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가이사랴와 욥바에서 일어난 일”

행전 10:1-16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잠시 복습해 보겠습니다. 초기 기독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극심한 박해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하나인 사도 베드로는 좀 더 자유롭게 사방으로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9:32). 이전에는 사마리아 지역도 방문하였고(8:14이하) 지난 시간에는 룻다 지역에 가서는 애니아라는 남자 중풍병자를 고쳤고 그 후 인근 욥바 지역에 가서는 병들어 죽은 다비다라는 여제자를 살리는 기적까지 일으켰습니다(9:32-42). 마치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하신 일들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들이었습니다. 병을 치유하는 일과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사인(sign)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이적과 기적들 – 모두 사인들(signs)이었음- 의 목적은 사람들이 주님(예수)을 믿고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의 두 구절을 비교해 보세요.

 

       · 룻다와 샤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더라(9:36).

       ·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9:42).

 

지난 시간에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행선지는 욥바였습니다. 욥바에서 베드로는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아마 욥바에 있었던 교회 공동체 내에 무두장이가 있었는데 그가 자원해서 사도 베드로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섬겼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무두장이는 짐승의 날가죽에서 털과 기름을 뽑아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무두장이 집에 머문 일에 대한 학자들의 평가는 분분합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경건한 유대인은 죽은 짐승을 만지며 일을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두장이는 유대종교에서 부정(더러움)한 사람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가 그 집에서 유숙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보수적 입장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베드로의 넉넉한 마음을 가리킨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렇게 추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볼 때 부정한 집에 가서 여러 날을 지낸 사도 베드로의 너그러운 마음과 따스한 태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이방인 고넬료 사건을 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가 여기서 무두장이라는 직업을 특정해서 언급한 것이 그가 유대교의 관습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좀 지나친 해석인 듯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의 심경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욥바의 그리스도인이었던 무두장이 시몬의 헌신적 섬김에 초점을 두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생선과 손님은 삼일만 지나면 냄새가 난다는 속담을 생각해 보면 시몬의 섬김은 그의 직업이 풍기는 냄새와는 달리 아주 많은 향기를 느끼게 합니다.

 

[항구 도시 가이사랴]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욥바에서 해안선을 타고 50킬로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이사랴(Caesarea)라는 해안 도시가 나옵니다. 가이사랴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관장하는 로마 총독 관저가 있었고 로마군 수비대의 주둔지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은 스트랜톤 타워라는 이름의 아주 초라한 해양기지였지만 헤롯 대제(주전74/73년 ~주전4년/주후1년)가 로마제국의 첫째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Caesar, 주전 63년–주후 14년, 카이세르[라틴어발음] = 시저[영어발음] = 가이사[한글발음] = 카이저[독일어] = 차르[러시아]는 모두 “황제”라는 뜻입니다)를 기념하여 대대적인 공사 발주를 했습니다. 멋진 항구와 항만시설을 구축하였고, 시장과 대형 창고들과 가계들, 도로들과 목욕탕들과 신전들과 거대한 공공건물들을 지었으며 또한 도시 이름도 가이사랴로 바꾸었습니다(주전 25–13년)]

 

가아사랴의 이방인 고넬료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 군대에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군인 100명 정도를 통솔하는 로마군 지휘관으로 한국군으로 따지자면 중대장 정도의 계급입니다. 그에 대한 누가의 평가는 아주 좋습니다.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답니다(2절). 이런 평가를 통해 우리는 그의 종교적 성향과 신앙심에 대해 몇 가지 특이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로마인입니다. 그것도 해외에 파견 근무하는 로마 군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종교적으로 경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그가 유대교로 온전히 전향한 개종자는 아니었지만 – 유대교로 개종하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의 조항들을 철저히 준수해야만 했습니다. – 유대교 회당 집회에 참석하고 토라의 규범에 따라 살아가려고 무던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은 유대인들에겐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교 회당에 다니고 토라를 깊이 공부할 뿐 아니라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고넬료는 복음을 받아들여 자라게 할 만한 “좋은 마음 밭”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음 밭이 비옥하려면 평소에 밭 관리를 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딱딱한 땅을 갈아엎고(기경, 起耕) 써레질을 해서 흙을 보들보들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정성껏 씨앗을 뿌립니다. 게다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마가 4장의 씨 뿌리는 비유를 기억하세요) 참고로, 구약의 선지가 호세아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起耕, 논밭갈이)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10:12)

 

그의 경건성은 자기에게 속한 가족 식구들과 가까운 친구들과 부하들과 하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사실에 잘 드러납니다. 이것은 그가 평소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경건성은 내면적 성향으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바깥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고넬료의 경건성은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백성이라 함은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점령군의 장교가 자기의 재물로 식민지 백성들을 섬겼다는 사실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선행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적으로(항상)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꾸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더듬어 살피고 그분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식민지의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을 대놓고 욕하거나 저항하지는 못했어도 속으로는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이방인인 로마군대의 장교 고넬로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구제하며 섬기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기도생활을 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큰 부끄럼을 느끼게 합니다.

 

옥토가 준비되었다면 이제 비가 촉촉이 내릴 시간입니다. 고넬료가 기도하는 시간에(오후 3시경)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런 말을 전합니다. “네가 드린 수많은 기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 선물들(구제)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4절). 이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고넬료가 드린 기도들과 구제들이 하나님께 “기념 헌물”(memorial offering)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념 헌물”이라고 한 이유는 구약의 제사제도를 알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 제사들 가운데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곡물 제사”(grain offering)가 있습니다.(레 2:2,9,16) 한글 성경에는 “소제”(素祭)로 번역되었습니다. 곡물로 드리는 소제의 제물은 일종의 “기념물”(memorial)로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여삐 보시고 그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립니다. 이런 배경에서 한글성경은 고넬료가 드린 “기도들과 구제들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곡물제사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곡물들은 무엇인가를 기억나게 하는 “기념물”(히, 지카론)이 되어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처지와 형편을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실까 생각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일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믿어지면 “아멘”이라고 해 보세요.

