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하나님나라와 교회와 하늘나라”

 

성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음조가 있다면 뭘까? 많은 변조와 치장음색들에도 불구하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기저음조는 무엇일까? 종종 구원, 사랑, 언약, 이신 칭의, 믿음, 성화, 회개와 같은 단어들이 후보자 군에 올라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주제음조를 돕거나 주제음조에서 흘러나온 변형된 멜로디들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가로질러 흐르는 가장 강력한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 “하늘 왕국(天國)”입니다. 이 사실을 구약성경의 종결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이 오셔서 하신 최초의 선언에서 이미 밝혀져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태 3:17) 이른바 공적 생애가 시작되면서 예수께서 하신 일성이 이 말이었습니다. 한편 그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40일간 이 땅에 계시면서 하신 일 역시 하나님 왕국에 대한 말씀을 전파하고 다니셨습니다. “사십 일 동안 하나님 나라(왕국)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전 1: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 역시 핵심은 하나님 나라(왕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그 나라를 다스리는 천상의 대왕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송영으로 끝을 맺고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왕국”은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큰 얼개이며 중심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이 문구보다 더 장엄하고 감격스런 선언과 고백은 없을 것입니다. 이 왕국은 보이는 지상교회로 환치되거나 동일시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왕국은 크리스천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정의와 공의가 공식 통화로 통용되는 나라입니다. 거짓과 불의, 억울함과 부정, 편견과 분열, 사악과 탐욕, 고통과 죽음, 흑암과 비통이 결코 설 자리가 없는 광명의 왕국입니다. 어린아이가 사자를 이끌고 다니고,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함이 없고, 늑대와 양이 함께 눕는 왕국입니다. 정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아슬란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왕국”을 다른 말로 바뀐다면 “하늘 왕국”입니다. “하늘 왕국”을 줄여서 표현한 말이 “천국(天國)”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 왕국”과 “하늘왕국(천국)”은 동의어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란 직접적 언급 대신에 “하늘”(히브리어, 솨마임)을 사용합니다. 아주 높은 곳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하늘 왕국(天國)”은 곧 “하나님 왕국”을 뜻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서는 주로 “하늘 왕국”(천국)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만 다른 복음서에선 “하나님 왕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왕국을 다스리는 인물이 누구일까요? 구약에서는 메시아적 인물입니다. 메시아란 히브리어로 “향유를 붓다”는 동어에서 나온 명사형으로 “향유로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해 왕권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지요. 왕위에로의 즉위식(대관식) 때에 당사자에게 향유를 붓는 예식을 기억하시면 될 것입니다.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메시아적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듯이, 특별히 역사서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듯이 모든 왕들은 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메시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일그러지고 추한 메시아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왕정이야기는 이처럼 치밀하고 철저한 왕국 비판문서들이며, 왕국에 대한 비판적 주석서들입니다.

 

이제 구약의 이스라엘의 끝자락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라는 메시아이십니다. 그는 옛 메시아들의 시대를 종결짓고 새로운 메시아 시대를 여시는 분이십니다. 나사렛이라는 자그마한 동네에서 이루어진 새 메시아의 왕국 취임 연설(누가 4:16-21)을 통하여 예수는 자신이 구약의 대하 왕국 역사의 결정점이 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왕국을 다스리시는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메시아이고, 메시아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구약의 하나님의 왕국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약의 장대한 구원 역사, 달리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자그마한 왕국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 왕국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신약의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이다!”라는 선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님 왕국의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용어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톰 라이트는 그의 새로운 번역 신약 성경의 제목을 “왕국신약성경”(Kingdom New Testament)라고 붙였겠습니까! 게다가 그 성경을 읽어보면 놀랍게도(!) “그리스도”란 용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다니요? 안 나옵니다! 이유인즉 그리스도는 모두 메시아로 바꿔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신약의 하나님 왕국(하늘 왕국)은 구약의 하나님 왕국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한다는 강한 주장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개혁파 신학자로서 나도 “왕국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기에 박수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전체의 중심사상을 한두 가지 신학적 용어로 축소 환언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언약이든, 구원이든, 이신 칭의든, 교회든, 정의든, 믿음이든, 은혜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만, 오늘 이야기 하려는 속내는 사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편찬이라는 것이 그냥 몇몇 주요교단들의 대표자들이 모여 주요교단들에게 돌라갈 “이권(利權)”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편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기로는 찬송가 편찬이 매우 신학적이고 목회적이고 음악적이고 문학적인 고도의 다양한 전문성들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단들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느 책이든 먼저 살펴보는 곳이 목차(차례)입니다. 목차를 보면 이 책이 어떤 구조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구조를 살펴보면 책의 저자나 편집가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찬송가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찬송가 5-6쪽에 들어있는 목차를 펴보십시오. 그곳에 “제목 분류”가 있습니다. 찬송가 총 645장을 예배 신학적으로 15개의 항목으로 구별해 놓은 것입니다. 그 15개의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배(1-62장)

