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건배(乾杯)와 흰 돌

 


어제 저녁에 한국개혁신학회(회장 주도홍 백석대 교수) 2016년 신년하례식이 있었습니다. 올해로 창립된 지 20년이 되는 해입니다. 평소 각종 신학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나로서 어제는 예외였습니다. 학회에 가지 않는 이유는 보통 학회들은 토요일에 열리곤 하기에 주일 설교를 해야 하는 입장에선 여간 부담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어제는 달랐습니다. 첫째, 목요일 저녁에 열렸고, 둘째, 골치 아픈 논문 발표하는 학회가 아니라 신년하례식이었고, 셋째, 겨울방학 중이었기 때문에 참석이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내가 그곳에 참석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은 나의 오랜 친구이며 친애하는 동생(!)이며 학회 회장님이신 주도홍 박사님의 애절하고도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살다보니 각종 유혹들이 많아서 나는 가족식사 때마다 가족들과 큰 소리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데, 주기도문 가운데 특별히 주님, 나로 시험(유혹)에 들지 말게 해 주소서!”라는 구절에 힘을 주어 외우곤 합니다. 어쨌든 회장님께서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참석해달라고 애걸하였기 때문에 지는 척 하고 참석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회장님에게 하례식에 뭐가 특별한 게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군침 넘어가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서울시청 앞에 있는 대통령(President) 호텔에서 열린다는 것과 저녁 식사 메뉴는 호텔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라는 것이었습니다.

 

와우! 이 유혹에 나는 쉽게 넘어갔습니다. 주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웠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영하 6도의 추위를 가르고 BMW를 타고 모임장소로 갔습니다.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로 지상으로 올라와보니 오늘 편으로는 대한문과 덕수궁, 정면에는 플라자 호텔과 뒤로는 웅장한 서울시 신청사 그리고 시청 앞 광장 자리에 마련된 스케이트장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둘레에 긴 스카프를 늘어뜨린 채 빙판을 도는 젊은 연인들, 뒤뚱거리는 어린아이 손을 잡고 어정쩡하게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젊은 엄마와 아빠들, 옛 추억을 달래보려는 둥둥한 중년아줌마들 등, 너도 나도 모두 신나게 어깨를 부딪쳐 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였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서울 시청 주변 야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찬바람이 소매를 파고들었지만 마음만은 상쾌하고 기분은 날아갈듯 좋았습니다. 경기도민의 서울 나들이였기 때문에 더 그러했습니다.

 

호텔 18층에 마련된 학회에 도착하자 간단한 경건회가 열렸습니다. 신학계의 원로이신 김명혁 목사님의 진솔한 설교가 있었습니다. “착함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살아보니 착한 믿음과 착한 행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어 오늘 모임의 하이라이트인 그럴듯한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간 유일한(!) 이유인 저녁 만찬, 그것도 고급 한우 스테이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이란 말입니까? 서브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어떻게 어느 정도 고기를 익힐 것인지 묻는 것이 고급호텔의 방식이 아닙니까? 근데 내 앞에 웨이터가 스테이크를 덥석 가져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물어 볼 틈도 없이 웨이터는 다른 테이블로 가버렸습니다. 품위 있게 칼로 썰어 천천히 입속에 넣었습니다. , 이건 약간 오래된 가죽 씹히듯이 딱딱한 것이 아닌가? 입안으로 은은하게 펴져나가는 육즙을 기대하였는데. 내 입에는 단단하고 뻑뻑할 정도로 웰던(well-done)으로 구운 것입니다.

 

그래도 이게 공짜은혜 아닙니까? 은혜에 대한 유일한 반응은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칼질을 하며 한 점씩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모임이었기에 스테이크의 영원한 반려자는 보이질 않았습니다. 마치 양복을 입고 갓을 쓴 격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뻑뻑한 스테이크를 넘기기 위해 나는 아무 죄도 없는 냉수만 벌컥벌컥 들이켰습니다.

 

식사 시작 시간에 갑자기 주도홍 회장님이 사회자를 시켜 나를 지목하는 것이 아닙니까?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뭔 일인가 했더니 앞으로 나와 모두를 위해 건배사(乾杯辭)를 하라는 것입니다. 도옹은 아주 고약한 사람입니다! 사전에 부탁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처음 참석하여 어색하기 그지없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나를 지목하여 건배사를 외치라고! 세상에 믿을 넘은 없다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것도 평생 한 번도 그런 자리에 서 본 일이 없는 이 순진한 사람에게 그런 건배를 부탁하다니!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회사 회식자리에서의 건배모습은 적어도 아침이슬이 아닌 이상 색깔 있는 음료를 들고 위하여!”를 외치던 것 같던데 말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아주 오래 전에는 건배구호로 개나발!”이라고 했던 때도 있다고 하네요. “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의 약어로 말입니다. 아니면 주로 교회의 장로직분을 갖고 있는 교계의 실업인들 모임에서 건배를 할 때면 시미나창!”이라고 한답니다. 사업하는 분들에게 아주 적절한 건배구호랍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의 약어 건배구호라는 군요!

