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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동료 교수인 송병현 박사가 저술한 "창세기 주석"에 대한 서평이다. 큰 일을 해낸 저자의 업적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선배로서 동료로서 애정을 담아 몇자 서평을 적었다. - 류호준] 

 

 

 

송병현,〚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0), 832쪽. 가격 30,000원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송병현 교수가 학문적 첫 아이를 출산했다. 옛말에 나이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던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이야기다. 여기 서평을 하고자 하는 책의 저자가 나이 50에 즈음하여 첫 작품으로 창세기 주석을 펴냈다. 이제 저술의 ‘시작’ (genesis)을 열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창세기 주석은 앞으로 계속해서 나올 저자의 구약 해설주석 시리즈에 대한 시식회(施食會)와 비슷하다. 본서의 출간은 그가 계획하고 있는 방대하고도 야심찬 해설주석 프로젝트의 기본 골격을 보여주고, 저자의 억양과 음색을 들려주고 있는 저술이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으로서 창세기 주석은 저자나 독자들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물론 이미 적지 않은 창세기 주석서나 해설서들이 시중에 나와 있는데 또 다른 주석서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이유 있는 회의적 시각에 대해 나름대로 강변(强辯)의 목소리를 낸다. 저자는 ‘엑스포지멘터리’(Exposimentary)라는 합성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 이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이 신조어는 ‘해설’, ‘설명’을 뜻하는 Expository와 ‘주석’, ‘석의’를 의미하는 Commentary의 합성어다. 저자는 기존의 ‘강해’와 ‘주석’을 하나로 묶었다고 말한다. 성경해설에 있어서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에서 시작한 ‘해설주석’이다. 저자에 소박한 판단에 따르면 시중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본문의 뜻과 저자의 의도와는 별 연관성이 없는 주제와 묵상으로 치우치기 쉬운 강해”이거나 아니면 “필요 이상으로 논쟁적이고 기술적일 수 있는 주석”이라고 한다. 사실 여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이런 판단 아래, 저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하나로 묶는 통합적 모델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해설주석으로서 엑스포지멘터리가 지향하는 목표라는 것이다. 저자의 저술목적과 목표를 직접 들어보자. “[위에서 언급한 양쪽의] 한계를 의식해서 이러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가르치는 사역에 조금이나마 실용적이고 도움이 되는 교재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개념이다. 나는 본문의 다양한 요소와 이슈들에 대해 정확하게 석의(釋義)하면서도 전후 문맥과 책 전체의 문형(文形,litertary shape)을 최대한 고려하여 텍스트의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의 삶과 연결하려고 노력했다.”(7쪽) 이런 저술 목표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본서를 꼼꼼히 살펴본 후에나 내릴 수 있는 평가일 것이다. 본 서평은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1) 본서의 구성을 개관해보고 간간히 논평을 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2) 그 후에 저자가 세웠던 저술 목표의 전망대 위에서 본서에 대한 전체적 평가를 하려한다.(3) 서평자의 입장에서 본서의 장점과 아쉬운 점을 말함으로써 서평을 마치려한다.

 

 

I

 

책의 전체적인 구조는 총론적 이슈들을 다루는 42쪽 분량의 서론 부분과 창세기 본문을 일곱 개의 큰 단락으로 나눠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는 770쪽 분량의 몸체 부분(61-832쪽)으로 되어 있다. 먼저 저자는 간략한 참고문헌을 소개하면서 창세기에 관한 총론적 이슈들을 강의 형태로 서술한다(18-60쪽). 먼저 창세기와 오경의 다른 네 권과의 관계, 창세기와 신약의 관계 등을 다룬다. 창세기의 저자에 관해서는 전통적 학설인 문서설(J.E.D.P)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 문서설의 약점을 나름대로 잘 지적하면서 저자는 이런 결론을 맺는다. “창세기는 모세가 자료들을 통해 전수받은 매우 오래된 이야기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이미 존재하던 여러 출처들을 인용하여 창세기를 비롯한 오경을 저작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31쪽) 그러나 여기서 끝을 맺지는 않는다. 저자는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의 후대 편집설을 말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오경의 기본적인 것들을 모세가 모두 문서로 남겼고, 먼 훗날 누군가가 과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옛날 이름 등을 최근 이름으로 대처하고 보충 설명이 필요했다고 느껴지는 곳에 자신의 설명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32쪽) 그리고 이런 최종적 작업을 한 사람으로 율법학자 에스라를 지목한다. 오경의 최종적 편집자로서 에스라의 자격요건에 대해 부연설명을 한 후에, 복음주의자로서 저자는 성경 영감설에 대한 부담감을 다소 줄이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에스라가 최종적으로 오경을 편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전 편집자(들)에 의해 본문에 도입되었을 수도 있는 모든 오류도 함께 제거하셨을 것이므로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교리도 침해받지 않는다.”(33쪽)

