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부활절 그 이후”

2009.04.19 13:58

류호준 조회 수:15287

“부활절 그 이후”

요한복음 20:26-29

[성경본문]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설교전문]

Low Sunday

오늘은 부활주일 후 첫 번째 맞는 주일입니다. 아직도 부활의 계절입니다. 영어로 부활의 계절을 이스터타이드(Eastertide)라 하는데 Easter(부활절)와 Tide(조수, 흐름)의 합성어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물결을 이루어 조수처럼 밀려들고 있는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부활의 절기(Eastertide)는 일반적으로 부활 주일부터 성령 강림절까지의 50일간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부활절은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회가 지키는 절기 중에 쌍벽을 이루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 두 절기 중 어느 것이 더 크고 중요한 절기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신학적 중요성에 있어서는 막상막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계절 성탄절은 우리 마음에 큰 안위와 감동을 줍니다. 물론 적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심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산타 크라우스의 방문과 오버래핑하면서 헷갈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어 우리의 친구와 이웃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감동과 위로가 어디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부활절: 한편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mortal being)로서 인간의 영원한 숙제요 고뇌인 죽음을 죽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이야 말로 진정으로 왕의 축제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희망에 대한 확실한 담보입니다. 어쨌거나 두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시작’과 ‘절정’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부활절 주일이후 첫 번째 맞는 주일을 가리켜 외국에선 Low Sunday라 하는데 ‘낮은 일요일’, ‘저조한 일요일’, ‘가라앉은 일요일’, ‘침울한 일요일’이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주일이 함의하는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지은 용어 같습니다. 부활주일 이후 첫 번째 맞는 주일을 ‘낮은 일요일’ 혹은 ‘저조한 일요일’이라 하는 이유는 부활절의 즐거움과 벅적거림과 흥분과 준비로 가득했던 활기는 가버리고, 더욱이 부활주일의 높았던 교회 출석률이 그 다음 주일에는 급격히 감소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합니다. 출석률이 ‘저조한 일요일’이라는 뜻이겠지요. 서양 교회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명칭 같습니다. 서구인들은 전통적으로 기독교문화권 안에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에 교회를 마치 가까운 친척집이나 되는 듯 생각합니다.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더라도 종교세를 냅니다. 마치 문화재 관리비로 사용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금으로 목회자들의 사례금이 지불되고 교회가 운영됩니다. 어쨌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아마 평생에 세 번 정도는 품위 있게 교회에 출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세례식장으로, 성인이 되어 결혼식장으로, 죽어 장례식장으로 교회당에 출석합니다. 일 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 정도는 교회에 나가주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마 단순히 출석률이 ‘저조한 일요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수난주간과 부활절의 각종 의식과 집회와 예식들이 다 끝난 다음의 허전함과 조용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가라앉은 일요일!’ 아주 적절한 이름입니다. 세차게 달리던 차의 기아를 하단으로 낮추듯, 분주함을 멈추고 생각해 보는 반성과 성찰의 기간으로서 ‘차분한 일요일’이라는 뜻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지난 주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상상치 못한 그 날의 그 일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향해 가야하는가? 따라서 부활절에 관해 두 번 다시 생각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회상과 반성을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최초의 ‘가라앉은 일요일’(Low Sunday)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부활 후 첫째 일주일이 되던 날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한 도마를 위한 일요일이 된 것입니다. “도마를 위한 일요일!” 사실 부활 주일 이후의 모든 일요일은 도마와 같은 제자들을 위한 주일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한 날입니다.

도마를 기억하십니까? 도마를 아십니까?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교회는 도마에게 특별한 별명을 주었습니다. ‘불신하는 도마’(unbelieving Thomas)가 아니라 ‘의심하는 도마’(Doubting Thomas)이라는 호칭입니다. “예수의 못자국난 손바닥을 내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예수의 창 자국 난 그 옆구리에 내 손을 집어넣어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을 것이라”(20:25)라던 도마 말입니다.

도마를 생각하는 날

오늘은 특별히 도마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 첫 번째로 맞이한 일요일 저녁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면서 도마를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활절 기사를 읽을 때마다 종종 간과되는 일이 하나있습니다. 놀랍고 기이하고 가슴 떨리는 부활절 기사 안에는 놀랍게도 회의주의(懷疑主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의심하는 사람들, 의아해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이른 아침에 예수의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빈 무덤에 대해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정신 나간 소리’니 ‘헛된 이야기’하면서 일축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얼빠진 여인들의 일시적 환상이나 착각이라고 하면서 그녀들에게 부끄럼을 주었습니다.

부활절 기사 안에는 깊은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와 패배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제자들이라고 자처하였지만 진정 예수가 누구신지, 왜 그가 그러고 다니셨는지, 무엇을 위해 태어난 분인지, 심지어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헷갈렸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려움과 깊은 의심에 사로잡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겠습니까? 사실 두려움과 의심은 스스로 안에서 걸어 잠근 문과 같습니다. 그들은 의리와 연대감으로, 종교적 의무감으로, 혹은 정의감으로 모여 있는 집단이었고, 예수의 윤리와 도덕과 기적들에 대해서는 동의 하였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예수가 진짜 누구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죽어가야 하는 비참한 운명(mortal being)을 구출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죽음에 내어놓아 죽음으로 죽음을 죽이고,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 뜻을 그들은 너무도 가볍게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부활절의 제자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리에 모여든 제자들에 관해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 후 제자들이 갈릴리로 갔다. 예수를 보고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의심하였다”(마태 28:16-17)

부활을 의심한 것은 도마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계속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부활주일 후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 또 다른 주일에, ‘낮은 일요일’에, ‘저조한 일요일’에, ‘가라앉은 일요일’, ‘침울한 일요일’에 이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 모든 신자들이 항상 ‘믿는’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 우리는 신약교회의 초창기부터 의심과 믿음이 공존하고 혼재하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매주일 마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것은
  ․ 우리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 오히려 의심과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매주일 마다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모이는 것은
  ․ 우리의 깊은 의심마저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9)는 약속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약속, “내가 이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을 것”(마 28:20)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은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너는 보는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내 발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서는 것입니다.

