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저만치 멀리 내다보세요"
                                                           마태 5:8; 21:1-11

                                                               [성경본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 5:8)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어린 나귀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어린 것을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마태 21:1-11)


                                                               [설교전문]

                                                                      I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 ‘종려(棕櫚)주일’(Palm Sunday)로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죽으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을 포함하여 예수를 따랐던 모든 사람들은 예수께서 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지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고 하기보다는 오해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이끌고,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치유하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폭풍과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이 이제 유대인의 영원한 성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그것은 멀지 않아 현재 로마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예수를 가까이서 따르고 보좌했던 사람들에게는 보상의 시기의 도래를 뜻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의 영웅이나 장군이 개선할 때 펼쳐지는 퍼레이드처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연도에 도열하여 열광하는 인파의 환호, 양손에 든 종려나무가지들의 펄럭이는 물결, 옷을 벗어들고 기뻐하는 군중의 외침으로 가득한 하루였습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의 시작입니다.  

이처럼 종려주일이라 하면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모든 길들을 뒤덮은 거창한 퍼레이드와 의복들과 종려나무가지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사건을 가리켜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이라고 부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대로, 승리의 입성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면서 발생한 사건이며, 무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소리를 지르자 온 도시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던 군중의 외침들이 온 하늘에 가득했던 사건이었습니다.

                                                                     II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고 이 모든 일들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때만 아니라 그의 생애의 첫 순간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한번 복음서 전체를 훑어보십시오. 예수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을 향한 행진은 마태 21장에서가 아니라 1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는 마태복음 내러티브 전체가 하나의 장엄한 “승리의 입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까이 가시는 것, 그것이 종려주일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종려주일은 그 날 단 하루가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처음부터 예루살렘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마태는 그의 복음서 첫 부분에서부터 독자들에게 알려줍니다. 여기 몇 가지 예를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헤롯왕이 동방에서 온 현자(賢者)들로부터 어린 아기 예수가 유대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태는 독자들에게 헤롯이 얼마나 놀랐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보고합니다. 예수님의 출생 소식과 아울러 예루살렘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마태는 사실상 독자들에게 한번 예루살렘을 바라보라고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이 어떤 도시인가? 예루살렘의 ‘길들’이 어디로 나있는가? 예루살렘의 길들을 따라 사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의 출생에 대해 반응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후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들어가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때에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그를 그곳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거룩한 도시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마태는 예수와 마귀뿐 아니라 독자들도 성전 꼭대기에서 다시금 예루살렘을 쳐다볼 기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곳 성전꼭대기에서 여러분과 나는 저만치 있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그 가운데 예루살렘의 ‘길들’이 어디로 났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살펴보라는 마태의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가 배반당하게 될 것이며 고난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고 세 번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의 수난을 예보한 세 번 중 두 번의 경우에 마태는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16:2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여러분과 나와 같은 복음서의 독자들과 우리 교회들에게 예루살렘을 쳐다보라고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태복음 21장의 서두를 보십시오.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왔을 때”란 구절로 시작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 매우 친숙한 구절이 되었을 것입니다. 종려주일에 읽는 복음서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민한 청중들과 조심스런 독자들과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막 ‘호산나’를 외치려고 모인 여러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좀 더 멀리 내다 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나귀나 어린 나귀, 아니면 이제 막 시작하려는 대규모 퍼레이드 행렬만 보지 말고, 퍼레이드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바라보십시오!” 다시 말해, 시야에 들어오는 예루살렘 길들만 말고, 그 끝 그 이상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래전부터 예루살렘 거리 저 끝 너머를 향해 걸어가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II
목회자와 생각하는 평신도를 위한 기독교 저널중의 하나인 미국의 [크리스천센추리](The Christian Century)에 작년 이맘 때 즈음, 프래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 글에서 뷰크너는 어떤 성공회 교회에서 열린 성탄절 연극(Christmas Pageant)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성탄절 성극을 하기 위한 무대가 교회당 단상에 차려졌습니다. 말구유가 강대상 한 복판에 자리 잡았습니다. 유년 주일 학교에서 준비한 성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먼저 장내를 가득 메운 교인들이 성탄 찬송 몇 곡을 불렀습니다. 그 후 목사님께서 성탄에 관계된 이야기들을 성경 이곳저곳에서 골라 낭독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무대에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할 순간에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성극 각본에 따르면 수십 명의 유치부 어린 아이들이 천사가 되어 등장하는 순서였습니다. 천사처럼 흰 가운으로 차려입고 날개를 달고 머리에는 헤어밴드로 만든 후광도 달고 부모들과 함께 교회당 좌석 여기저기에 앉아 있다가 등장해야할 순서가 되면 모두 벌떡 일어나 무대로 달려 나가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찬송을 합창하는 순서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한 어린 천사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일이 안되려고 했는지, 어린 천군천사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뷰크너에 따르면, “어린 천사들이 서로 좋은 장소에 서려다보니 너무 한곳으로 몰려들면서 난장판이 되었던”것입니다. 말구유에 태어난 어린 아기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을 가까이서 보려고 천사들이 좁은 무대 위에 몰려드는 바람에 생긴 불상사였습니다. 여자 아기 천사 하나가 무대에 간신히 올라오기는 했는데 무대 뒤쪽으로 밀려 나면서부터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게다가 치렁한 긴 옷이 앞뒤 다른 천사들의 발에 밟혀 움쩍달싹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무대 한 복판에서 무슨 장면이 진행되고 있는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발뒤꿈치를 들고 목을 내빼어도, 아무리 내다보려 해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도 무대 중앙의 말구유를 볼 수 없었던 우리의 불쌍한 그 아기 천사는 저 멀리 구석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안보여요!” “예수님을 좀 보여주세요.” “보게 좀 비켜줘요!”(let Jesus show!)  

