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성경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신앙의 여정은 시작된다

 

 

성경. 다른 책들과는 달리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별히 개신교인(프로테스탄트)들에게 성경은 그들의 영혼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죽하면 개신교인들을 가리켜 그 책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겠습니까? 한국의 개신교 전통은 성경 중심의 신앙, 성경 사랑의 신앙을 높이 평가해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를 대충 훑어봐도 성경이 한국의 근대화에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좀처럼 여성에겐 배움의 길이 열리지 않았던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봉건적 한국사회, 많은 핍박과 질타 속에서 기독교신앙을 갖게 된 시골의 수많은 여성들은 성경을 통해 한글을 학습했고 성경 속에 들어 있는 한자도 배우며 그들의 교양과 신앙과 세계관을 넓혀갔습니다. 하기야 성경에는 우주와 인류 역사 이야기, 시와 우화, 경구모음과 예언 등과 같은 다양한 장르의 문학적(!) 글들을 담고 있으니 어찌 그들의 교양과 배움의 폭이 넓어지지 않았겠습니까?

 

6.25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서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골의 겨울은 한가로웠습니다. 겨울은 농한기(農閑其)라 특별히 논이나 밭에 나가 할 일이 없었기에 종종 남자들은 술 먹고 노름 하는 일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농촌마을에서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던 예수쟁이들은 겨울철이 되면 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査經會)라는 모임에 다녔습니다. 사경회란 일정한 기간 동안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집회였습니다. 눈으로 덮인 산야와 개울을 가로질러 시골읍내에서 약간 떨어진 개울가에 자리 잡은 교회당으로 검정치마를 입은 아낙네들과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 장로님들과 열정적으로 뭔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젊은 남자 집사님들이 모여듭니다. 보통 새벽, 오전 10시 성경공부, 오후2시  성경공부, 그리고 저녁집회까지 하루 종일 닷새를 했습니다. 순박했던 시골사람들의 성경사랑은 대단했습니다. 내 기억으로도 당시 교회에 가는 사람들의 외형적 모습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닳고 닳아 너덜해진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성경을 읽는 모습은 성실한 신자들의 가족 풍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옛 이야기들 속으로 들어가, 그 책 속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을 만나면서 때론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때론 그들과 한없이 슬퍼하기도, 때론 호탕하게 그들과 웃으며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그 책에서 아담과 하와, 방랑하는 족장들과 이스라엘의 판관들, 그 후에 이어서 나오는 나쁜 왕들, 못돼 먹은 왕들, 착한 왕들, 소심한 왕들을 만납니다. 그뿐 아니라 예언자들과 시인들의 외침과 시와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선 예수라는 분과 그의 떠돌이 생활, 바울사도와 복음전도자들, 히브리서의 위대한 가르침들, 계시록의 충격적인 환상들을 만납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살과 피와 숨소리가 들리는 살아있는 사람들, 흙과 먼지, 바람과 비와 강들과 별들, 미움과 사랑, 배신과 증오, 울음과 웃음, 통곡과 아쉬움, 절망과 희망, 살아가야할 이유와 걸어 가야할 길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라도 책 바깥으로 뛰어 나올법한 것들이었습니다. 숲길을 걷는 청소년에게 나침판이 있듯이, 깜깜한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에게 북극성이 있듯이, 방황하고 방랑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성경은 길을 안내하는 여행 가이드와 같았습니다. 성경이 이러했습니다. 적어도 순박한 신자들에겐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상은 내 어렸을 적과 같지 않습니다. 살만큼 살게 된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배운 사람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은 세상입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다들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주과학의 발달과 첨단 학문의 진보가 확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웬만한 전문 지식이나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대인들의 우주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고대나 중세의 국가체제는 이미 박물관이나 책에서나 알아 볼 수 있는 화석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다양해진 사회윤리와 경제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현대인들의 눈에 성경은 어떻게 비춰질까 궁금하기 그지없습니다.

 

주후 4세기부터 시작된 서구사회의 기독교 시대”(christendom)기독교후시대”(post christendom)에 그 왕좌를 내어주는데 천년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한국에선 몇 십 년 밖에 걸리지 않을 것 같으니, 현금의 한국 기독교회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종교다원주의, 상대주의, 실증주의, 현대과학의 급속한 발전, 계몽주의의 지속적인 영향력, 개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세속주의 등, 온갖 다양하고 서로 상충하는 시대정신들이 한껏 춘추전국 시대를 이루며 군웅할거하고 있는 이 시대에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독교인들에게 도대체 성경은 무슨 의미,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주일 설교를 하는 목사들에게 성경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합니다. 종교적 경전에 불과한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나 이루고 싶은 꿈과 야망을 성경구절에 걸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성경이 목회자 자신을 만들어가고 그의 성품과 덕성을 형성하고 구성하고 변혁시키는 절대적 동인이 되도록 하고 있는지. 평신도들은 어떠한지? 귀가 닳도록 목회자들로부터 성경중심의 신앙을 세뇌 받아온 한국의 기독교신자들에게 도대체 성경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목사들이나 신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성경관은 무엇일까? 지금의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어떤 책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마 그들의 공통된 대답은 공식을 외우는 듯한 암송일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말을 아무 생각없이 자랑스럽게 외치는 성경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현금 한국교회 문제들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추측입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성경 우상주의자”(biblicist)가 되어갑니다.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서 성경은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소위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위험스러움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을 위한 도구이지 결코 신앙의 대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필요할 때 찾아보는 전화번호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서대로 열거해놓은 육법전서도 아닙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성경이 답이다!”라고 외치며,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열어보는 인생문제 정답 모음집도 아닙니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의 존재 목적을 여러 곳에서 분명한 어조로 밝힌바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계시되면, 모든 것이 환한 빛이 됩니다. 주의 말씀은 심지어 우둔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이해력과 분별력을 주어 깨닫게 합니다.”(119:130)