 

모세의 창세기의 저술 시기에 대해서 저자는 이 문제가 출애굽연대기와 맞물려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른 출애굽연대기’(주전 1450년)를 선호한다. 전통적 주석서에서처럼 본서도 서론 부분에 “창세기의 신학과 메시지” 항목을 담고 있는데(37-44쪽), 매우 전통적인 내용을 담는다. 창세기의 핵심적 메시지로 저자는 첫째, 지속되는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 사역. 둘째, 하나님의 주권. 셋째, 하나님의 부르심. 넷째, 언약의 주권적 이해라고 설명한다. 계속해서 저자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유념해야할 몇 가지 항목들을 덧붙인다(44-48쪽). 창세기에서 숫자의 사용이 종종 상징적이라는 설명(44-45쪽)과 창세기의 연대기 역시 신비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가르친다(45-47쪽).또한 창세기에 독특하게 사용되고 있는 전문용어 ‘족보’(톨레돗)에 유념할 것을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서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창세기의 거시구조를 살핀다(48-59쪽).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보여주고 본인 나름대로 생각하는 창세기의 구조를 제시한다. 아쉽게도 저자는 어떤 문서적 이유나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저 “책의 성향과 특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56쪽) 일곱 개의 대 단락들로 창세기를 나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저자는 전통적인 톨레돗 구분을 사용하여 일곱 개의 대 단락으로 나눈다. 1. 아담에서 데라까지(1:1-11:26); 2. 아브라함 이야기(11:27-25:11); 3. 이스마엘 후손과 죽음(25:12-18); 4. 이삭의 가정: 야곱과 에서(25:19-35:29); 5. 에서의 집안(36:1-8); 6. 에서와 에돔(36:9-43); 7. 야곱의 가정: 요셉과 형제들(37:1-50:26)이다.

 

 

II

 

책에 대한 대략적 개관을 마쳤으므로 이제는 좀 더 자세히 책을 살펴볼 시간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본서를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형식적인 면이요 다른 하나는 내용적인 면이다. 먼저 형식적 측면이다. 저자는 톨레돗 구분법을 사용하여 창세기 본문을 일곱 개의 대 단락으로 나눈 후에 다시 대 단락들을 각각 여러 개의 소 단락들로 나눈다. 소 단락으로 나누는 본문언어학적 기준이 언제나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가급적 단락구분을 짓는 이유들을 소개하고 각 소 단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요약해서 제시한다. 그리고는 소 단락 본문에 들어있는 중요한 단어나 구에 대한 해설과 본문의 배경적 정보들을 연속 강의하듯이 구어체로 서술한다. 이런 과정에서 저자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아무런 부담 없이 연속적으로 자유스럽게 인용하기도 한다. 저자가 택한 서술 형식과 스타일은 꼼꼼한 글쓰기를 통해 본문의 중후한 신학적 사상을 도출해서 전달하기 보다는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온갖 정보들을 그때그때마다 자유분방하게 제공하고 있다. 마치 만물상이나 백화점에 들어와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부분 설명에서는 논평이 길어지다가도 다른 부분에서는 짧은 설명만 제공된다. 이런 불균형은 본서가 강의록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다는 태생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 같다. 또한 정보전달 부분과 신앙적 적용 코멘트가 한데 어울려 가다 보니 문장들과 단락들 사이에 문학적 불균형을 느끼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런 스타일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해설주석이라는 장르를 선택하면서 창세기를 배우려는 신학생들을 앞에 두고 강의하듯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연구실 책상에 앉아 해설주석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서를 읽는 독자가 저자의 강의를 들은 경우에는 아주 효과적인 학습전달 방법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해설은 산만하고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서를 고찰해본다. 저자는 본문을 해설하면서 관련된 필요한 정보를 성의껏 제공할 뿐 아니라 정보를 통해 드러나는 본문의 의도를 설득력 있게 해설해 준다. 아마 영어권에서 나온 여러 창세기 주석서나 연구서를 읽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는 학생들이나 목회자들에게 본서는 매우 유용한 중개소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한국의 바쁜 목회자들과 언어적 장벽이 있는 신학생들에게 큰 봉사를 한다. 더욱이 최소한의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도 이해하기 쉬운 어투를 사용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해설한다. 예를 들어, 창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에 관해 저자는 네 가지 통상적인 학설들을 소개해주고 그 중에 설득력 있는 의견을 독자들에게 권고한다(169쪽). 바벨탑에 관한 설명에서도 고고학적 발견에 따라 고대 근동의 계단식 신전 형태인 지구라트(ziggurat)라고 친절하게 안내해주면서도 고대근동의 고고학적 혹은 정치적 배경보다는 신학적으로 이해해야한다고 말한다(229쪽). 전통적으로 ‘요셉 이야기’(Joseph Cycle)로 알려진 37-50장 가운데서 이질적 삽입처럼 보이는 창 38장(유다와 다말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사르나와 해밀턴의 안내를 따라 “고도의 문학적 기술과 계획에 의해서”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물론 설명이 충족했는지는 독자의 몫이지만 말이다.

