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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예수가 거느리시네!” 유감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옛날 찬송가 중에 444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통합찬송가 나오면서 장이 바뀌어 390장이 되었습니다. 외우기도 좋았는데 바꿔 놓고 보니 매번 이 찬송가를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내가 이 찬송가를 좋아하는 여러 이유들 중에 하나는 한글제목이 내가 서 있는 개혁 신학적 전통을 잘 반영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거느리신다!”는 제목입니다. “거느리신다!”는 말을 “다스리신다!”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문구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개혁신학을 표현하는 문구는 없습니다. 개혁신학을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 신학” “하나님 왕국 신학”(Kingdom Theology)이라고 부르는 데, 개혁 신학의 핵심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피조 세계 전체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선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합 찬송가 390장은 개혁 신학적 전통의 성경 신학의 핵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 가사 가운데 몇 구절을 읊조려 보십시오.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풍파 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때 거느리네.”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예수가 거느리시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노래함에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등극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학자들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듭니다. 물론 그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신 때에 그는 만유의 왕으로 등극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신학적으로 볼 때 부활의 때보다는 승천의 때가 더더욱 적절한 기회인 듯 보입니다. 승천이야 말로 천상의 하나님의 우편 보좌로 대관식을 거행하는 가장 적합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장과 같은 대관식 시편이 왜 초대교회 당시에 가장 메시아(그리스도)적 시로 여겨졌는지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배경으로 하는 찬송 390장은 “예수가 다스리신다!”는 황제의 장엄한 칙령반포와도 같습니다.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사탄과 마귀의 왕국을 궤멸시키시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시며,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그들을 완전 무장 해제시킨 사건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13-15)

 

통치자들과 권세들로 표현된 악한 영이 지배하는 흑암의 세상, 결국 모든 인류가 죽음에 굴복하게 된 어두운 세상,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세상을 장악하였던 마귀의 세력을 십자가 위에서 완전 무력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을 세상의 구경거리와 만인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수치와 모욕과 창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우주적 차원”(cosmic dimension)을 강력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구원을 한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개인 구원론”으로 축소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 신학계의 한 구석에서 불거진 “이신칭의(以信稱義) 논쟁” 역시 구원의 개인적 차원을 강조하는데서 발생한 일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적” 구원관 역시 성경적 기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단순히 개인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이며 우주적 차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일구어내신 장엄한 구원의 역사(승리자 예수)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구원은 형편없이 추하고 기형적이었던 상태와 관계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때가 이르매 온전하게 회복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골로새서의 이 구절은 구약 전편에 흐르고 있는 “거룩한 전쟁”(聖戰) 전승과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대장군으로 세워 죄와 악의 세력과의 일대 전쟁을 치루시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그가 승천하실 때에 적군의 우두머리를 쇠사슬에 묶어 질질 끌고 본국으로 개선하는 모습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한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가 위로 올라가실 때(승천)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지상의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 그 구절은 시편 68장의 한 구절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맞춰 약간 변용하여 인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에베소서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68장의 해당 구절은 “거룩한 전사”로서 전쟁에 나선 야웨 하나님을 그리고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병거는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예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야웨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시 68:17-18)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예수가 다스리신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가벼이 여길 문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가 다스리신다면, 그가 다스리지 않는 인간영역(혹은 피조세계)은 한 치도 없다는 말도 됩니다. 이것보다 더 강력한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도 어디선가 이렇게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롬 8:37). 모든 일이라뇨? 모든 일에 포함이 안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죽음이든 생명이든, 건강이든 병이든, 실패든 성공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어느 때 어는 곳에서라도 그분이 다스리시고 거느리신다는 말입니다. 왕국신학, 왕권신학이야말로 개혁신학의 주제음조입니다. 그러니 찬송 390장(옛 444장)이야 말로 강력한 위로를 주시는 찬송임에 틀림없습니다. 적어도 이 찬송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나의 애창곡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 예배시간에 교인들과 함께 찬송 390장(옛 찬송가로는 444장)은 부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좋아하던 찬송이었기에 눈을 감고 음미하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4절 즈음에 가서 내가 알고 있었던 가사와 다르게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교회당 앞면 스크린에 보이는 찬송가 가사를 자세히 보았습니다. 헐, 내가 외우고 있었던 가사(440장에서)가 개정된 통합 찬송가에서는 바뀌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서는 무슨 문제인데 뭐가 그리 대수냐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문제입니다만, 다시금 신학적으로 생각해 봄직한 “꺼리”이기에 이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찬송가 4절을 보면

           예전 가사(444장)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 이별 할 때에 지옥의 권세 이기네.”

           한편 통합찬송(390장)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 이별 할 때에 마귀의 권세 이기네.”

 

“지옥의 권세”를 “마귀의 권세”로 바꾼 것입니다. 왜 바뀌었는지 찬송가 개정 위원회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변경이 내겐 좀 아주 많은 아쉬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이 구절 다음에 바로 나오는 구절에는 “천국”(하늘 왕국, 하나 나라)이란 용어가 나옵니다. “이 세상 이별할 때에 지옥의 권세 이기네, 천국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거느리시네.”(444장 4절)

 

찬송도 시이기 때문에 시를 지을 때는 일종의 평행법(parallelism)을 사용할 것이고, 따라서 “천국”과 대조되는 용어는 “마귀”가 아니라 “지옥”(혹은 음부)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통합찬송가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냥 지옥으로 두지 왜 마귀로 바꾸었는지!

 

천국이나 지옥은 모두 “권력”(the powers and authorities)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천국은 생명이 지배하는 곳, 지옥은 죽음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천국은 광명이 지배하는 곳, 지옥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종종 “음부”로 대체됩니다. 예를 들어 마태 16장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해 하신 말씀가운데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가 있습니다. 영어로 Hades나 Hell로 번역이 되어 있는 음부는 보통 “어두운 곳”으로 알고 있지만 한자어로는 음부(陰府)입니다! 암흑의 관청이 있는 곳, 어둠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짧게 이야기해서 무시무시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음부의 권세”에서 “권세”는 원래 헬라어로 “대문” “성문”입니다. 군주가 좌정하는 군사 요충지라는 뜻입니다. 이것 역시 구약의 거룩한 전쟁 전승을 엿볼 수 있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어쨌건 찬송가 가사에서 “천국”에 대칭되는 개념은 통합찬송의 “마귀”보다는 “지옥”의 권세 (혹은 음부의 권세) 문구가 훨씬 좋다고 생각이 듭니다.

 

 

추신: 찬송가 영어 원본에는 전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은 알립니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는 한글 찬송 번역의 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힙니다. 통합찬송가 390장(옛 찬송가 444장) 4절은 이렇습니다.

 

           “And when my task on earth is done,

            When by Thy grace the victory’s won,

            E’en death’s cold wave I will not flee,

            Since God through Jordan leadeth me.”

 

          “이 땅에서 나의 임무를 마쳤을 때,

           당신의 은혜로 승리를 얻게 되었을 때

           심지어 죽음의 냉기에도 나는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아멘!

 

[Sunset from St. Joseph Lighthouse in Michigan... photo from Linlin Smith]

Sunset from St. Joseph Lighthouse in Michigan... photo from Linlin Smith.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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