                                                                     IV
공평하게 말해서, 복음서 본문은 일말의 성극(聖劇)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 마태복음에도 그렇습니다. 나귀와 어린 나귀 등 두 마리의 동물이 등장합니다. 길 위에 펼쳐진 것은 단순히 종려나무가지만이 아닙니다. 겉옷도 펼쳐졌습니다. 예언자도 등장합니다. 제자들도 가담하였고 군중들도 가장 친숙한 찬송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멋진 성극의 요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쨌건 성탄절 성극이나 종려주일 행렬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종려주일이 되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호산나)” 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퍼레이드의 변화는 있었지만 대대로 사람들은 종려주일 성극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성탄절 성극이나 부활절 성극과는 달리 종려주일 성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교회 가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나가서 종려주일 성극에 필요한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오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교인 숫자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의 경우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할 것은 그 어린 천사의 입에서 나온 외침입니다. 그 어린 소녀, 무대 변두리에 있던 불쌍한 천사 소녀의 입에서 나온 외침, 즉 ‘신학적으로 의미가 가득한 탄원’이 지금 종려주일 여기 허공에 메아리 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시라는 것입니다. “제발 예수님을 보게 해 주세요.” “예수님을 보게 비켜줘요!” “Let Jesus show!”라는 외침 말입니다.

성탄절 성극의 멋진 무대에서 어린 소녀는 예수님을 볼 수 없어서 안타가워 발을 동동 굴렀듯이, 종려주일의 화려한 퍼레이드 속에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태는 여러분들이 그곳에만 머무르지 말고, 고개를 돌려 좀 더 멀리 쳐다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골목길에서 나와서 고개를 내밀고 예루살렘의 길들 저쪽 끝 너머로 가는 길까지 내다보라고 말합니다.