 

건배((乾杯, 잔을 비운다는 한자어)를 주도하라는 부탁에 나는 어떨 결에 앞으로 나갔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하던 참에 하늘에서 음성을 들렸습니다. 이런 구호를 외치라고. 하늘계시를 받은 나는 즉시 참석자들 모두에게 앞에 놓인 물 잔을 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Pro Rege!”(프로레게)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외치는 순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로 레게”(Pro Rege)는 라틴어로 왕을 위하여!”라는 구호입니다. 개혁파 신학과 신앙에 딱 어울리는 구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왕이시며 주님이라는 신앙 고백적 구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개혁신학회의 신년 하례식에 이보다 더 적절한 건배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쨌든 성찬식이 아니어서 포도주잔을 들지는 않았지만 참석자들은 모두 맹물을 들고 왕을 위하여!”라고 소리쳤습니다. 마치 비밀결사대원들의 모임이라도 되었듯이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과 저의 삶의 평생 모토로 삼을 만한 구호입니다. PRO REGE!

 

식사가 끝나고 참석한 분들이 앞으로 나와 서로에게 이런 저런 덕담을 건네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개혁신학회의 설립자인 전 숭실대 김영한 현대신학 은퇴 교수님(이분은 설립자란 명칭을 아주 좋아하시는 독특한 분이시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의 설립자라는 명칭도 자주 사용한다)를 필두로, 설교하신 김명혁 목사님, 40년 이상 알고 지내던 박봉규 목사님(한장총 목회자교육원 원장), 현 백석대 총장인 신약학 최갑종 교수님, 전 칼빈대 신대원장인 오성종 신약학 은퇴교수님, 그밖에 참석한 여러 학자들이 나름 소회와 덕담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인상적인 압권은 80세가 넘으셨으나 아직도 쩌렁쩌렁한 관운장의 목소리로 청중을 압도하시는 차영배 박사님(전 총신대 학장, 교의학)의 조크였습니다. 마이크를 잡으시더니만 참석한 학자들 가운데 회장을 비롯하여 6명 정도가 백석대학교 교수들인 것을 감안하셨는지는 몰라도, 불쑥 하시는 말씀이 백석(白石)이라는 단어는 발음하기가 어려워요! 한자어잖아요! 그러니 순 한글로 바꾸시오!” “흰돌로!”

 

좌중에서 폭소가 떠져 나왔습니다. “백석-흰돌” “백석-흰돌” “흰돌 대학교” “하얀돌 대학교!”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습니다. “백석이란 한자어가 좀 있어 보인다고? 조금 더 격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아닙니다. 순수한글이 더욱 정겹지 않나요? “흰 돌!” 그러보니 계시록 2장에 기인하는 백석도 사실은 흰 돌이라는 순 한글로 번역이 되었네요. 주 예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 우리의 유일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께만 충성하는 자들에게 흰 돌이 주어질 것이고 그 흰 돌 위에 그 흰 돌을 받는 자 만이 아는 새 이름이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엔 우리에게 복종과 경배와 절을 강요하는 수많은 힘들과 세력들과 있습니다. 명예, 돈과 재물, 학벌과 연줄, 각종 권력과 세력들 등이 오늘도 부단히 크리스천들에게 복종을 강요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을 위하여!”라고 외치며 신앙의 전쟁터에 당당하게 나가는 크리스천들과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하는 저녁이었습니다. 어쨌든 차영배 박사님의 마지막 멘트는 대박이었습니다.

 

프로 레게”(Pro Rege)흰 돌”, 아주 멋진 조합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왕이시는 예수 그리스께 충성하는 자들에게 흰 돌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흰 돌 위에는 그 흰 돌을 받는 자만이 아는 새로운 이름이 쓰여질 것입니다. 그 이름을 받아보실 의향은 없으신 지요!

 

 

[사진 1] 뒤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안명준(평택대), 오성종(칼빈대), 조병하(백석대), 허주(아신대), 이경직(백석대), 김정훈(백석대), 권숙(서울남부교회), 이은선(안양대), 김기욱(간사), 손인오(테너, 안양대), 주도홍(회장), 최갑종(백석대), 김명혁(강변교회 원로), 김영한(숭실대), 차영배(총신대), 김영선(협성대), 박봉규, 류호준

[사진2] 건배사를 하려고 폼 잡고 있는 류호준. (사진 제공, 평택대 안명준 박사)


하례회.jpg 건배류호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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