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2 00:24
“구두 유감”
지금 나는 연구학기라 잠시 미국에 체류 중이다. 일과 중에는 연구(!)하는 일 외에 어린 손자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 그리고 이른 아침 직장에 출근하는 딸을 데려다 주는 일이 있다. 집에서 직장까지 20킬로 정도인데 시내를 관통하는 한적한 고속도로를 타고 가기 때문에 기분 좋은 아침 운전이다. 미시간의 청명한 가을하늘과 노란색상으로 변해가는 여름철의 나뭇잎들이 아침 운전을 더욱 설레게 한다. 딸은 그럴듯한 호텔(www.amwaygrand.com)의 컨벤션 매니저로 일한다. 아침 마다 늘 정장차림이다. 그런데 매일 아침 내 눈에 거슬리는 딸의 복장이 있다. 운동화를 신고 출근한다는 사실이다! 구두가 아닌 운동화다! 운동화에 정장차림이라니. 헐. 그러고 보니 이곳 미국 사람들 중 화이트칼라 직장인들도 종종 양복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출근한다. 그래서 딸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촌스럽게, 어울리지 않게 운동화 짝을 신고 출근하니?” 대답은 간단했다. “직장에 구두를 두고 다녀요. 출근하자마자 구두로 갈아 신어요.” 이렇게 하여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 세트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할 때 “전문가답게”(professional)하게 일한다는 뜻이란다. 고객들에게 믿음과 신뢰성을 준다는 뜻이다. 그럴듯한 철학이다.
한편, 오래전 일이 떠오른다. 한국에서의 일이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직원 여성이 있었다. 아이들도 있는 직장 여성이었다. 학교에서는 과장급이었고 부서에는 그녀가 함께 일하는 부하 직원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 할 때 그녀는 언제나 구두를 신고 왔다. 정장차림이었다. 그러나 일단 출근한 후로는 슬리퍼 같이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이리저리 다녔다. 직장을 가정집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출근하자마자 신문을 보고, 점심때가 되면 싸온 도시락을 책상에 펼쳐놓고 먹고, 점심시간이 끝났음에도 삼박자 커피(믹스 커피)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퇴근시간이 가까이 오면 미리 책상을 정리하고는 보통 10분 정도 일찍 퇴근하였다. 전문 직종에 근무하는 전문가의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출퇴근할 땐 구두를 신고 직장 안에선 편한 슬리퍼를 신는 이유는 뭘까? 아마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 철학”(saving face philosophy) 때문은 아닐까? 그 후로 우리나라의 직장 문화도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구두는 출근할 때, 직장에선 편한 것으로라는 분위기는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문화인류학자들이 서구문화와 동양문화를 아주 두루뭉술하게 구분하여 말하기를, 서구문화는 “법률문화”(legal culture)요 동양문화는 “체면문화”(shame culture)라고 한단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쁜지는 말할 수 없다. 모두 적절하게만 발전시키면 다 좋으리라. 그러나 적어도 나는 한국인으로서 체면문화가 때론 사회적으로 얼마나 부정적인 결과들을 가져오는지 잘 알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대조적된 사례는 그냥 지나쳐 버릴 사소한 일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구두를 신는다고 해서 전문가답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에서는 다르지 않을까 한다. 구두 유감(有感)이다!
[가을이 무르익음을 알리는 Pum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