 

고운 흙, 옥토, 부드러운 토지, 착한 마음, 경건한 삶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사도 베드로를 모셔오도록 명하십니다. 명에 따라 고넬료는 하인 두 명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 하고 욥바로 보냅니다(8절).

 

욥바의 사도 베드로

 

한편 욥바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가이사랴에서 고멜료를 찾아가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그 다음 날 정오에 지붕에서 기도하던 베드로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적어도 세 번씩 기도시간을 갖습니다. 아침기도 오후기도 저녁기도입니다(참조, 시 55:17; 단 6:10). 또한 유대인들의 집 구조에서 지붕은 평평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장소로 적격이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분명 열심히 기도했을 겁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얼마 후 시장 끼를 느껴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유숙하던 집의 사람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베드로는 황홀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사실 그가 본 것이 아니라 그에게 보인 것입니다. 환상은 종종 계시의 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매우 괴이하고 신기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엄청 큰 보자기가 활짝 펼쳐진 채로 내려오는데 네 귀퉁이가 동서남북 사방에 걸쳐있었고 그 안에는 네 발 가진 모든 동물들과 땅의 파충류들,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괴이하고 신기한 광경입니다. 그 때 소리가 들려오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것입니다. 헐!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베드로의 반응은 역시 아직도 유대교적 반응이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것들은 부정한 동물들이니 먹을 수가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배가 고프면 먹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종교제도가 규례를 만들어 어떤 것은 부정하고 어떤 것은 정결하다고 한 것이지, 어떤 물건이나 생물 자체가 정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종교성에 갇힌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두 번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깊이 명심해야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절). (참고로, 마가 7:15,17과 롬 14:14를 읽고 묵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창조하셨던 “모든 것들”은 다 깨끗하고 정결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나뉨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에서 종종 사용하는 말 중에 “우리는 선한 창조(good creation)를 믿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고(참조, 창 1장)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나쁘다고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은 사람이 나누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후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명하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하셨으니, 사람이 한 몸을 나눠 둘로 만든다면 그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거꾸로 말해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영적 종교적 장벽들을 허물어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창조 기사의 깊은 의미를 살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황홀한 환상을 통해 아주 소중한 신호(sign)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부정하다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이방인들도 유대인인 너 베드로와 똑같은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에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민이나 노예민이나, 남자나 여자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한 백성이라는 사실(갈 3:28)을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베드로에게 가르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 번해서 못 알아듣고 거절하자 하나님은 세 번씩이나 다시금 반복해서 베드로를 가르치시고 설득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은 베드로가 본 환상과 고넬료가 본 환상이 서로 상응하게 하셨습니다. 둘 다 기도 시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에 비하면 유대인 베드로는 더 많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반복해서 옹 좁은 유대주의의 세계관과 신학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폐쇄적인 신학체계의 동굴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동굴바깥으로 나오라. 단단한 껍질을 부셔라. 팔짱을 끼고 있던 손과 팔을 활짝 벌려라. 욥바를 떠나라. 이방인들 안으로 들어가라. 그들을 양팔로 안아 받아들여라. 낯선 사람 고넬료에게 가라. 이방인과 교제하면 내가 부정하게 된다는 그 꼴통 보수적 편견과 아집을 깨뜨려라. 너는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요즘 신학계에서 회자되는 “미셔날 교회(missional church)”의 모습입니다. 오라고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찾아 가는 교회 말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들을 넘어서 가는 교회입니다. 사명을 갖고 어디든지 찾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베드로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성령에 지시를 따라 욥바에서 일어나 가이사랴로 떠나게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늘은 하나님이 매우 분주한 날이었습니다. 욥바와 가이사랴 두 곳을 다니시면서 정말 많은 일을 하신 날입니다. 하나님의 열정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어둠 가운데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베드로가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여러 날 머물렀다”(9:43)는 기사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2. 욥바의 여제자 다비다(9:36)와 가이사랴의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의 삶(10:2)에 대한 묘사를 비교하면서 “경건하다”는 말의 뜻을 설명해 보세요. 혹시 야고보서 1:26-27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3. 고넬료의 경우 “경건함”과 “기도생활”에 어떤 연결점이 있지는 않을까요? 참고로, “항상 기도하다”(10:2)는 문구는 본래 “지속적으로 기도하다” “끊임없이 기도하다”입니다. 끊이지 않는 기도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이것과 실제 삶에 나타나는 선행들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4. “심성(心性)이 착하다”, “마음 밭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마음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참고해 보세요. 아니면 “마음의 습관”(habits of heart)이란 문구를 곱씹어 보세요.

 

5.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해 왜 심한 거부감을 가졌나요? 그는 환상의 의미를 알았나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왜? 

 

6. 베드로가 벗어나야 할 동굴은 무엇이었습니까? 혹시 여러분에게는 어떤 동굴이 있습니까? 왜 그 동굴에서 못 벗어나나요?

 

7. 본문에서 “미셔날 교회”를 찾아볼 수 있나요? 어떤 차원에서 가능할까요?

 

8. “복음은 수많은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는 말에 대한 좋은 실례들을 성경에서 찾아보세요. 예를 들어, “경계선을 넘는 예수님”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얼어붙은 하늘과 땅", Grand Rapids, MI. 강영안 교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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