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회중 찬송의 회복은 예배 회복으로 가는 첫 걸음이어라!”

 

 

아마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목회자나 신학생들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의 신앙을 세워주고 양육하는 일에 매진하는 일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참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들의 생각 언저리에는 교인들이 말씀을 잘 들으면 신앙이 굳건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이 연구하고 열심히 준비한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양육되어 질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양육되지 않고서 신앙의 양육을 위한 어떤 다른 길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생겨납니다. 목사나 전도사들은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려 들 때"가 많다는 아쉬운 현실입니다. 자기들의 전공인 말씀해석과 설교에 자긍심이 넘치다보니 때론 “말씀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라고 교인들을 윽박지르기까지 합니다. 성경에 대해 무식하면 천국입시에 떨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드문 경우이기를 바라지만 고압적으로 교인들에게 “말씀중심”을 외치지만 실상 본인들은 별로 말씀의 체화된 삶에서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모르면서 말입니다. 교인들은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들만 모르면서도 본인들은 마치 신앙에 굳건히 서 있기나 한 것처럼 말입니다.

 

*****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 성경학자로서, 또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영혼 없이 외치는 100편의 설교보다 한 편의 생생한 회중 찬송이 얼마나 내 신앙에 힘을 주며, 때론 얼마나 강력한 위로와 위안을 주는지 측량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교인들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자의 말씀 선포를 통해 은혜를 받고 힘을 얻는 일도 있지만, 신앙 공동체 회중들이 함께 찬송할 때 얻는 “하늘위로”는 더할 나위 없는 은혜의 폭포일 때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쌍방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인 설교가 있다면, 그 하나님에 대하여 응답하고 반응하는 찬양과 기도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예배의 “공동체성”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이런 쌍방적 통로가 예배의 중요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예배들은 교파를 막론하고 소위 말씀 중심이라는 미명아래 – 사실 이것은 목사들 주도의 예배, 설교자 주도의 예배의 특징 – 교회구성원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함께 기도하는 신앙 표현의 사회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선 회중찬양도 예배의 변두리로 밀려났습니다. 온 성도들, 회중 전체가 목소리를 높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그들의 애환과 고통을 곡에 실어 하나님께 함께 호소하는 “회중 찬송”이 실종된 것입니다. 오히려 찬송을 특정한 개인이나 그룹에게 맡기는 요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예, 홍해를 넘자마자 홍해 반대편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은 함께 찬송하였다. 출 15:1-18, 일명 모세의 노래; 산약성경에 들어있는 그리스도 찬미시들, 예, 골 1:15-20; 빌 2:6-11)

 

1980년대에 한극교회에 불어 닥친 “경배와 찬양”은 찬양사역자 혹은 예배사역자란 독특한 직함을 만들어내었고, 각 교회마다 앞 다투어 찬양과 경배 팀들을 구성했습니다. 그들은 예배당 앞에 나와 찬양을 인도하며 소위 현대적 예배(사실 미국의 대중적인 복음주의 교회들)를 시연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찬양의 리듬감에 청년들은 열광하였고, 인도자들은 때론 발라드풍의 감성적 체임버 뮤지션들처럼, 때론 거룩한 디스코택의 리더들을 방불케 하였습니다. 한편 조금이라도 나이가 있는 중장년층 교인들은 예배자가 아닌 공연장의 관람객으로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도무지 따라 부를 수가 없습니다. 숨도 차고, 웬 그리 엇박자 곡들이 많은지요. 발라드 가수들이 혼자 부르기에 적합한 곡들, 어느 한 개인이 특(별찬)송으로 부르기에 적합한 그런 곡들이 대부분이었고, 시간과 세월의 검증을 받기에는 너무 급변했습니다. 이러다보니 예배의 공공성은 사라지고 음악적 탤런트가 있는 특정 사람들의 공연이나 연주가 되어버린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세대 간의 단절이 심한 사회에서처럼, 찬양의 경우 교회 내에서도 세대 간의 단절이 심화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공공 예배에서의 회중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특별히 찬송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회중찬송(congregational song)의 회복이 시급하다는 말입니다. 예배시간에 온 회중들이 함께 전심으로 같이 찬송을 부른다는 뜻의 회중찬송입니다. 목회자들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기에 자기들이 하는 설교의 중요성에는 강조하면서도, 신앙생활에서의 특별히 공중 예배에서의 찬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문외한들이 많기 때문에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예배신학에서 말씀선포와 함께 찬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인식한다면 찬송 부르는 일에 대해 결코 방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성가대는 미국에서 수입한 상품입니다. 유럽의 교회들에겐 특정한 사람들이 찬양을 한다는 전통보다는 모든 회중들이 함께 노래한다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성가대나 경배와 찬양 팀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특정한 그룹들(성가대나 찬양과 경배 팀이나 찬양사역자들)들에게 전속되었던 찬양과 찬송을 회중에게 되돌려야할 때입니다. 예배에서 회중들은 함께 목소리를 높여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회중 찬송, 회중 찬양. 신앙의 공동체성의 표현입니다.

