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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셔널 교회”(Missional Church)

 

최근에 들어와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 조금은 낯 설은 용어가 자주 눈에 띈다. 이름 하여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라는 용어다. 이 용어는 미션(Mission)이란 용어 때문에 주로 선교학 분야에서 많이 논의되어 왔고, 또한 실제적으로는 교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현장의 교회론과도 연관이 있다. 또한 이 용어는 전통적인 교회인 제도적 교회”(ecclesiastical church)와 대조적인 개념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교적 교회라고 번역하는 모양인데 설명이 한참 필요하다.

 

전통적인 교회론인 제도적 교회”(ecclesiastical church)는 지난 2천년동안 서구의 기독교(christendom)를 대표하는 교회의 모습이었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상관없이 제도적 교회는 직제중심이고, 목회자 중심이었고, 가시적 교회 중심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기존의 교회가 중심이 되어 사람들이 교회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그들을 복음으로 가르치고 양육시키고, 교회의 제도 안에 책임성 있는 멤버로 만들어가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이 일을 위해 교회의 모든 기관들과 제도들이 필요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먼저 있는 것이고, 그 교회로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하는 순서였다.

 

이와는 반대로 미셔널 교회”(missional church)는 기성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복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만들어가는 교회론이라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선 미셔널 교회를 문자적으로 선교적 교회라고 번역하는 것 같다. 선교하는 교회라는 뜻이다.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열풍이 불면서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라는 식의 과도한 발언들도 이어졌다. 특별히 교회성장 침체기에 들어선 한국교회에서 교회침체 탈출 방편으로 선교적 교회론을 전통적인 제도적 교화론의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교회론 대 선교적 교회론의 프레임 논리는 정당하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먼저 용어 해설을 해 보자. “미셔널”(Missional)이란 용어의 미션”(Mission)은 단순히 선교로 이해해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초적 영어를 알다시피 Mission은 기독교적 용어로 선교(宣敎)”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일반적 의미는 사명(使命)”이다. 맡겨진 임무라는 뜻이다.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가리켜 미션(Mission)이라 부른다. 여기서 미션은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는데, 첫째는 임무를 맡겨주어 보내는 자”(sender)가 있고, 그 임무를 맡아 실행하기 위해 보냄을 받는 자”(sendee)가 있고, 마지막으로는 임무 자체가 있다. 이것을 성경이야기와 기독교신학에 적용한다면, 보내는 자는 하나님이시고 보냄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임무 자체는 복음이다. 그리고 임무가 실행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삼위일체적 작업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명”(라틴어 Missio Dei, 영어로 Mission of God)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셔널 교회”(Missional Church)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초기 교회를 기억하게 해주는 교회이어야 한다. 이게 뭔 말인가? 성경전체는 인간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피조세계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경륜)이 주된 스토리라인을 이루고 있다. 일명 회복프로젝트라고 부르는 피조세계와 인간 구원을 위해서 누군가를 보내야했으며, 보냄을 받는 자들은 언제나 사명(mission)감을 가지고 그 일에 종사해야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들”(sendee)자들이었다. 그들의 입은 자신들을 보내신 분의 복음을 말하였는데, 그들이 가지고온 복음이란 집을 떠나 먼 곳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영원의 집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외침이었고, 그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구약의 이야기는 반역하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최후의 통첩으로 보내신 성육신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아들이신 예수는 이처럼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 사명이란 죄악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악한 습성으로 인해 망가지고 일그러진 피조세계를 온전하게 회복시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에게 사명을 주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시게 된다.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금 사명을 주어 보내신다. 제자들 역시 교회를 통해 다시금 예수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일을 계획한다. 교회 역시 그의 구성원들에게 복음전파라는 사명을 주어 세상으로 보낸다. 언제까지? 세상의 끝이 올 때까지! 어디까지? 땅 끝까지!

 

보다시피 성경의 거대 내러티브는 보내시는 이(sender)와 보냄을 받는 이(sendee),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mission)가 있으며, 이러한 운동과 움직임이 성경 전체에 걸쳐 감지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선(動線)이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는 곳이 성경이다. 이처럼 성경전체의 내러티브는 미셔널 교회론을 지지하고 있다. 달리 말해 교회는 가만히 있어서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이것이 종종 제도적 교회가 잘못을 저지른 지점이다) 복음을 들고 이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클럽멤버처럼 끼리끼리 똘똘 뭉쳐서 자신들의 종교적 프로그램을 돌리고, 그리로 바깥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제도적 교회의 덩치를 불려가지 말고,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도록 밀어내 보내어야 한다. 사람들을 불러 들리기 위해 내어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구원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움직임이 미셔널 처치의 본질이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의 근본적 사명(mission)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기억해야 한다. 자기를 불러서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분이 성부 하나님이요, 그 사명을 죽기까지 성취하시려했던 보냄 받은 분 성자 예수님이 미셔널 처지의 모델이다. 아마 신약의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은 가장 잘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계속해서 자기의 제자들을 다시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초대교회가 숫자적 대 부흥을 경험하면서 가만히 안주하여 있으면서 내부적으로는 제도적 갈등이 있게 되자, 하나님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라는 강력한 바람개비를 동원하여 제도화되고 있던 교회를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지게 하셨다. 디아스포라 교회를 만드신 것이다.

 

달리 말해 구심력과 원심력이 물체의 균형과 중심을 잡게 하듯이,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심점으로 삼아 교회 바깥의 세상으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세상이냐고?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했던 세상,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죽기까지 내어 주실 만큼 사랑했던 세상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세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사람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은 온전히 회복된 자기의 세상을 갖게 되실 것이고, 그 세상을 영원토록 즐거워하실 것이다.

 

미션”(Mission)을 단순히 신학의 한 분과인 선교학에서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으로만 축소 환원하지 말자. 미션은 성경전체와 신학전체가 옹호하고 지원하는 방대하고도 광대한 성경신학적 개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적 운동과 움직임과 동선을 가장 잘 압축하고 있는 주제개념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을 우선시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복음이 자신의 세상 속에 온전하게 전달되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시고, 보냄을 받은 자는 죽기까지 그 사명과 임무에 충성을 다할 때, 비로소 지상 교회는 자연스레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게 된다. “미셔널 교회”(missional church)사명”(Mission)을 다하려는 교회다! 복음을 찾아가기 위해 교회가 어떤 형태를 가져야 할까 하는 논의는 이차적인 문제이어야 한다! 카페교회니 가정교회니 일터교회니 감옥 선교니 와 같은 논의는 모두 사명완수를 위한 원칙아래서 논의되어야 할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셔널 교회는 전통적인 제도적 교회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제도적 교회”(ecclesiastical church) 역시 이 십자가의 복음 전파 사명을 기억할 때만이 자기 위주의 고착화 된 기구로 전락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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