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몸으로 쓰는 율법”

 

“율법”하면 보통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갖습니다. 그만큼 “율법과 복음”이라는 프레임에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바울 서신에 몰입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그러나 신약성서 안에는 바울 서신뿐 아니라 마태복음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면 좋겠습니다. 마태복음서에선 율법의 적극적이며 긍정적 가치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신 분이 예수님 자신입니다. 율법에 대해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직접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겠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율법의 지극히 작은 글자 하나라도, 율법의 아주 작은 점 하나라도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빠짐이 없이 다 이루게 될 것이다.” (마 5:18-19)

 

여기서 예수가 말씀하시는 “율법”은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하는 “율법”과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말하는 율법입니다. 마태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은 전통적으로 구약에서 “토라”라고 부르는 율법입니다. 히브리어 “토라”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 백성에게 지시하시고 가르치고 알려주고 이야기해준 “말씀들”입니다. 토라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르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위에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내용들”은 하나도 폐기되지 않고, 모두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마 5:17). 특별히 기억해야할 사항은,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예수께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고 이루시려 오셨다는 것은 예수야말로 “참 사람”이요 “제2의 아담”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폐기 될 수도 없고 폐기 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도바울의 서신들에만 경도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선 여기와는 다른 의미의 율법을 언급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말입니다.

 

어쨌든 시편 119장과 같은 위대한 “율법찬가”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시면, 율법이 얼마나 좋은지 가슴 저리게 알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도”, “여호와의 법도”, “여호와의 율례”,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의 판단”,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규례”,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법”, “여호와의 진리”, “여호와의 심판”, “여호와의 성실”, “여호와의 공의” “여호와의 정의” 등입니다.

 

모두 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것도 부정적이고 어둡고 차갑고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율법은 따스하고, 온화하고,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율법을 뭐라고 말할까요? 삶의 이정표, 앞길을 비춰주는 랜턴(등불),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 신선한 과즙, 상쾌한 봄바람, 시원한 여름 소낙비, 포근한 이불, 외로운 등대, 북극성, 저울, 요정이야기, 선박을 위한 나침판, 양 날선 보검, 재판정의 방망이, 산속의 대피소, 우산과 같다면 어떨까요?

 

이러니 어찌 율법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째 율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을 사랑하고 읊조리고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가리켜 나는 “토라 영성”이라 부릅니다 (참조, 시편 1장).

 

끝으로 다시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한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율법)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 5:19).

 

삶으로 써내려가지 않는 신앙, 입으로만 외치는 신앙은 말짱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도”(discipleship)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며, 신앙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써내려가는 “육필원고”(肉筆原稿)여야 합니다.

 

Cadillac Area Visitors Bureau at Lake Mitchell, MI

Cadillac Area Visitors Bureau at Lake Mitchell.jpg

 

"Many men go fishing all of their lives without knowing that it is not fish that they are after." - Henry David Tho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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