 

주의 말씀은 내 발을 비춰주는 빛이며 내가 가는 길의 등불입니다.” (119:105)

 

신약성경 로마서에서도 성경의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

 

이상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경은 우리가 결코 거절하거나 물리칠 수 없는 하나님의 장엄하고 숭고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신적(神的) 도구(divine instrument)라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성경은 결코 신앙의 대상도, 경배의 목적도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덮어놓고 성경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우상주의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성경”, 거룩한 경전이라고 부릅니까? 왜 우리는 특정한 고대 중동의 문서를 거룩하다고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거룩하다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담겨있는 가르침들과 훈계와 모범들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기상과 영을 하나님의 마음과 기상과 영을 향하도록 인도하는 안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진정한 신앙과 헌신은 성경을 덮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신자들의 마음과 가슴과 삶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 신앙은 활력 있고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약속들과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분의 인도하심이 신실하고 신뢰할만하다는 희망에 우리를 확고하게 붙들어 매는 강력한 도구인 셈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자세하게 조사하고 연구하고 공부해야합니다. 어떤 분들에게 성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머리만 크게 만드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연구를 이성적 잣대를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며 판단하는 매우 불경스런 일이라고까지 하며 질타합니다. 물론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 때문이 성경연구를 좋아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성경우상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비록 그가 탁월한 학자일지라도 위에서 말한 성경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심하지 않는다면 그는 천하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이끌어가고, 그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신자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가 온전히 회복되어지도록 안내하고 때론 인내하게 하는 강력한 신적 도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목사들이나 신학자들만을 위한 전문 종교서적이 아닙니다. 신자들과 교회를 위한 책이 성경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니 개탄스럽게도 성경이 신자들의 삶에서 자리를 잃어가고, 신자들의 삶에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된 현실입니다. 주지하다시피 교단정치에 목을 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명예욕과 물욕에 함몰된 몰지각한 정치 목사들, 지 교회내의 크고 작은 권력다툼들과 교회를 빌미로 한 이권개입, 사회적 신분 확보를 위한 기지 조성, 형식화되고 계급적 교회 직제와 문화, 신적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일부 목회자들의 횡포, 기업형태 교회운영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에 대한 무관심과 세속적 가치관으로 무력하기 그지없는 평신도의 행태를 보아도 한국교회의 희망과 미래는 시계제로입니다. 머리카락을 잘리고 힘을 상실한 채 들릴라의 육감적인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불쌍한 거인 삼손처럼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잃어버리면 크리스천의 삶 속에 성경실종 현상이 심각하다는 것이 내 판단입니다. - 스스로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사람이라는 도구들과 그들의 예표적인 삶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해 선택한 도구들 중의 하나가 성경입니다. 성경에는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허술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가고 때론 뭔가를 발견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혹은 길을 잃어 방황하기도 하고,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어진 일들에 대한 생생한 기록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은 생생한 증언의 말씀입니다. 이 증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아하 그런 일들이 그래서 일어난 것이구나!”라고 하면서 우리의 현재의 삶의 대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되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장차 오게 될 일들에 대해 희망을 갖으면서 현재의 온갖 고난과 역경들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때론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신자들에게 하늘의 희망과 위안을 주는 위대한 신적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학문의 전당에서 연구되어지는 전문서적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책이며 신자들의 책입니다. 아니 신자들의 책이어야만 합니다. 누군가 멋지게 말했듯이, “성경은 빼기하는 역사가 아니라 더하기 하는 시”(The Bible is not history minus but poetry plus)입니다. 설명하자면 역사실증주의에 빠져, 고대문헌 연구자처럼 성경의 역사적 층들을 발굴하는 것을 성경연구의 목적인양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성경은 거룩한 상상력을 통하여 하나님을 노래하고 그가 행하시려는 놀라운 계획들을 시인의 감수성을 갖고 읊조리고 있는 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내가 읊조리고 암송해야 하는 시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리켜 순례의 길에 들어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적절한 비유입니다. 신자들이 순례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성경을 통해 우리는 우리 앞서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역사 너머의 역사를 듣기 위함이며, 그들이 걸어갔던 그 길들 너머의 길들을 바라보기 위함입니다. 우리 앞서 걸어갔던 사람들의 삶을 본받거나 생각 없는 따라쟁이가 되기 위함이 아님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성경 안에 기록된 사람들의 삶을 향해 말씀했던 그 능력의 말씀이 동일하게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신실하게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신실하게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삶의 구석구석을 뚫고 비추는 빛의 인도를 따라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함께 신앙이 시작됩니다. 신자를 위해 성경이 있는 것이지 성경을 위해 신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굴의 투지로 끝까지 지치지 않고 순례의 길을 완주하려는 신자들에게 희망과 인내와 위로를 주기 위해 주어진 신적 선물이 성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곱씹고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성경을 덮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을 덮는 순간 진정한 신앙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2015년에는 한국교회의 신자들이 성경이 내뿜고 있는 강력한 기상을 온 몸과 마음과 삶 속으로 흡입하여 우리 앞에 먼저 천성을 향해 가신 선구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정진하였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각종 분쟁과 다툼과 싸움으로 일그러지고 상처투성이가 된 한국교회가 온전한 회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가는 신앙의 순례 길을 비춰주는 영원한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John A Gessner Photography along Lake Michigan, 2015년이 밝아오다]

 Lake Michiga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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