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03 15:16
“이제는 ‘안녕~’이라고 말해야 할 시간”
Time to say Goodbye~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 (전 3:1)
아침에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 시에 살고 있는 큰 딸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빠가 슬퍼할 사건”이라면서. 보내온 내용을 보고는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깊은 상념에 빠졌습니다. 온갖 추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면서 웃음, 슬픔, 애잔함, 서운함, 즐거움, 뿌듯함, 성취감, 만족감, 아쉬움 등이 앞뒤를 다투어 물밀 듯이 몰려왔습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1981년 오월에 당시 내가 살던 미국 서부 산호세에서 4,000킬로를 운전해서 닷새 만에 미국 중서부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로 이사했습니다. 캘빈신학교에서 곧 시작할 공부를 위해서였습니다. 아직 아이가 없었던 나는 아내와 오붓하게 미 대륙을 횡단하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들리지 않는 외국어로 공부하는 일의 두려움과 고충은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생존의 문제였기에 목숨을 걸고 애를 썼습니다. 주말이 되면 약간이라도 여유를 갖고 미시간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 위해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1갈론(= 3.75리터)당 1달러 정도였으니(리터당 300원정도) 얼마나 쌌는지 짐작이 될 것입니다.
유학생들이 그랜드래피즈 시에서 공부하는 특권 중에 하나는 저렴한 가격으로 신학서적을 구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한 신학전문 출판사가 세 곳이 있었습니다. 모두 네덜란드계 이민자들이 설립한 출판사들입니다. 어드만(Eerdmans) 출판사, 베이커(Baker) 출판사, 존더반(Zondervan) 출판사입니다. 특별히 어드만 출판사는 다운타운에 직영 서점을 운영했는데 상호명이 “그 책 방”(The Bookstore)이었습니다. 당시 이 서점에 매니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친근하게 “알(Al)”이라 불렀던 앨런(Allen) 씨가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20대 후반이었고 앨런 씨는 아마 4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신실한 개혁파 교인이었던 그는 평생 그 서점의 매니저로 일했고 출간되는 신학 책들에 대한 해박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신학적 지식이 충만했는지 책방에 들리는 신학교수들도 그에게 신학의 흐름에 대해 묻거나 해당되는 책을 소개 받곤 했습니다. 그가 상대했던 신학생들 중 나중에 신학교수가 되어 찾아와 담소를 나누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나도 그중에 한명이 되었습니다. 지난 2010년경 어느 여름철 다시 책방을 들렸는데 지난해까지도 보였던 앨런 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젊은 매니저에게 앨랜에 대해 물었더니 은퇴하였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지난 40여년을 한결같이 그 책방의 매니저로 성실하게 살아왔던 앨런을 떠올리며 잠시 명예로움의 뜻을 되새겨보았습니다. 그가 없는 책방이 그렇게 허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내가 그 책방을 자주 찾았던 특별한 이유는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 가격으로 책을 팔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출판과정에서 약간의 흠이라도 생긴 책들은 모조리 내다가 서점 한쪽 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구약부터 신약, 조직신학과 역사신학, 선교신학, 윤리 철학에 이르기까지 신학 전 분야의 책들이었습니다. 가격은 70% 할인! 이 보다 더 좋은 복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책을 열어보면 맨 앞 장 빈 공간에 The Bookstore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현재 내가 소장하고 있는 어드만 출판사의 책들은 거의가 이렇게 해서 구입한 것입니다. 유학시절 없는 살림에 그 책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분을 누가 알랴!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쁨과 뿌듯함, 배부름과 환희 자체였습니다. 지금도 손때 묻은 그 책들을 보면 비록 색이 바랬고 초라해 보이지만 따스한 추억을 길어 올리는 정겨운 두레박처럼 보입니다. 이제 나도 은퇴를 앞두고 가끔 내 서재에 서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 색 바랜 책들을 다독거리듯이 쓰다듬어 봅니다. 특별히 “그 책방”에서 득탬한 그 책들을 말입니다.
그랜드래피즈에서 신혼시절을 꾸려가던 그 옛 시절, 새로 태어난 딸아이가 자그마한 아파트의 햇살비취는 그 거실을 기어 다니던 시절, 어린 딸은 거실에 마련된 책꽂이 맨 아래 단에 꽂힌 책 표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책 겉표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내는 쾌감에 도취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는 여러 권의 책 겉표지들이 너덜거리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빠의 도착에도 상관없이 재미에 들린 듯 아직도 책 겉표지를 갈기갈기 찢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아직도 흑백 필름이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The Bookstore의 책들!
이제는 세 아들의 엄마가 된 그 딸이 오늘 아침 소식을 보내온 것입니다. “아빠! 그 책방이 문을 닫게 되었어요! 슬퍼요.”라는 말과 함께.
11월 2일자 어드만 출판사의 공지에 따르면 12월까지만 서점을 열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거의 백년 간 유지한 서점은 출판 판매 환경의 전향적인 변화로 부득불 문을 닫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11월 13일부터 12월까지 할인가격으로 재고처리를 한 후에 긴 항해를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멀지 않아 인터넷에(Eerdword.com) 지난 세월동안의 책방의 역사를 추억하는 글을 올리겠다고 하는군요.
아듀~~~ 그 책방이여! I will miss you a lot!
(1) 현재 어드만 직영서점의 모습
(2) 1981년에 구입했던 이사야 주석이 보입니다. THE BOOKSTORE와 $ 6.40이 희미하게 보일 것입니다. 아래 책들 역시 그 책방에서 구입했던 추억의 소장품들.
샬롬^^
추억을 공유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스토리를 나눌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건을 함께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교수님은 행복한 분이시네요^^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