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베뢰아 사람들의 신학 방법]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바울이 한 말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행전 17:11)


베뢰아 사람들은 매우 흥미로운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들은 선물을 열어보는 어린아이의 흥분과 진지함을 갖고 복음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들은 것을 곱씹으면서 그것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탐구하였습니다. 마치 십대 딸을 둔 아빠가 딸의 데이트를 꼼꼼히 조사하듯이 말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들은 내용을 성경(구약)에 비추어 시험하고 확인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대단한 크리스천들이었고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좋은 신자들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특성들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좋은 크리스천이 되는 두 단계]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크리스천이 갖는 태도일까? 크리스천의 삶을 올바른 방향에 설정하고 세워가는 일을 하려면 하나씩 철저하게 시작해야합니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별하고, 먼저 해야 할 일들 가운데 단계를 밟아서 한 계단씩 올라가야 합니다.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지하실 기초를 놓기 전에 지붕을 먼저 얹을 수는 없습니다. 적절한 과정을 밟는 것이 좋은 크리스천의 특성들을 만들어가는 데 필수적입니다. 베뢰아의 크리스천들을 통해 이 과정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그들의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듣되 그냥 들을 것이 아니라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보통 크리스천들이 듣는 식으로 건성으로나 덮어놓고 들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메시아 안에 있는 구원을 선포한 메시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하여서만 구원이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히브리어인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용어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는 왕적인 인물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왕위에 오르게 될 때 그들 머리에 향유를 붓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는 “향유로 머리에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영광스럽고 권위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될 때 치루는 예식이었습니다. 어쨌건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메시아를 통해서 성취되는 구원에 대해 설교하였습니다. 물론 그냥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메시아(그리스도)를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였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선포하고 있는 이 구원의 소식을 귀담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채근(採根)하였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들었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방문 설교자가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는 다양한 뉘앙스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길이 있다면, 좋은 신학도가 되기 위한 길이 있다면, 좋은 신학을 하기 위한 길이 있다면, 먼저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듣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좋은 신학에 이르는 길은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환언하자면, 열정적으로, 간절하게 메시지를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적 자세는 무엇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 먼저 “받는” 자세입니다. “받아들이는 자세”(receptive posture)가 아름다운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가르치고 있는 이야기가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한편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기본자세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대표입니다. 놀랍게도 마르다는 종교개혁이전의 삶의 방식이고, 마리아는 종교개혁 이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아야하는 존재입니다. 그 다음에, 받은 것에 대한 반응(보은)으로써 우리는 그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가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다”는 표현은 선포된 메시지를 자신의 삶을 바꾸는 힘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냥 머리로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학적 정보들을 머릿속에 축적하였다는 뜻도 아닙니다. 요즈음 신학교육이나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이 이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한갓 쓸데없는 걱정(杞憂)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학자들은 누구보다 더 변화된 마음들이 필요합니다. 복음에 의해 삶이 변화되고 완전히 바뀐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변혁이 되어야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확신시키거나 믿게 할 수 있는 신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이야말로 이 세대가 제기하는 영적 이슈들을 이해하고 그 이슈들에 대해 올바로 대답할 수 있는 신학입니다. 요약하자면, “메시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건전하고 건강한 크리스천이 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한 것을 그들의 성경으로(구약성경) 시험해봤습니다. 즉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를 구약성경의 빛 아래서 확인해 본 것입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즉 성경의 빛 아래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한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마음을 열고 기꺼이 배우고 들으려는 자세로 임하였다는 것은 그 말씀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자세하게 살피는 조사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자세하게 살피는 조사관이란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진짜로 예수의 증인인가 하는 점을 살폈다는 말입니다. 들리기에는 매우 교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누가가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 중심적 증언인데, 이 증언을 구약성경의 빛 아래서 평가하였다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을 것입니다. 구약을 신약 성경의 빛 아래서 조사하고 평가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 오는 구원을 선포하는 메시지는 믿으면서 하는 조사를 통해서, 그러면서도 자세하고도 비평적인 조사를 통하여 확증되었습니다.
  
이것이 베뢰아 사람들이 밟았던 두 번째 단계였습니다. 여기서 메시지를 조사하고 시험해보고 증명해보는 일은 신학적 활동에 있어서 정당한 단계입니다. 아니 정당한 단계를 너머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적 단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메시지를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 먼저이고 그 다음 단계로 비판적으로 자세하게 조사하고 반추하고 묵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 활동했던 신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Credo ut intelligam”이라 불렀습니다. 이르자면 “나는 믿습니다. 내가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I believe in order that I may understand). 요즈음 말로 하자면, 덮어 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어놓고 보고, 메시지를 들을 때는 왜 그런가하여 믿는 마음으로 날마다 그 말씀의 뜻을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고, 이것이 좋은 크리스천들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신학 하는 방식은 이처럼 두 단계를 거친 것입니다. 매우 올바른 순서였습니다. 먼저는 그 말씀을 믿고, 메시지를 믿고, 그 다음에 그것을 자세하게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베뢰아의 크리스천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베뢰아의 크리스천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주변에는 차디찬 신학, 이성적인 신학, 객관적인 신학, 죽은 신학이 항상 신학교와 교회의 주변에 서성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사람을 이런 신학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신학자들에게 불행이 있을지어다! 그러나 또 다른 반대쪽의 시류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에 의존하고, 자기주장만을 앞세우고, 주관적이고 머리는 비어있는 상태로 기독교를 제시하는 신학 역시 위험합니다. 그런 신학은 최상의 고기를 교인들에게 먹이는 대신에 싸구려 비지떡을 먹이는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서 강하게 걷고 튼튼하게 성장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최상의 고기를 먹이시기를 그의 종들에게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싸구려 음식과 영양가 없는 것들로 먹이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두 가지 형태의 신학은 모두 베뢰아 사람의 기준에서 볼 때 함량 미달입니다. 둘 다 왜곡된 신앙행태입니다. 현금 우리 교회들과 신학교에 이런 두 가지 형태의 신앙이 편만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때입니다.

행전 17:11이 보여주는 신학은 균형 잡히고 온전한 형태의 신학입니다. 이런 신학을 생산하는 신학자는 건강한 사람이고, 이런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건강한 신학생이 될 것이고 이런 신학을 지닌 목회자는 회중들을 양육하는 설교와 목회적 돌봄을 실행하게 됩니다. 이런 신학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재촉하는 복음 전도와 예배를 자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령의 사역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영적 교훈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그들의 주님과 지속적으로 언약 안에서 교제 하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대표하고 가르치고 선포하는 생명의 뿌리에서 스스로를 잘라버리는 일이 됩니다. 그들의 고백은 진정성이 있어야합니다. 그들의 고백은 새로운 삶 속에 뿌리를 내려야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여 신앙의 확실성을 드러내야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다른 가르침은, 이러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항상 조사하고 분석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물려받은 전통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조사관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런 행동 없이 개혁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개혁하다”(Semper reformanda)는 구호는 신학자들과 목사들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들은 종교적 일들, 그들이 전해 받은 종교적 일들, 그들이 본 종교적 일들을 그냥 넘기지 말고 자세하게 살펴 조사하고 시험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진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예언자들로, 제사장들로, 왕들로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임무를 위탁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한 가지 사실은, 주님 안에서 살면서 이렇게 비판적으로 살 때에, 성경 말씀이 언제나 그들이 기대야할 최종적 권위여야하며, 성경만이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상소할 유일한 대법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뢰아 사람들의 신학, 그들이 추구한 신학방법론이야말로 최상의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8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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