         성부(63-79장)

         성자(80-181장)

         성령(182-197장)

         성경(198-206장)

         교회(207-223장)

         성례(224-233장)

         천국(234-249장)

         구원(250-289장)

         그리스도인의 삶(290-494장)

         전도와 선교(495-549장)

         행사와 절기(550594장)

         예식(595-613장)

         경배와 찬양(614-624장)

         영창과 기도송(625-645장)

 

오늘의 관심사는 앞서 이야기 한 대로 “교회”와 “천국” 항목입니다. 먼저 “교회”란 항목을 살펴보신다면, “교회”라는 항목아래에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와 “헌신과 봉사” “성도의 교제”입니다. 여기서 “헐!”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 항목 아래 “하나님 나라”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하나님 왕국)보다 “교회”가 더 큰 신학적 주제라는 것입니다. 이게 맞는 말입니까? 최근의 스캇 멕나이트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새물결플러스 간)이란 책에서 도발적으로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이게 신학적으로 정당한 말입니까? 이미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아니거든요! “하나님 나라”(207-210장)을 실제로 찾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찬송이 아니라 현실교회, 지상 교회에 관한 찬송입니다! 생각 없이 이런 어리석은 분류를 하다니요!

 

가관인 것은 “하나님 나라”와 “천국”(하늘나라)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는 동일한 개념임에도 말입니다. “천국”에 해당하는 찬송가들(234-249장)을 살펴보십시오. 모두 15장의 찬송가를 모아놓았는데, 모두 “죽어서 가는 곳”에 관한 내세 지향적 찬송입니다. 상당부분이 장례식장에서 불리는 찬송이기도 합니다.

 

     “영화롭고 아름다운 우리 본향 천국에서 주와 같이 영원히 살겠네”(234장)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즐겁게 살리라.”(235장)

      “우리 모든 수고 끝나 세상 장막 벗고서.”(236장)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낙원 있네.”(237장)

      “저 뵈는 본향 집 날마다 가까워”(239장)

      “영화로운 시온성에 들어가서 다닐 때”(240장)

      “저 요단강 건너편에 화려하게 뵈는 집.”(243장)

      “저 좋은 낙원 이르니,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245장)

      “나 가나안 따 귀한 성에서 길이 살겠네, 저 생명시냇가에 살겠네.”(246장)

      “영원한 천국은 지금 안 뵐지라도 약속의 천국은 분명한 나의 본향”(248장)

      “저 밝고도 묘한 시온성 향하여 가세”(249장)

 

물론 시적 표현이겠지만 한국 찬송가의 편집에 따르면 “천국”(하늘나라)은 저 구름 너머 어디에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편집자들에겐 “하나님나라”와 “하늘나라”(천국)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천국)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실현되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함께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죄와 불의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매우 급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돌입하여 들어오신 사건이 성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초림이야 말로 천상왕권의 지상적 침공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성전(거룩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왕국의 권부(權府)를 무너뜨리고 그 세력들을 완전 무장 해제시켰던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한 구절입니다(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And having disarmed the powers and authorities, he made a public spectacle of them,

            triumphing over them by the cross, NIV)

 

전 시대의 위대한 신약신학자인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말대로 십자가 사건은 구원사적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게 했던 D-Day에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잔존하는 악의 세력들을 소탕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쟁(War)의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지만, 작은 전투(battle)들은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왕국의 현재적 상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이라 할 때도 죽어서 가는 어디가 아니라 죄와 사탄의 지배에서 온전하게 벗어나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 실현되는 때(V-Day)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때에 최후의 승리가 주어질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神國)와 “하늘나라”(天國)는 매우 현세 지향적 급진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곳 여기로 돌입하여 오고 있는 하나님의 왕권입니다! 그분의 다스림에 항복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하여 세운 구원의 나라, 광명의 나라로 우리를 옮기셨음을 믿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단순히 개인적 결단에 의한, 혹은 “믿음”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의 왕국을 세우시고 우리를 흑암의 왕국에서 건져내어 옮기셨다는 사실(예, 골 1:13-14), 달리 말해 신실하신 하나님이 세우신 “하늘왕국”(천국)으로 우리를 옮겨주셨다는 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왕국은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계시록 21-22장이 그려주는 대로 말입니다.

 

“하나님왕국(나라)”과 “하늘왕국”(천국)은 결코 다른 개념이 아니라 같은 개념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가장 포괄적이고도 강력한 주제음조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린다!”(God Reigns!) 이 구절이야말로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의 중심표제어입니다. 한국 통일찬송가 유감이었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전경]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와 우르시누스, 성령교회와 올레비아누스, 그리고 네카강과 "황태자의 첫사랑"이 떠 오르는 고성.

고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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