세요. “똑바로 걷되 우아하게.”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 걸음마를 어디서 시켰어요? 광야에서 시켰다는 겁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딱 한 가지를 배운 거예요. 걸음마를 배운 거예요. 똑바로 걷는 거예요. 또 하나님께서 한 가지 더 가르친 것이 있어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스톱(Go-stop)을 가르치셨어요.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 가운데 성막 위에 구름 위에 붕 뜨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막을 다 걷고 가야 했어요. 가장 어색한 시간이라도 가장 불편한 시간이라도 새벽 한 시()에도 새벽 두 시에라도 하나님께서 가자고 하면 고(Go). 그러나 하나님께서 서라 하면 서고(stop). , 40년 동안 무엇을 배웠다고요? 고스톱을 배웠지요. 잘 쳤어요? 못 쳤어요? 그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국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자 할 때 가고, 서자 할 때 서고. 그렇지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서 천성(天成)을 향해서 떠나는 순례자처럼 똑바로 걷기를 원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자 걸음을 걸어요. 여기 남성들 가운데 갈지 자 걸음을 걸어본 경험이 있는 분은 오른발을 한 번 굴러 보세요. , 이 교회는 다 경건해서. 왜 갈지 자 걸음을 걷지요? , 한 잔() 해서요. 그러나 이 세상은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취하게끔 하는 수많은 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쪽에서 당기고 저쪽에서 당기는. 우리를 취하게 하는 수많은 혼미한 영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학벌, 인척관계, 섹스(sex)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어쨌건 수많은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똑바로 걷지 못하고 갈지 자 걸음을 걷게 하는 것이 많아요? 적어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똑바로 걷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 교본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지요? 성경이에요. 사실 여러분과 제가 볼 때 정말 멋있게 똑바로 걷는 사람들 보면 멋있지 않아요? 그 사람이 사업에 실패했는데 불구하고 똑바로 걷는 것을 보면 정말 존경스러워요. 우리 인생에 신앙한다는 것, 믿는다는 것은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의 단순히 성경이 우리의 information만 축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한다고요? formation시켜야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과 저를 formation시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똑바로 걸어가는 사람으로. , 이 일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교육비를 들였는지 알아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위해서 얼마나 엄청난 사교육비를 들였는지 몰라요. 얼마나 뺀들뺀들 했는지 그래서 오죽했으면 여러분이 아까 토라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고 했지요? 벌써 잊어버리지는 않았지요? 그렇지요? 그 다음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그 다음 꼭 성경을 펴봐야 알아요. 사사기. 그 다음 룻기는 빼고. 왜냐하면 히브리어 성경에는 룻기는 나중에 있어요. 사무엘서, 열왕기서, 몇 권이에요. 4권이에요. 4예요. 다시 무엇이라고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모두 몇 권? 4. 히브리어 성경이 그런 순서로 되어 있어요. , 그렇다면 가만히 보면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까지 보게 되면, 가만히 읽어보면, 처음에는 in이고, 맨 마지막에는 out입니다. 혹시 여기서 미국 캘리포니아 여행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뭐 줄 거예요. 혹시 손을 든 사람 가운데서 여기에서 In and Out 스테이크를 먹어본 사람? 여호수아부터 열왕기를 보면, 여호수아는 무엇이지요? In. 열왕기서는 Out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그렇게 힘들게 들어갔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이야기로 여호수아서가 시작해요.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하나님의 백성들의 역사의 맨 마지막을 보면, 다시 말해 열왕기하 맨 마지막 장 맨 마지막 절을 보게 된다면,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갔을 때 눈이 뽑히고, 27년인가? 거기서 감옥생활을 하다가 맨 마지막에 잠깐 석방되어서 거기서 살다가 죽더라 하는 말로 끝나요. 무엇으로 시작했다고요? In으로 시작해서 Out으로 끝난 거죠. 그렇게도 꿈에도 그렸던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일로 이방 땅, 낯선 땅에서 비참하게 이렇게 끝을 맺느냐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예요? 성경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그 역사 이야기예요. 그렇다면 또 사지선다형으로 합니다. ,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이 넷 중에, 네 시대 가운데서 마차를 끌고 다녔을 때가 여호수아라면 인터넷(Internet)이 가장 발달된 때는 언제일까요? , 제일 마지막이지요. 열왕기 때지요. 왕정 때 아니에요? 여호수아 때는 걸어 다녔지만 이쪽은 고속도로가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열왕기 때, 왕정시대가 가장 발전했어요. 역사적으로 볼 때 여러분도 역사는 진보하고 발전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지요. 제가 어렸을 때 비행기를 탄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 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자주 탑니까? 역사는 무엇 한다? 발전한다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라는 길고 긴 신앙의 역사 전체를 볼 때,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집중적으로 가장 많이 보냈을 때, 1, 2, 3, 4, 언제입니까? 한 번 찍어 보세요. , 잘 찍으셨어요. 언제요? 왕정시대입니다. , 그 이야기는 마치 야구의 메타포(metaphor)를 쓴다면, 야구의 은유를 쓴다면, 지금 대세(大勢)가 무너져서 7, 8, 9회 때에 무엇을 올리는 거예요? 감독이 구원투수를 올리는 것과 똑같아요. 다시 말해서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가장 발전하고 역사가 발전해서 최고의 명문 대학도 만들고 고속도로도 만들고 기간산업도 좋고 괜찮았던 그 때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 때가 가장 어두운 영적 암흑기요 다운 힐(Down Hill)이요 형편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누구를 보냈다고요? 선지자들을 보낸 거예요. 예언자들을 보낸 거예요.

