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일상 에세이: "오바마 이야기"

2009.03.30 22:54

류호준 조회 수:8319

 “오바마 이야기”

류호준 목사


전라남도의 외딴 섬에서 태어난 영숙은 넉넉지 못한 환경에도 늘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바다와 갈매기와 갯벌과 들꽃을 바라보면서 자랐습니다. 외딴 섬의 유일한 큰 건물인 언덕 위의 자그마한 교회당은 언제나 그녀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 있어야할 이유를 가르쳐 주는 곳이었습니다. 덩그렁대며 온 섬으로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영숙은 섬 마을 초등학교 분교에서 인자하신 한 여선생님의 보살핌으로 섬에서 가까운 육지에서 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후 영숙은 서울 근교의 한 기독교 대학까지 진학하였습니다. 방학에는 식당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해서 학비를 조달했고 신앙심과 배려심이 많은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으로 산업 연수생으로 온 파키스탄 출신의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불같은 사랑이었습니다. 주위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를 이해하는 몇몇 친구들의 축하 속에 조촐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결혼한 지 2년 정도가 되었을 때,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숙은 기뻤지만 동시에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았던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런 소식도 남기지 않은 채 어디론가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영숙은 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혼혈아의 독신 엄마(Single Mom)가 된 것입니다. 그런 낙인(stigma)을 지니고 한국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영숙은 수없이 좌절하고 고통하고 울었습니다. 물론 그녀 주위에는 그나마도 그녀를 따스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무관심과 비난과 비정함의 고통을 최고조로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영숙은 불쌍한 아들 하나를 위해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참아내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영숙과 그녀의 아들은 비보를 전해 듣게 됩니다. 소식이 없었던 아들의 아빠가 자기의 고향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다녔던 교회가 떠올라 집 가까운 동네 교회에 가 보았습니다. 반갑게 맞아주기는 하였지만 무언가 넘지 못할 벽이 있음을 느끼고 돌아와 밤새 울었습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들도 잘 자라주었습니다. 삶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도록 가르쳤습니다. 사람됨의 가치에 대해, 정직과 근면의 고귀함에 대해, 우정과 배려와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고상한 것인지에 대해,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과 아량에 대해, 그리고 푸른 하늘과 넓은 대양과 새와 꽃들과 구름과 비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편견과 오해와 불의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것도 알려주었습니다. 아이가 십대로 접어들 즈음에 영숙은 새 남편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모로 생각하고 조심스레 결정한 결혼이었고, 그녀 자신 역시 이 결혼이 이생에서의 마지막 결혼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이혼이라는 절대로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삶의 부정성에 대해 깊이 고뇌하였습니다. 신앙이 그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옆에 두고 본 아들도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 사회에서 혼자 겪어야만 했던 그 수많은 고독과 좌절과 비참의 밤들은 그를 좀 더 성숙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혼혈이라는 피부색 때문에, 아버지가 파키스탄 출신이라는 태생적 핸디캡 때문에, 아니 그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 사회의 풍조와 시선 때문에 그는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는 수없는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기성 교회도, 유명한 설교자도, 명성 있는 교수도, 그 누구도 그의 부활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그에게 큰 걸림돌이 되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들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습니다. 손가락질과 무정한 언어와 비정한 눈들에 익숙하여 살아온 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는 배달민족, 단일민족을 운운하는 이 땅에서 언제나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트랙의 출발선에서 그 만큼 많은 핸디캡을 안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기득권층이었으며 그런 보이지 않는 범죄에 가담한 공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동반자나 친구로, 혹은 “우리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최상의 경우라도 그는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었고, 최악의 경우는 사회적 이물질이란 명칭이 그에게 붙여진 명찰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 가지 점에서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분별력과 판단력, 정의를 추구하는 집념, 그리고 ‘담대한 희망’을 소유한 젊은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연고(緣故)를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 이 젊은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피부색이 우리와 다르고, 아무 것도 내 놓을 만한 것이 없는 비천한 가정 출신이고, 그의 억양과 말투와 걸음새가 우리와 매우 다른 그를 우리 사회가 넉넉하게 맞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는 우리 중의 하나가 아니지 않습니까? 두 번의 결혼 실패의 멍에를 낙인처럼 몸에 지니고 살아가야하는 영숙과 불행한 가정의 비천한 출신이라는 스티그마를 평생 문신처럼 가슴에 새기고 다녀야하는 그녀의 아들은 이 사회에서 동정과 구호(救護)의 대상은 되어도 우리와 동등한 시민과 인격으로서 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너무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어야하는 것들이지만, 그래서 병든 사회의 특징이어야만 하는 것들이지만,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천혜의 선물로 알려진 ‘학연’과 ‘지연’과 ‘혈연’이라는 삼거지악(三去之惡)은 지금도 버젓이 위세를 떨칩니다. 정계나 학계나 교계나 형편은 똑같습니다. 소위 ‘인맥’(人脈)이라 부르는 것에 철저히 함몰된 이 사회에서 이 젊은이는 어떤 존재로 비춰질까? 불행하게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일까? 이 사회는 그의 담대한 희망이 만개할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가? 아쉽게도 현재로서 대답은 ‘아니요!’일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은 그들의 44대 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1961~)를 선택했습니다. 그 검은 피부 색깔의 젊은 지도자를 그들의 대통령으로 선택한 미국사회가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 Thoughts on Reclaiming the American Dream, 2006)의 저자인 오바마의 꿈이 현실화 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습니다. 전체 인구에서 겨우 13% 정도 밖에 안 되는 마이너리티(흑인) 가운데서 흑인 대통령을 뽑은 그 나라가 오늘따라 부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숙 씨와 그녀의 아들의 인생 편력을 너무도 닮은 버락 오바마와 그의 어머니의 삶의 이야기는 왜 한 사회가 위대할 수도 있고 초라할 수도 있는지를 시험해보는 리트머스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영숙 씨의 아들이 대통령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은 스님 머리에 핀을 꽂는 것과 같아야만 할까요? 왜 우리는 이다지도 타인에 대한 배타성과 끼리에 대한 응집력을 동시에 그렇게도 강하게 갖고 있는 것일까요? ‘배달민족’이라는 문구가 배가 다르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민족이라는 자조 섞인 문구로 해석해도 되는가요? 아직도 피부색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그가 타고 다니는 차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는 아닌지요.

