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믿음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내가 4살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한글을 배울 때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던 일산가옥(일본사람들이 지은 가옥)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 여름이면 생철 지붕으로 떨어지는 소낙비 소리가 모차르트 피아노곡 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리곤 했습니다. 때론 추척추적 내리는 비엔 어린 나였지만 낭만적인 우울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일 나가셨다가 저녁이 되어 돌아오신 아버지는 나를 앉은뱅이 책상에 앉혀놓고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내 뒤로 덮썩 앉으신채로 어린 아들의 조막만한 손을 감아 뒤쪽에서 움켜잡고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글자를 공책 속에 그려진 네모난 칸 속에 한치에 오차도 없이 집어넣은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 때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린 아들은 네모 칸 안에 글자를 써넣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기윽(ㄱ) 니은(ㄴ) 디귿(ㄷ) 리을(ㄹ)을 써내려갑니다. 얼마 후엔 글자를 씁니다. 늘 그랬듯이 삐뚤빼뚤하게 글자를 쓰다보면 네모난 칸 바깥으로 삐져 나가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아들의 조막만한 손을 감싸 쥐고 글자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합니다. 그뿐 아니라 바르고 예쁜 정자체 글씨를 쓰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글자뿐 아니라 문장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글은 누가 쓴 것일까요? 아들인 나일까요? 아니면 우리 아버지일까요?

 

*****

 

믿음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은 누구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믿음의 주체는 누구인가요? 누가 믿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고백을 할 때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분명 믿음의 주어는 “나” 자신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믿음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 믿음을 완성시키는 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는 문구가 이 방향을 가리킵니다. 영어성경(NIV)은 이 문구를 흥미롭게 번역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저자이시며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예수를 바라보라.”

 

우리의 믿음들은 모두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믿음 이야기의 첫 장을 여시고 그 이야기가 활짝 전개되도록 하시고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잡고 있는 연필을 놓지 않게 붙잡으시고 그 이야기의 마지막 장의 마지막 문장을 끝내시면서 최종 마침표까지 찍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달리 말해 우리의 삶의 어떤 이야기들도 우연히 전개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글 속에 들어가는 어떤 문장 부호들 - 느낌표, 쉼표, 따옴표, 묶음표, 물음표, 이음표, 마침표 등 –도 의미 없이 아무렇게 사용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뒤돌아서서 이야기 전체를 읽어보니 그 모든 부호들(상징들, 사건들)이 그분의 자애로운 손 안에서 기막히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슬픈 이야기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무료한 일상들, 암 투병, 사업실패, 깨어진 인간관계들, 실직, 파혼, 출산, 승진, 상실, 죽음 등, 비록 삐뚤빼뚤하게 쓰인 글자들 같지만 그것들은 아버지의 포근하고 따스한 손안에서 전개된 이야기를 구성하는 다양한 소재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의 조합으로 예측하지 못한 삶의 직조물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갖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최상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조막만한 손을 감싸시며 써내려간 것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분께 고마워할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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