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4 17:17
[사순절 묵상]
“저는 괜찮은 죄인인데요?”
누가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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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하고 윤리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의 근원에는 죄의 용서와 구원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도덕적 개선과 개량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장의사”(葬儀社)로 오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은 우리에게 염습(殮襲)을 하시고 장례식을 거행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낫다고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 감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오로지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감사합니다. 겸손하지 않고서는 자비를 구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 없을 만큼 괜찮은 죄인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을 통한 도덕적 개선뿐입니다. 오로지 ‘몹쓸 죄인’만이 하나님이 필요할 것이고, 구원자가 필요할 것이고, 죄의 용서가 절실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과 종교의 핵심입니다.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는데 왜 교회에 나옵니까?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이 세리처럼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을 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간청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당신이 탕자일 때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형편없이 지저분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말고 달리 구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죄가 그리 돋보이는 것이 아니고, 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교묘할 경우, 또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당신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신사적이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야 라고 믿을 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닐 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한다는 것은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괜찮은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몹쓸 죄인”으로서 사유(赦宥)의 은혜를 베푸는 그분의 시은소(施恩所, mercy-seat)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읊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