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일”

행전 10:17-48

 

들어가는 말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사고방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에 미숙합니다. 멈칫 망설이거나 주저합니다.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혹은 편하게 속해 있던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게 경계선 넘기의 어려움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경계선 안쪽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안전하고 친숙하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구자나 개척자들은 정해진 경계선을 넘어 기꺼이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습니다.

 

사도행전은 경계선을 넘는 일에 관한 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땅으로, 다시 유대 땅에서 사마리아 지역으로, 사마리아 지역에서 세상 끝까지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는 강력한 운동을 그려줍니다. 지역, 인종, 성별, 신분 등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성령의 활동이 돋보이는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폐쇄된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듣게 될 베드로의 이야기는 편협한 신학적 경계선을 뛰어넘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중해 해안 도시인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이방인 로마군 장교 고넬료가 욥바에 머무르고 있던 유대인 사도 베드로를 모셔오라는 천사의 지시를 환상 중에 받게 됩니다. 한편 같은 시간에 욥바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는 기이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동서남북 천지 사방에 끝자락이 있는 엄청나게 큰 네모난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네 발 가진 포유류 동물들과 기어 다니는 파충류들과 공중에 나는 온갖 새들이 있었습니다. 허기진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오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것입니다. 황당하고 기이하고 놀랍기도 한 환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긴 하지만 뼛속까지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도무지 그런 부정한 생물들을 잡아먹을 수 없었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베드로는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밝힙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 번씩 이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괴이한 환상에 대해 베드로는 속으로 의아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하고 말입니다. 바로 그 때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 온 것입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여 그 사람들을 영접하라 하시자 베드로는 순종하고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맞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할 영적 진리는, 성령은 때때로 거리낌을 극복하도록 도우시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한 걸음씩 행동으로 옮기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기억하시면 이 말의 뜻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지난 시간 베드로가 본 환상 속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머물도록 하신 분이 성령이시고,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들여야할지 고민할 때도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하셔서 자기에게 온 고넬료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한 분도 성령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베드로가 취하는 모든 움직임들 역시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하는 행동들임이 분명합니다.(참조, 19-20절; 11:12). 덧붙여 말하자면, 구스 내시를 찾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빌립의 움직임도 성령의 인도함 때문이었고(8:29), 후에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게 된 것도 성령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13:2,4). 소아시아 지경을 넘어 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파하게 된 것도 성령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16:6-7). 이것이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부르는 중요한 예들입니다(참조, 행전 20:22-23).

 

“나도 사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함에 따라서 심부름 온 사람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갑니다. 그러나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 베드로 역시 이번의 여행이 어떻게 전개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오자 고넬료는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마치 신에게 경배하듯이 말입니다. 아마 고넬료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도라는 사실에 대해 남모를 경외감과 두려움을 가졌나 봅니다. 누군가가 잘 표현했듯이, 고넬료는 자신 속에 있는 이교도적인 요소를 극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혼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도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든지, 선지자든지, 목사든지 모두 “사람입니다!” 그들이 권위를 갖게 된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음 때문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십니다!”라는 복음이 그들의 직분에 권위를 주는 것이지, 그들 개인 자체가 신적 권위를 자동적으로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남아 있을 때만이 그들은 마땅한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도구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존경은커녕 쓸모없어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영적 진리는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역자”를 과도하게 신적 위치에 있는 자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인들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하고, 교인들도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나도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면 하물며 보통의 말씀사역자들은 더더욱 그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경계선을 넘는 복음

 

고넬료의 집에 들어선 베드로는 먼저 한 자락 깔고 말을 시작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28절). 유대교의 가르침을 들먹이면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사이에 가로놓인 분리의 벽이 얼마나 높은 지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시면서 사람사이의 수많은 경계선들, 높은 장벽들, 분리의 칸막이들을 허물어뜨리셨는지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칠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면, 가버나움의 백부장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마 8:5-13; 눅 7:1-10; 13:28-29; 요 4:46-53). 갈릴리 지방에 가버나움이란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비유대인들로 구성된 수비대가 있었습니다. 수비대의 중대장 정도 된 장교가 자기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는 것을 예수께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그 이방인 장교의 하인을 고쳐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일화의 정점입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0-12절) 예수는 유대와 이방의 경계와 벽을 허물고 이방 민족에게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모든 인위적 장벽과 담벼락과 칸막이를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깨달음

