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사순절과 마음의 인테리어

 

어느 집을 처음 방문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천천히 연다. 마치 성적표를 보는 심정으로 말이다. 넓지는 않은 거실이지만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너그러운 미소로 손님을 환대하는 중년 여성의 넉넉함이 느껴진다. 주방은 정갈한 흰색과 코발트의 완벽한 조화를 이룬 깔끔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바깥 뒷 정원이 보이는 주방 창문은 신부의 순백 드레스처럼 흰 레이스로 단장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몬드리안의 구도가 이 집 여주인의 간결과 담백함을 질서정연하게 수놓아 주고 있다. 너저분한 구석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순미와 확연한 선들,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주방용품들, 열대 과일 바구니와 커피 향과 어우러져 키친 아일랜드를 이국적 풍경으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거실은 어떠한가? 누군가 내 마음의 인테리어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을까? 맑디맑은 영혼, 순백한 정신세계, 흐트러짐이 없는 우아함, 티 없는 영혼의 창문, 심지어 은밀한 심실(心室)에도 가지런하게 쌓인 생각들, 웃음과 미소로 넉넉한 입술, 정직과 온화함의 손길, 갓 내린 커피 향보다 더 그윽한 언사, 정감어린 대화의 방, 손님 환대로 환한 웃음이 넘치는 식탁, 이런 것들이 더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고 순결하게 놓여 있는 마음의 인터리어였으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사순절은 영혼의 창고를 열고 재고 조사(inventory)하는 기간이라지. 총채를 들고 살포시 내려앉은 먼지를 훌훌 털어내고 새봄맞이 했으면 좋겠다. 창문도 열어젖혀 바깥 봄바람도 들어오게 하고 오래된 공기는 슬쩍 밀어내려 한다. 오랜 묵은 악습들과 끈적끈적하게 들붙어 있는 더러운 습관들을 힘겹게라도 밀어내아 한다. 영어로 사순절을 렌트(Lent)라고 하는데, (Spring)이라는 뜻을 지닌 옛날영어 Lenten의 축약형이며 게르만 언어인 독일어와 네덜란드어로 봄을 각각 Lenzlente라고 쓰는 것을 봐서도 봄맞이 대청소와 사순절의 영혼 청소가 상징적인 관련을 갖고 있지 않은가.

 

어쨌든 사순절은 세례전적 영성으로 내 영혼과 마음을 돌아보고 묵은 찌끼를 털어내는 계절이다. 죄 죽이기를 치열하게 전개하는 고통의 계절이며, 영혼의 새살이 돋을 때 느끼는 신생(新生)의 기쁨을 맛보는 환희의 계절이다. 이 환희는 갓난아기의 살결처럼 보드랍고 향기롭다. 새살에 뺨을 살갑게 비벼대며 순수의 눈물을 흘려본다.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순간이다. 얼마나 놀라운 인생인가!

 

이 사순절 기간에 내 마음의 인테리어도 저렇게 깔끔하고 담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자 적어본다.

 

참고로, 올해는 218일 재()의 수요일로 시작하여 45일 부활주일까지, 여섯 주일을 뺀 나머지 40일을 사순절로 계산한다.

 

[정갈한 주방]

this Indiana kitche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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