 

 

III

 

한국 교회에 새로운 주석 장르를 만들어내고 성경을 실제적으로 사랑하고 연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큰 봉사를 하고 있는 저자의 노력과 성취에 대해 이 책을 구입해서 사용하게 될 독자들은 큰 빚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출간될 해설주석 시리즈가 더욱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득이 본서에 간혹 들어 있는 옥에 티와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본서는 성경 신학적 차원이든 정보적 차원이든 몇몇 중요한 구절들에 대한 해설에서 약간의 미흡함을 느끼게 한다. 열 개(완전수!)의 예들을 드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1) 창조시 안식일에 관한 해설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안식일은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한 노동의 대가이며 사람이 일주일 동안 일하는 목표이자 클라이맥스가 되어야한다. 일하기 위해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창조의 섭리다.”(95쪽)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신학적으로 말해서 안식은 신적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 인간의 노동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적어도 창조의 마지막 날에 지음 받은 첫 사람은 그 다음 날의 안식을 선물로 받았지 노력의 대가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정신은 신약의 주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주시는 안식과 은혜를 받고 그것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서 일상생활이 시작한다는 것이 더더욱 창조의 섭리가 아닐까?

 

(2) 창세기에 사용되는 숫자 사용에 대해 설명하면서(44-45쪽), 저자는 마태복음서 1장의 족보를 언급한다. 족보는 3기간에 걸쳐 각각 14대로 구분되어 있는데 저자는 이것을 “야곱의 처가살이 14년, 요셉이 이집트로 끌려간 지 14년 만에 총리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의 계보를 14-14-14대로 정리한 것은 죄의 노예가 되어 고통 받고 있는 인류에게 그들을 묶고 있는 모든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하게 하실 구세주가 오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45쪽)라고 기상천외한 추측을 한다. 그러나 마태의 14대 구조는 유대인들의 문학적 관습인 게마트리아(gematria)에서 왔다고 보는 것이 신약학계의 정설이다. 즉 마태는 새 다윗(דוד) 왕으로 오시는 예수의 나라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표현하는 문학적 관습이 게마트리아다. 14는 ‘다윗’ 이름의 수치(4+6+4)에서 왔다.

 

(3) 저자의 매우 창의적이고 놀라운 상상력을 볼 수 있는 예는 창세기의 숫자에 관한 문제에서 계속된다(240-241쪽). 데라의 족보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데라 족보에 8명이 등장하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다. 그에 따르면 8명이 등장하는 데라의 족보는 10명이 등장하는 창세기의 최초 족보(5장)와 비교해 볼 때 2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런 결핍은 아브라함 이야기에 등장하게 될 두 사람을 주목하라는 힌트라고 저자는 해설한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매우 기발한 해설임에 틀림없다.

