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담대한 증인들”

행전 5:12-42

 

들어가는 말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자신들의 재산을 자발적으로 공유하게 되었는지를 배웠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예수와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사람들은 부활신앙을 갖게 되었고, 부활신앙을 갖게 된 후로 그들의 재물관, 인생관,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재물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이 선물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함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궁핍한 사람,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데 자신들의 재물을 사용해야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4:32-35). 이어서 누가는 이런 일을 하게 된 두 사람의 대조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 바나바는 참된 마음에서 재산을 신앙공동체를 위해 바쳤지만 다른 한 사람 아나니아 부부는 거짓된 마음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바치려다가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됩니다(4:36-5:11).

 

사도들의 기적들

 

오늘의 본문은 사도들을 통해 기적과 표적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사도들을 통해 예수의 사역이 아주 공개적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는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 있는 분이요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을 받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사도들의 고침을 받고 나음을 받게 되어 돌아갔습니다(16절). 이러한 기적들은 다 표적들(sign)이 있었습니다. 즉 그런 기적적인 치유는 부활하신 예수를 가리키는 징조(sign)들이며, 부활하신 예수만이 궁극적으로 치유와 회복과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복음 선포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도들의 복음 선포는 한마디로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4:2)라고 외친 것입니다. 예수라는 분 안에서만,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만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된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말씀을 믿은 사람들은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이고, 부활신앙을 갖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게 부활하신 예수와 그가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증언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증인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담대한 증인 공동체들은 동시에 기도하는 공동체였음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사도들의 박해

 

사도들의 기적들을 행사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자 당시 유대교의 기득권 세력들은 –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 시기가 가득하여 간섭하게 되었습니다. 대중들의 시선이 사도들에게로 돌아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은 대중적 지지기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종교적 권력 누수현상에 대한 초조감,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정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감 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혹독한 박해에 직면하게 됩니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줍니다. 자세한 경위는 보도되고 있지 않습니다(참조, 8:26; 12:7-11). 중요한 사실은 주의 사자가 사도들을 옥에서 풀어주면서 “가서 성전에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포함하여 초기 신앙공동체 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준 위대한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 “전파하되 이 생명의 말씀의 충만한 뜻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삶과 인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여 새로운 인생이요 새로운 생명이었습니다. 그러한 새 생명에 관한 충만한 뜻을 밝히 드러내어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영어번역을 참조하세요. “Tell the full message of this new life."(NIV)

 

옥에서 풀어준 주의 천사의 지시대로 사도들은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성전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쳤습니다(21절).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사도들

 

한편 옥에서 사라진 사도들의 행방을 알 길이 없던 담당자들은 당황하였고, 특별히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던 제사장들과 성전관리 책임자와 그의 부하들은 어쩔 줄 몰랐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던 사도들을 큰 소동 없이 잡아 심문하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에 세웠습니다. 두 번째 청문회를 연 셈입니다(27절).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도들을 비난하는 내용 중에 특이할만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이고자 함이로다.”(28절)

 

이것은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하여 사도들의 결박이 정당하였음을 핑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사도들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에 돌리려고 한다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사도들은 그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였고 종말의 죄용서와 영생을 받으라고 하였을 뿐입니다(참조, 2:38-40; 3:17-20,25-26; 5:31)

 

사도들의 담대한 반박과 증언(29-32절)

 

“당신들이 죽인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라고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지도층을 강하게 비난합니다(참조, 신 21:22). 그들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사형방식으로 예수를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구원으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참조, 갈 3;13). 이러한 진리는 “하나님은 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31절)의 사도들의 증언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편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부활과 예수의 승천은 모두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30절)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도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동일한 조상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사도들의 믿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사도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과 유대교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약의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살리셨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사도들의 예수 증언은 듣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하여 돌아와 죄 사함을 받으라는 목적이 있습니다. 복음전파는 궁극적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부활의 증인은 사도들뿐 아니라 성령도 증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사도들의 담대하게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것은 그들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께서 그들로 담대한 증인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움심이 없이는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32절)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충고 (34-39절)

 

사도들은 담대하게 산헤드린 공회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증언하면서 “종교지도자들이라는 당신들이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살리실뿐 아니라 하늘로 이끌어 하나님 우편에 자리를 잡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하늘 보좌에 앉히시어 모든 나라와 세상 위에 ‘왕’과 ‘구원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31절)

 

이 말에 산헤드린 공회의 지도자들은 회개는커녕 오히려 크게 분노하고 사도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정말 강퍅해질 대로 강퍅해진 모습입니다. 어떻게 사도들을 죽일 생각까지 하는지 정말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한 사람이 공회의 멤버들을 설득하여 차분하게 앉으라고 한 후에 충고합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둡시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사상과 하고 있는 행동들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당신들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합니다.”