  

세속 사회는 차치(且置)하고서라도 기독교계와 우리들의 교회를 둘러보십시오. 천국의 전진 기지(前進基地, outpost) 역할을 해야 할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이 오히려 이 세속시대의 주류(主流)에 편승하거나 합류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고 애를 쓰고 있는지요. 천상의 왕을 바라보아야할 그들이 지상의 왕을 바라본다면 이미 정체성을 상실한 것은 아닌지요. 세속적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 연고주의와 같은 모든 인간적 수단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교단장이 되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고 지금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동전 몇 푼 던지는 가소로운 동정심을 발휘합니다. 인생은 사닥다리라고 생각하며 무슨 방도를 다 동원해서라고 그 꼭대기에 서보겠다는 유치한 생각이 더 이상 부끄러움을 가져오지 않는 세태입니다. 편협한 지역주의(provincialism)는 단지 망국의 병인 지방색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 지역주의 역시 바알주의입니다. 이런 신학적 토호세력들 사이에서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는 무고한 백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교계신문의 각종 단체 모임 광고를 들여다보십시오. 세속적 패거리 문화의 답습이 아닌지 반성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조직의 응집력을 돈독히 하여 하늘까지 올라가는 바벨탑을 세우려는 인간의 허망한 노력들이 아니기를 바랄뿐 입니다. 오래전 유다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런 현상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의 가슴 저려오는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가운데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도 이런 날이 도래하기를 꿈꿉니다. 영숙 씨의 아들이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당당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갈 날이 오기를 꿈꿉니다. 그리고 그런 정의와 평화가 포옹하는 날들을 앞당기는 변혁의 에이전트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꿈꾸어 봅니다. 슬픔의 밤이 변하여 기쁨의 아침이 오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신학으로 세상 읽기" 기고문, 2009년 3월 30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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