 

(4)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에 대한 해설은 독자에게 일말 허전함을 느끼게 한다. 구약에서 믿음의 개념과 칭의의 개념이 각각 무엇이고, 서로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좀 더 깊은 논의를 했더라면, 그리고 믿음과 율법과 칭의에 관한 바울의 논의에서(참조, 로마서 4장) 본 단락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단락이 차지하고 있는 성경신학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실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5) 신학적으로 중요한 특정 단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예를 들어, 최근 바울신학 학계의 ‘새 관점’ 논쟁과 관련하여 뜨겁게 논의 되고 있는 ‘칭의’ ‘의롭게 되다’는 개념을 알려면 자연히 구약성경의 ‘의’(체덱)에 이해를 거쳐야 한다. 그 중 하나가 시아버지인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네가 나보다 더 의롭다”(38:26)라고 한 말이다. 이에 대한 성경신학적 해설이 있었더라면 저자는 신약학계에 작은 일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6) 본서에는 상당한 량의 구조 도표들이 등장한다.(예, 64, 142, 143, 175, 178-179, 241, 308, 312-313, 404, 448-449, 466, 532, 732쪽). 단락의 구조를 제시하는 경우는 구조를 통해서 화자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절정(주로 동심원적 구조)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주석가는 그런 구조에 맞추어 주석 작업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에 대한 구조제시와 본문 해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본서에는 일관되게 구조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하는 일은 없다. 그 대신에, 저자는 필요할 때마다 다른 학자들이 제시한 구조를 제시한다. 그러나 제시할 경우에라도 구조를 따라 설명하는 일에는 관심이 덜한 듯 보인다. 이런 현상은 본서가 집필자가 주석집필에 대한 일관된 방식과 절차를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대신 이런 현상은 본서가 나열식 강의록이라는 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7)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저자의 해설 방식은 본문의 단락과 절을 따라서 그것에 대해 말해야하는 온갖 정보들을 나열식으로 해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의안을 책으로 낸 필연적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또한 저자는 본문 해설에 있어서 몇몇 대표적인 창세기 주석가들 - 대표적으로 매튜스(Mathews), 해밀톤(Hamilton), 사르나(Sarna), 월키(Waltke) - 의 의견들을 진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방식은 다음 주석서를 편찬해 낼 때 시정될 수만 있다면 본 시리즈의 가독성(可讀性)을 높여줄 뿐 아니라 신학적 이해를 깊게 해 줄 것으로 사료된다. 창세기를 읽어가는 저자의 견고하고 일관성 있는 신학적 해석이 책 전체에 관통하고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8) 저자는 여러 곳에서(288,292쪽) Klein을 인용하지만 선별된 참고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누구인지, 그의 어떤 책인지(아마 Meredith G. Klein = 메리데스 클라인,『하나님 나라의 서막』김구원 역 [서울: P&R, 2000]인 듯) 불분명하다.176쪽의 Fretheim(아마 T. E. Fretheim, The Suffering of God: An Old Testament Perspective)이나 304쪽의 Clements에 대한 언급도 마찬가지다(아마 R. E. Clements, Prophecy and Covenant). 교정자의 실수에 의한 오타도 간혹 보인다. “에의 톨레돗”은 “에서의 톨레돗으로”(53쪽), ‘우루’는 ‘우르’로(240쪽 하단).

 

(9) 서평자로서, 저자가 본문에 대한 철저한 본문언어학적, 문예·신학적 석의를 하고 그 다음에 본문에 대한 신학적 단상(斷想, reflection)이 뒤 따랐더라면 훨씬 효과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전권으로 나온 New Interpreter's Bible의 형식을 따랐더라면 독자의 편에서 유익하지 않았을까 한다.

 

(10) 마지막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본서를 읽고 나면 832쪽이 다 필요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대폭적으로 줄였더라면 해설이 좀 더 간결하고 함축적이고 해설자의 핵심을 더 잘 드러내지 않았을까 한다. 좀 더 절제된 해설이었더라면 해설 전달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상에 언급한 열 가지(완전수?) 작은 티들은 결코 본서가 이루고 있는 엄청난 공헌을 경감시키지는 않는다. 본서는 창세기를 공부하고 설교하려는 신학생들과 일반 목회자들에게는 더없는 복덩어리다.1.5세로 이민을 떠났다가 다시 귀국하여 한글을 새롭게 터득하면서 이처럼 방대한 프로젝트에 뛰어든 저자의 열정은 경탄할만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국 교회의 강단을 풍요롭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본 글의 축약본은『목회와 신학』2010년 5월호(pp.166-171)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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