 

*****

 

아래에 첨부한 동영상을 통해 “회중찬송”의 감동과 위력을 경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동영상은 영국의 전형적인 회중찬송 집회 영상인데,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한 회중이 되어 함께 찬양하는 것을 보고 소름끼치는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의 영적 기관에 고장이 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저 구름 같은 증인들의 일원이 되어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른다면 얼마나 큰 힘과 위안과 용기를 갖게 되겠는지요! 어느 곡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함께 신앙 고백적으로 노래할 수 있는 곡이라면 좋겠습니다. 아마 세월의 검증을 받은 곡들이면 좋겠지요. 어쨌든 우리 한국교회도 회중 찬송의 힘을 되찾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좀 길더라도 따라서 부를 찬송이 많을 겁니다. 영어자막을 보실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다행이구요. 아니면 해당 찬송을 찾아서 한국어로 같이 불러도 큰 영적 체험(?)과 소름 돋는 은혜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보는 자에게 복이 있을찌어다!

 

교회의 영성 회복은 얘배의 회복에 있고, 예배의 회복은 회중 찬송의 재발견에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믿어지면 "아멘"하시오!

 

https://www.youtube.com/watch?v=jZsrLVAgunw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397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28
729 일상 에세이: “세상풍경 일화: 포장마차에서” [1] file 류호준 2018.12.05 489
728 “세계관과 나와 데이비드 노글” [2] file 류호준 2018.11.28 641
727 일상 에세이: “구치소 풍경과 영치금” [1] file 류호준 2018.11.23 557
726 시: “첨탑, 무덤. 하늘” file 류호준 2018.11.13 429
725 일상 에세이: “운명 위에서 썰매 타듯이” [2] 류호준 2018.11.09 628
724 일상 에세이: “한번쯤은 밤하늘 아래 앉아” [2] file 류호준 2018.11.07 462
723 일상 에세이: “좋게 말하다” [1] file 류호준 2018.11.06 424
722 일상 에세이: “감사하는 계절에” [3] file 류호준 2018.10.30 391
721 신앙에세이: “당신은 현대판 헤렘의 신봉자들인가요?” file 류호준 2018.10.24 387
720 부고: "하늘의 부르심은 받은 유진 피터슨 목사님" file 류호준 2018.10.23 463
719 일상 에세이: “신학생들이여, 제발 한국어라도~” [5] file 류호준 2018.10.17 752
718 일상 에세이: “가는 세월” [4] file 류호준 2018.10.12 413
717 신앙 에세이: “분깃”을 알고 계십니까? [2] file 류호준 2018.10.09 2126
716 시: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1] file 류호준 2018.10.08 634
715 일상 에세이: “자연을 사진에 담는 그리스도인” [1] file 류호준 2018.10.01 420
714 신앙 에세이: "당신은 성자(saint)입니까?" [1] file 류호준 2018.09.27 2736
713 일상 에세이: “인생은 견디는 거야! - 바이킹 유감” [2] file 류호준 2018.09.24 658
712 일상 에세이: “1 년짜리 유감” [2] file 류호준 2018.09.22 432
711 일상 에세이: “9.19 남북 정상회담을 보면서 스쳐가는 생각들” [2] 류호준 2018.09.19 335
710 신앙에세이: “거룩한 키스”라고? [1] file 류호준 2018.09.17 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