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죽음, 낯선 친구”

 

출생과 죽음은 삶의 처음과 끝입니다. 출생은 인생 안으로 들어오는 대문입니다. 죽음은 인생을 떠나 나가는 뒷문입니다. 화려한 시작과 초라한 끝입니다. 주변에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환한 얼굴로 기뻐합니다. 누군가의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조문하러 갑니다. 뭐라고 말하기가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돌아옵니다. 출생은 어색하지 않은데 죽음은 왜 이리도 어색하고 낯이 선지요.

 

죽음은 언제나 낯선 얼굴로 다가옵니다. 한 번도 같은 얼굴인 적이 없습니다. 매번 이상하고 낯설고 서먹합니다. 어두운 망토를 걸친 이방인의 가려진 얼굴을 어둠속에서 힐끗 쳐다보는 기분입니다. 죽음은 매우 낯이 설면서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이웃과 같습니다. 참으로 모순입니다. 부조리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에게 하나님은 에덴 정원의 수많은 먹거리를 다 허락하시면서도 정원 한 복판에 심겨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실수에는 손을 대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 말을 들은 아담의 입장에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언제인지는 몰라도 아담의 성장한 두 아들 사이에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살해한 것입니다. 최초의 죽음이 발생한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 전혀 사전적 이해와 경험이 없었던 아담의 입장에서 “죽음”은 정말 생소하고 낯이 설었습니다. 땅 바닥에 누워 있는 아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벨, 아무런 반응도 없는 아벨, 어제까지 만해도 아버지에게 인사하던 아벨, 그러나 지금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비로소 아담은 이 현상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하였을 겁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매장이든 화장이든 지금에 우리는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아담은 아들 시신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도 몰랐겠지요. 한 번도 매장이나 화장을 본 일도 없는 아담에겐 아벨의 시신 처리 역시 낯설고 어색했겠지요. 하늘의 독수리가 시체를 먹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벨과 헤벨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먼저 온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보다 그의 아들 아벨이 먼저 죽었습니다. 올 때는 순서대로 왔지만 갈 때는 순서대로 가지 않는다는 소박한 진리가 입증되는 최초의 증거였습니다. 아들 아벨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아담은 “삶의 헛됨과 모순”을 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삶은 순간적이고 찰나적이어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허무하기 이를 데 없음을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 아벨입니다. 아담이 아닙니다!

 

아벨! 놀랍게도 “아벨”과 히브리어 철자가 같은 단어가 구약 전도서의 주제어로 35번 정도 등장하는 “헤벨”입니다. 덧없음, 어리석음, 부질없음, 헛됨, 모순, 안개, 수증기, 숨결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가 헤벨입니다. 전도서 안의 지혜자인 코헬렛은 “인생은 헤벨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벨은 그의 이름이 곧 자신의 역사입니다. 그는 무의미하게 죽은 성경의 민물입니다. 코헬렛은 아벨을 상기시킴으로써 죽음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가능한 일임을 일깨우고, 따라서 우리가 어리석게 살거나 ‘갑자기 준비도 없이’ 죽지 않게 해주려고 합니다.”(엘렌 데이비스,『하나님의 진심』159).

 

죽음을 기다리며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서성거립니다. 요양병원에 가보십시오. 산다는 것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을 거니는 위험천만한 여정입니다. 어두움 그림자가 드리우다가 햇살이 비추고,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더니만 어느새 어둑하고 쓸쓸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것을 보고 깜작 놀랍니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는 날이 온다는 생각에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 봅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겸손”(humility)이라는 영어단어가 땅을 뜻하는 라틴어 휴머스(humus)에서 왔다는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사람을 뜻하는 “아담”이라는 히브리어가 땅(흙)이라는 히브리어 “아다마”와 유사하다는 것 정도를 알면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는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반드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를 기억하십시다(전 12:1). 이게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늘을 향해" 과천성당, by Daniel R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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