                                                                     V
마태는 기록하기를, “그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을 때, 온 도시가 소동하였다”(21:10)고 합니다. 도시 전체가 벌집 쑤신 듯이 난리였다는 것입니다. ‘소동’이란 단어는 “온 도시가 진동하고 떨었더라”는 뜻입니다. 온 도시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도시 전체가 마치 지진을 만나듯이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때 온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던 사건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종려주일 퍼레이드 행렬을 보려는 사람들 틈에 끼어 예루살렘의 ‘길들’을 보고 있을 때 여러분은 온 성이 흔들리는 공포의 떨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 떨림과 흔들림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예루살렘의 길들이 끝나고 그 너머에 있는 영문 밖 골고다에서부터 오는 떨림과 흔들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동’은 예루살렘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진동과 흔들림과 떨림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VI
마태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곳에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 “이게 누구더냐?”라고 모든 사람이 묻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 질문에 대해 여러분이 대답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종려주일에 뭔가를 보려고 목을 쭉 내민다면, 보아야할 것은 종려나무가지나 의복들이나 군중들이나 나귀나 예루살렘의 길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여러분에게 예수님, 메시아를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요셉이 예수라고 이름 지은 그 어린 아기를 봐야합니다.
   ․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이름을 가진 메시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 우리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을 보아야 합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이 말하는 그분을 봐야합니다.
   ․ 세례자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은 그분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 우리는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했던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승리의 입성은 종려주일 이미 훨씬 이전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여러분에게 길게 쳐다보라고 합니다. 도시 안에 소동, 흔들림, 지진이 눈에 들어 오냐고 묻습니다. 마태가 저만치 보이는 길을 가리킬 때 그는 여러분이 예루살렘의 길들 너머로 난 십자가와 그리로 인도하는 길을 쳐다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VII
"예수님을 보게 해주세요."(Let Jesus Show!) "예수님이 안보여요." "제발 비켜주세요." 뷰크너는 어린 소녀의 외침에 대해 그렇게 성찰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수님을 보아야한다는 말입니까?
   ․ 우리가 보아야할 예수님은 우리들의 설교들이나 찬양이나 고색창연한 교회당 채색유리 창문 속에 우리의 사이즈에
     맞게 축소된 예수님이 아닙니다.
   ․ 우리가 보아야할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에 앉으셔서 포도주를 마시고, 빵부스러기는 그의 수염에 붙어있고, 그의 입과
     말에는 언제나 그의 마음이 들어있는 분,
   ․ 자신과 우리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던 그 예수님,
   ․ 그래서 아홉 살짜리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시던 그런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런 예수님을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한 14:1)고 하신 그 예수님을 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오직 그분의 등만 보일 것이고, 그 앞으로는 저 멀리 십자가가 눈에 들어오는 그 광경속의 예수님이 보여야할 것입니다.  

                                                                  VIII
그러나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는 너무도 많은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음유시인 하덕규는 이것을 가리켜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고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애절한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하덕규의 “가시나무” 노래)

하덕규와는 다른 방식으로 뷰크너는 현대교회와 목회자를 향해 다음과 같이 질타하고 탄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로부터 예수를 가리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 그 자체가 그분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목사들이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고 하면서 벅적거리고 떠들썩거립니다. 교회 역시 덤벙대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분주함과 정신을 빼놓은 퍼레이드 속에서 교인들 역시 모두가 방황하고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거룩함은 언젠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배는 일종의 공연행위에 지나지 않는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떤 공연입니까? 어떤 주일에는 성공적인 공연이고 다른 주일에는 실망스런 공연과 같은 공연 말입니다. 아이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날카로운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하덕규와 뷰크너의 말은 맞습니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안에 내가 너무 많습니다. 종려나무 퍼레이드 때의 무리들처럼, 우리도 예루살렘의 ‘길들’만 봅니다. 번영과 성공, 자기만족과 자기연민으로 가는 길들만 보입니다. 이런 저런 세속적인 길들만 보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수난주간에 들어갑니다. 종려주일이 수난주일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무대 뒤쪽에 서있던 불쌍한 어린 천사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아무 것도 보기가 힘든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목을 빼고 내다보려 해도 보기가 힘듭니다. 무엇을 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까?
   ․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 메시아를 묵상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해 십자가로 죽으러 가시는 그분의 길을 생각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 상대방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직접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 힘든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없게 하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우리 안에 가로 놓여있지는 않습니까?

                                                                      IX
"예수님을 보게 해 주세요.”“예수님이 안 보여요.” “앞에 가로막지 마세요.” “예수님이 안보여요.”

나치 정권하에서 순교한 독일의 젊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봅시다!”(Look solely unto Jesus Christ)라고 외친 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쳐다봅시다. “이 생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던 사람들, 그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 바로 그들만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목을 쭉 내밀고 저만치 내다보려는 형상(모습)은 소동하고 진동하는 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걸어가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을 등 뒤로 하고 예루살렘 거리를 걸어가시고 계신 예수님, 그리고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 서 있는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실 예수님, 바로 그곳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마음이 순결하고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은 정말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New International Version)


                                                                  [찬송]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
                                                     - 작사 작곡, Stephen Hah -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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