 

고넬료의 집에 초대를 받은 베드로는 고넬료로부터 근자에 있었던 경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30-33절). 고넬료의 간증을 귀담아 듣던 베드로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큰 감동과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의 영적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종말적 구원 공동체에 함께 받아들이시는구나.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 정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시구나. 유대인이기 때문에 점수를 더 많이 주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시구나.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어느 종족, 어느 교파, 어느 지방, 어느 교단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경계를 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한 정의와 공평한 사랑이 “모두에게” 열려져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는 획기적인 각성이요 눈 뜸입니다.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

 

그가 고넬료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36절 안에 꽉 차있습니다. 36절을 풀어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메시지를 알고 있을 겁니다. 그 메시지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를 통하여 찾아온 화평(평화)에 대한 좋은 소식(복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는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이 문장만 옳게 이해하신다면,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가 증언해야할 내용이 무엇인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할 좋은 소식은 “평화”(화평)에 관한 것입니다. 화평으로 번역된 이 헬라어는 샬롬, 평안, 안녕, 화목, 평화, 안식, 번성, 활력, 생기, 자유, 기쁨, 즐거움 등을 떠올리게 하는 포괄적 구원용어입니다. 이 평안(평화, 화평)이 메시아이신 예수를 통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고,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죄인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고 그분과 관계가 평화롭고 평안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화해시키고 평안하게 만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신 분이 메시아 예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평화요 화평이요, 화평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과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좋은 소식은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에게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특정한 민족만을 위해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만유(모든 것, all)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가 되고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참조, 엡 1:10; 2:1-15).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자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갈 3:28). “누구든지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13).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더 이상 장벽이나 경계선이나 칸막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만유의 주님이신 메시아 예수의 사역과 고난당하심과 죽으심과 부활을 친히 목격했던 사도들(37-42절)과 그들의 메시지를 믿었던 수많은 제자들은 기꺼이 당당하게 증언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증인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믿음으로 받은 우리들 역시 담대한 증인들로 당당하게 나서야 합니다. 37-42절 사이에 “증인”, “증언”이란 단어를 찾아보세요.

 

말씀 경청과 성령

 

베드로의 설교를 경청했던 모든 회중에게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 고넬료 집에 모여든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마치 제2의 오순절 사건이 재현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나는 지금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복음)이 전파될 때, 그리고 전파되는 말씀을 경청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을 때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설교)을 통해 청중에게 믿음을 깨우쳐주시고, 그와 동시에 성령께서 강하게 그들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그 현상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말하였다”(46절)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한 것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신 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큰일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여기서 할례 받은 신자들은 유대인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신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베드로처럼 인종적 경계선 안에 머물러 있던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일하심을 보고 경탄하였습니다. 경계와 장벽과 칸막이를 허물어뜨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 말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었던 이방인들, 고넬료 집에 모였던 사람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더 듣고 싶었습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에 대한 갈증 때문에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했습니다. 이러한 교인들이 그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배고픔에 허덕거리는 거룩한 걸인들,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는 애처로운 사슴들 말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사도 베드로가 넘어야할 경계선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그는 그 경계선 넘기를 두려워했을까요?

 

2. 복음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가나요? 그 과정을 여러분의 말로 설명해보세요.

 

3. 무엇이 복음입니까? 복음의 주제어인 “화평”에 대해 설명해보세요. “화평”은 관계적인 용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4.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시다”는 문구를 설명해 보시고, 그 의미가 우리에게 어떤 결심을 하게 되는지 토의해 보세요.

 

5. 베드로는 설교에서 증인, 증언이란 단어를 몇 번 사용하고 있나요? 그가 그 용어에 힘을 주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6. 성령과 말씀 경청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해 보세요.

 

7. “방언과 하나님 높임”은 어떤 관계일까요? 방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8.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왜 그런 청을 하였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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