 

, 그렇다면 드디어 본론 가운데 들어온 거예요. 여러분이 예언하게 되면, 예언! 여기 대부분 한글세대는 없는 것 같은데 우리가 보통 예언한다면, 저 용문산이나 삼각산이나 어디 뭐 저쪽에 용한 권사님 생각이 나지요? , 그런 생각이 나지요? , 저분은 예언의 능력이 있어 라고 말하는 권사님 말입니다. 그런데 예언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종류의 한자가 있습니다. 첫째는 일기예보(日氣豫報)에서처럼 예()자가 있어요. 무슨 자이지요? ‘미리()자예요. 그런데 둘째는 은행에 가서 저금할 때도 그 무슨 예()자이지요? 그것은 미리예자가 아니에요. 예금(預金)할 때 예()자는 무슨 예자예요? 그것이 무엇이에요? 그것은 맡길()자입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보통 교회에서 예언, 예언의 능력이 있다 하면 미리 예자를 생각해요. 일기예보 예자를 생각해요. 그러나 이제 미리 예자는 머릿속에서 다 빼버리세요. 무슨 예자라고요? 맡길 예자. 예언자(預言者)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긴 사람이다. 그 뜻이에요. 지금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몰락하고 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이것은 아니야 라고 해서 말씀을 맡겨서 보낸 사람들이 예언자입니다 선지자(先知者)예요. , 이제 이것을 보면, 선지자,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예언자는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있다 없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예언한다고 하면서 초()역사적로, 혹은 탈()역사적로, 혹은 어렵게 무()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100 퍼센트 이단(異端)입니다. 그것은 제가 100 퍼센트 개런티(guarantee)해요. 지금 이단들, 신천지(新天地)부터 온갖 사람들이 다 그런 거예요. 그들은 미리()자로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말하기를 나만, 내가 비밀 코드(code)를 가지고 있다. 비밀 암호가 있는데 이 암호를 나는 여기로 오게 되면 코드 브레이킹(code breaking), 디코딩(decoding) 한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무엇이라고요? 이단들입니다. 얼마나 많은지요. 제가 도덕적인 책임을 참 많이 가져요. 왜냐하면 제가 살고 있는 곳이 과천이거든요. 과천에 신천지 본부가 있잖아요. ! 내가 이것 하나를 못 막고 신학자 노릇을 해서 얼마나 회개하는지 몰라요! 대부분 많은 교인들 가운데서 이렇게 무뇌(無腦), 뇌가 없거나, 생각이 없거나,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것을 잘 배우지 못하면, 꼭 그런 데로 가요.

 

, 예언자 할 때 예자는 무슨 예자라고요? ‘맡길(). 그렇다면 맡겼다는 말은 누가 맡겼어요? 하나님이 맡겼어요. 조금 전에 아까 이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있지요? 이 열왕기서 가운데 왕정 때에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누구를 보냈어요? 예언자를 보냈다는 것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냈다는 말은 그 당시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보낸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쉬운 말로 메신저’(messenger)입니다. ‘전령’(傳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천상(天上) 왕이신 야훼 하나님의 의중(意中)을 받아서 역사 속에 들어와 지금 이것은 아니거든!”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아니거든!”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너희의 제자리로 돌아가라! 하나님과의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라!”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돌아가라! 다시 돌아가라!” 좀 쉬었다가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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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8 로마서 묵상(10): "사랑" 류호준 2010.01.22 8011
577 설교: “고통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 류호준 2012.06.24 8001
576 신앙교육(48): "생명의 양식: 해석" 류호준 2010.04.07 8000
575 신앙교육(27): "신앙의 장애물들" 류호준 2009.08.30 7987
574 신앙교육(31): "이생에서의 크리스천의 삶" 류호준 2009.09.19 7985
573 번역에세이: 영성이란? (성경적 관점에서) 류호준 2007.11.09 7982
572 로마서 묵상(4) : "유대인들, 당신들은 유죄야!" 류호준 2010.01.06 7973
571 (16) 열국의 계보 (창 10:1-32) 류호준 2007.11.09 7970
570 창세기 큐티(3): "이삭의 잘못과 하나님의 뒷정리" 류호준 2008.05.13 7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