말씀(예수)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주일마다 예수는 ‘의심하는 도마들’을 찾아오십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도마처럼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의 몸을 실제로 보지도 않았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 부활의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 한 곳에 모였습니다. 문들을 걸어 닫고 모였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이 마리아의 급한 전갈을 받고 예수님의 무덤에 가보았던 베드로와 요한도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이 비었음을 발견하고는 한편으로는 부활을 믿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혼란스러워 집으로 돌아갔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부활의 저녁에 예수께서 닫힌 문, 걸어 잠근 문, 의심과 두려움으로 닫은 문들을 통과하여 그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샬롬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그때서야 제자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극적인 현장에 도마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로 그 모임에 빠졌는지 궁금합니다. 26절에 다시 부활 후 여드레를 지나 제자들이 다시 집에 모여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적어도 그들은 정규적으로 모였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을까? 도마를 의심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 집안에 급한 일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결혼이나 장례나 아니면 다른 급한 용무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 좀더 개연성이 높은 추측은 금요일에 있었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너무도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집에 돌아갔나 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다른 제자들은 다 함께 모였는데 그곳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봐서 그럴 것 같다고 추측됩니다.
   ․ 그는 금요일로부터 시작한 의심과 갈등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심과 회의는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두 눈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보인 강경한 태도에서도 확인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5).

누가 도마입니까? 누가 의심하는 도마입니까? 제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의 제자들 중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일수도 저 일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의심하는 도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신자는 없습니다. 의심하는 도마들은 현대적으로 말해 실증주의자(實證主義者)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유물론자들이기도 합니다. 실증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고 만지고 느낄 수 있어야 믿겠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입니다.

      ․ 무너진 회사가 다시 살아나고,
      ․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 병든 몸이 벌떡 일어나야만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야 하나님의 현존(現存)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의심으로 찌든 우리들에게, 한편으로는 믿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말씀)는 찾아오십니다. 마치 파도가 세차게 치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걷는 베드로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힘차게 발을 떼기는 했지만 곧 두려움과 의심 때문에 시퍼런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 말입니다. 그런 의심하는 베드로와 도마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오시고 계신 것입니다. 의심하고 갈등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를 위해서 기꺼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 그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서 먼 산중을 찾아 나서는 분이십니다.
    ․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라도 그분은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 그분은 의심하고 냉소적이기 까지 하는 우리를 기꺼이 찾아오십니다.
    ․ 그분에게는 여러분은 매우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 어떻게 얻는 생명인데 포기하시겠습니까? 비싼 값을 주고 산 고귀한 생명이기에
       결코 저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오십니까?

     ․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오시고 계십니다.
     ․ 설교를 들은 후에 우리의 가슴 속으로 찾아오십니다.
     ․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은 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부활절 첫 주일의 ‘좋은 소식’, ‘희망의 소식’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오고 계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고 계신 것입니다.

     ․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과 안심(安心)을 선포하십니다.
     ․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새 생명의 활력을 주십니다.
     ․ 의심하는 자들에게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 손을 내미시고 내 손을 보라고 하십니다. 대못에 깊이 찔린 손바닥을 말입니다.
    ․ 악수를 청하십니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그 손을 붙잡으라고 하십니다.
    ․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십니다. 창에 찔려 피와 물을 다 쏟으신 
      그 구멍 난 옆구리에 손을 집어넣어 보라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친밀한 사랑의 초청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의 속살을 만질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입니다. 자기를 비워 우리에게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라는 말입니다.

    ․ 그런 주님이 정규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 아니 지난주일 여러분이 이런 저런 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지낸 것이
       안타까워 여러분만을 위해 따로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 고단한 인생길에서 정말로 새로운 삶은 가능할까 새로운 희망이 있을까 의심하고
      사는 우리 한 사람 개개인을 위해 매주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주일마다 뭐라고 고백합니까? 고백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 죽음과 의심이 생명과 믿음보다도 더욱 우리의 가까운 친구이며
    ․ 우리의 경험의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고 견딜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하지만

부활절의 소식은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하도록 움직입니다.

   ․  모든 것이 이치(理致)에 맞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  삶의 모순과 부조리와 난센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도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  우리의 죽음과 의심이 결코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렇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행복합니다! 믿음으로 보는 자는 행복합니다!

지금도 의심하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내민 손을 잡아보십시오. 그분의 체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여러분의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의심과 두려움의 늪에서 건져 내실 것입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희망을 그분께 두십시오. 믿지 못하는, 의심하는 도마의 입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란 절대적 호칭의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그분은 산 중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발견하시고 자기 어깨에 들쳐 메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을 보며 희망을 노래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찬 송]

"You Raise Me Up"


내가 깊이 낙심하여 침울할 때
내 영혼이 고단하여 피곤할 때
고난과 괴로움이 내 마음을 천근만근 누를 때
주님, 저는 여기에 가만히 있어 침묵하며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제 곁에 오셔 앉으실 때까지.

주님은 저를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저 높은 산들 위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저를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저를 들어 당신의 어깨 위에 두실 때 저는 강해집니다.
주님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저를 일으켜 올리십니다.

when I am down,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http://www.youtube.com/watch?v=RMtVaTJn7So 
http://www.youtube.com/watch?v=JJQxwSVqB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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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이후 첫째 주일에, 2009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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