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클린조크: 바울과 베드로는 모세의 문장 형식을 표절했다고?

 

 

십계명은 단순히 “하라!” “하지 말라!”의 10가지 연속적 명령문이 아닙니다. 물론 그리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말입니다. 십계명의 “하라! 하지 말라!”를 이끄는 기관실 역할을 하는 십계명의 전문(preamble, 前文)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게 십계명의 전문(前文)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전문이 십계명 해석에 열쇠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져내신 전능하신 구원자이심을 기억한다면, 전문을 뒤따르는 십계명 본문은 그 구원자와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을 10가지로 충분하게 공동체적 삶을 통해 표현해 보라는 권면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말 그대로 계명(commandment)이 아니라 오히려 권면의 말씀(exhortation)으로 봐야합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십계명 전문과 십계명 본문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접속사(연결사)가 있어 양쪽을 이음매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덮어놓고 읽기 때문에 이 위대하고 중요한 접속사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것입니다. 그 접속사의 이름은 다음 아닌 “그러므로” 혹은 “그런즉”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렇게 하시고 저렇게 하십시오!”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보다시피 이런 문구, 즉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문구는 신약의 서신들에서 종종 발견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 서신의 문학적 특징은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을 위해 행하신 구원을 서술합니다. 일명 우리는 그 부분을 “교리”(가르침, doctrine)하고 부르지요. 그 다음에는 반드시 “그러므로” 섹션이 나올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알았으면 거기서 그치지 말고 구원 받은 것에 근거한 삶을 살아내자는 권고입니다. 신약의 서신들 대부분 이러한 2중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장 1절의 “그러므로”는 대표적 예일 것입니다. 베드로서도 마찬가지고 에베소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더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줄 아십니까? 신약의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교리(가르침)와 권면” “서술법과 명령법” “교리와 윤리”라는 문구 속에 들어 있는 접속사 “와” 혹은 “과”는 모두 신학과 신앙을 연결하는 “그러므로” 접속사이고,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신약의 사도들은 이런 패턴을 구약에서 특별히 십계명에서 배워 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십계명 전문과 본문의 연결고리(“그러므로”)를 원용하고 차용해서(표절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군 ㅎㅎㅎ) 가져다 쓴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해낸 여호와다. 그러므로~~” (구약원본)

“너희는 은혜로 구원 받았다. 그러므로~~” (신약복사본)

 

그렇습니다. 신학은 언제나 감사의 신앙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감사의 신앙은 언제나 “일상의 거룩함”, “거룩한 일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자는 누구보다 더 신실한 신앙인이어야 하며,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울려 퍼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지금도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일상에서 다시금 되새겨듣고 살아 내야할 준엄한 말씀일 것입니다.

 

"가을이 계곡 깊숙이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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