 

이 말은 당대에 유대교에서 존경받는 바리새파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교에서 유명한 율법학자인 힐렐(Hillel)의 손자이며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그 문하에서 수학했던 바리새파의 큰 스승 율법 학자입니다(행전 22:3).

 

여기서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사두개파 사람들과는 달리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점을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을 산헤드린 공회에 세워 심문하던 주류세력은 사도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시기가 가득했던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4:1,6; 5:17).

 

어쨌든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사도들을 처리하는 일에 대해 동시대에 일어난 두 가지 사례를 들려주면서 신중하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하나는 예수님 태어나실 때에 로마의 황제가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속주에 인구를 조사하라고 하던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눅 2:1). 인구조사는 사실상 인두세와 같이 세금을 걷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 때 갈릴리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 움직임에서 나중에 셀롯 당(로마에 저항하는 일에 있어서 급진적인 열혈 당)이 생겨났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앞의 유다 사건 이후 드다라는 사람도 400명의 추종자를 모아 로마에 저항한 일이 있었습니다(주후 44-46년).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널 수 있으리라, 즉 여호수아 3장의 기적이 되풀이 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총독이었던 큐스피우스 파두스는 드다를 사로잡아 목을 베게 했습니다. 이런 사례를 말한 것은 시간이 흐르면 사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닌지 판명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 복음의 증인으로 우뚝 서다

 

산헤드린 공회는 가말리엘의 총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잠시 회의장 바깥으로 내보냈던 사도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채찍질을 합니다. 사도들은 복음 증언 때문에 처음으로 신체적 구타를 당하며 체벌을 받습니다. 채찍질은 회당에서 행하는 태형 형벌을 가리키는데 최고로 40에서 하나를 감한 수만큼 때릴 수 있었습니다.(막 13:9; 고후 11:24)

 

[신약시대와 그 뒤로 오랫동안 회당에서 지역 회당재판이 열렸습니다. 율법 규정을 어긴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재판관 세 사람의 판결이 있으면 채찍으로 볼할 수 있었는데(신 25:2-3), 이 벌은 회당장이 집행했습니다(막 13:9; 행전 22:19; 고후 11:24).]

 

채찍질을 맞은 사도들에겐 한 가지 금지조항이 덧붙여졌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한 것입니다(40절). 그러나 사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위해 고난 받은 일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 자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일에 대해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는 뜻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에 고난 받는다는 자체가 그들에겐 지극한 영광과 명예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박해를 받을수록 더욱 힘차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2절) 그들이 가르치고 선포(전파, 전도)한 소식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는 구약에서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러 오는 왕이신 메시아이십니다!”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가르쳤고 동시에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다!”라고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들어야할 복음(좋은 소식)은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아)!”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같은 핵심 문구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이요 왕이시며 주님이시라는 고백 말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언제 합니까? “날마다” “매일같이” “Day after day”

이런 신앙고백은 어디에서 합니까? “성전이든 집이든 어디서나.” “기회가 되는 대로 어디서나.” “주일에만 아니라 평일에도!”

 

 

[생각해 봅시다]

 

1. 예루살렘의 공회를 구성하는 대표적 두 당파는 무엇인가요? 그들이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예수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으며, 부활에 해서는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2. 유대교의 지도층은 왜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 시기하였을까요?(4:1-2; 5:17)

 

3. 행전에는 “예수의 이름”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언제가 첫 언급이었습니까? 그 후로는 어디에 언급되었나요? 왜 유대교는 예수의 이름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나요? 도대체 예수의 이름이 뭐 길래 그럴까요?

 

4. 교회와 일상, 일요일과 월요일, 신앙과 삶을 어떻게 연결합니까? 혹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5. 무엇이 가말리엘의 지혜입니까? 그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Revelstoke, British Colombia,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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