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책 출판 유감(有感)

-정암 박윤선 박사의 딸 박혜란의목사의 딸을 읽고 -

 

I

 

직업이 가르치는 일이다 보니 평생 책과 함께 살아왔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 전문분야의 경우 책을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지는 않는다. 목차를 훑어보고 필요한 장이나 부분을 집중적으로 읽는다. 그러다보면 그 부분 앞뒤로 읽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이나 전기와 같은 책들은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다 읽어야 한다. 플롯이 있으니 그리할 수밖에 없다. 관심분야가 문학, 과학, 음악, 철학, 스포츠, 여행기, 명상, 위인전, 자서전, 전기, 동화, 역사 등 잡다하다보니 책을 읽는 방식도 다르다.

 

어떻게 읽을까? 어떤 방식으로 읽는 것이 좋을까? 왜 책을 읽을까? 정보습득을 위한 것일까? 내 마음의 양식을 위한 것일까? 교양을 쌓기 위해서일까? 세상과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서일까? 더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가기 위함일까? 분명 현학적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해 나 나름대로 몇 가지 손쉬운 원칙을 세워놓는다.

 

첫째,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장르는 무엇일까? 소설인가? 시인가? 역사인가? 전기인가? 폭로성 탐방보도(르포르타주 [reportage]인가? 아니면 종교적 경전인가? 이런 것을 알고 읽기 시작하면 오독(誤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책의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책을 쓰고 있을까? 쉽게 말해 저술 목적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 저자가 자기의 세계관을 이처럼 치밀하게 언어로 엮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갖고 읽는다는 뜻이다.

 

셋째, 내가 이 책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는가? 저자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안목이 좀 더 넓어졌는가? 어떤 문제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하는 자극을 받았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저자에게 세뇌당하고 있는가? 등 다양한 질문을 통해 궁극적으로 독자인 내게 어떤 유익/손해를 얻게 되었는지를 묻는 연습이다.

 

옛날과는 달리 요즘은 누구도 책을 쓰기도 하고 출판도 한다. 예전에는 소설이나 문학작품의 경우, 작가들이라는 분들이 책을 썼지만 요즘은 자비 출판도 할 수 있기에 누구나 책을 출판할 수 있다. 정치가들의 출판기념회, 목회자들의 설교집 출간, 부자들이나 유명 연예인들의 자서전 출판 등처럼 때론 저술 목적이 분명치 않는 경우도 있다.

 

II

 

최근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밤을 지새워 읽은 경험이 있다. 내겐 극히 드문 일이었다.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어느 분이 내게 건네준 책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라는 부제가 눈에 확 들어오는목사의 딸이란 제목의 책이었다. 출판사는 책의 띠지에 고 박윤선 목사의 딸이 이제야 말하는 아버지의 신앙적 오류와 순전한 복음이라는 자극적인 글귀와 한국교회의 병폐인 유교적 권위주의, 샤머니즘적 기복주의, 복음의 왜곡된 율법주의적 요소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다는 아주 무게 있는 멘트를 달아놓고 있다.

 

박윤선 박사(1905.12.11~1988.6.30)하면 내겐 스승과 제자의 연이 있다. 총신에서 70년대를 지내면서 배웠고, 그를 중심으로 총신의 신학교수들이 당시 교단을 들었다 놨다 한다는 합동 총회의 영원한 전설적 서기였던 고 이영수 목사(대전 중앙교회)의 전횡에 반대하여 1980년 초 사당동 총신에서 뛰쳐나와 자유학원이라는 법인 이름으로 시작된, 그리고 나중에 합동신학교로 세워진 초기에 서울 반포 남서울 교회(당시 홍정길 담임목사)의 수업에서 나는 박윤선 박사에게 잠언도 배웠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에겐 그분은 시골 순박한 농부 같은 인상, 어린아이 같은 꾸김살 없는 소박한 웃음, 언제나 성경 해석에 온 힘을 다 쏟던 열정적 모습, 교실에서 수업 전에 기도할 때면 천둥번개 우레 소리 같은 기도 소리, 항상 근엄하고 진지하고, 이제는 그의 신학방법론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계시의 의존사색이란 용어를 입에 달고 다니셨던 분, 초라한 사당동의 총회신학교 건물을 뒤로하고 숭실대학교로 넘어가는 소위 헐떡 고개를 오래된 가방을 들고 넘어가시던 박 교수님의 뒷모습도 눈에 선하다. 상도동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실 때 차 안에서도 성경을 묵상하거나 무엇엔가 온통 몰두하다가 종종 가방을 놓고 내리는 해프닝 등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분의 뇌 구조가 매우 외골수적인 분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경건하게 보이는 신학교수는 내겐 처음이었다. 성경, 찬송, 기도, 설교, 강의, 집필이 그의 삶 전체였고, 그에게서 유머나 해학, 삶의 사소한 즐거움이나 누구하고 담소하거나 식사를 하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내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도 들었다. 1981년 당시에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에 산호세(실리콘 벨리의 핵심 도시)라는 곳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당시 미국 동부의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우산 프로그램이라는 계획에 따라 미국 서부에도 동일한 명칭의 학교를 세웠고, 당시 학장이던 스트림플 박사가 학생 유치를 위해 북 캘리포니아에 온 일이 있었다. 그 때 그와 함께 식사를 할 때 내가 총신 출신이라 하니까 그가 박윤선 박사님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가 미국인 목사 가정에 머무를 때조차도 새벽에 일어나 혼자 방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가 방문바깥까지 들렸다고 하면서 그는 참 경건한 분이라는 찬사를 하였다.

 

어쨌든 박윤선 박사는 후에 성경학자가 된 나에게 신학적 자극을 주신 분이었다. 특별히 그가 주석 집필을 통해 많은 자극을 받았다. 컴퓨터도 없는 당시, 육필 원고로 엄청난 분량의 주석을 집필한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물론 그 주석 내용과 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1980년에 시작한 나의 미국 생활을 하면서 그분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그의 사생활, 특별히 가정생활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몰래 그의 비밀을 들여다보고픈 생각에서가 아니라 저렇게 모든 것을 주의 일에 몰두하고 헌신하시는 분에게 요즘 말로 커피타임, 가족 여행, 영화보기, 선생과 학부형 만남 모임에 가기, 일반 문화생활, 심지어 명절에 가족이나 이웃과 윷놀이 같은 오락이라는 것의 자리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이런 궁금증은 한마디로 도대체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뭐일까?”라는 질문에 응축되어 있었다.

 

박윤선 박사님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나와 동시대의 친구,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절한 서영일 박사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개혁신학연구: 박윤선 박사의 생애와 신학에 나와 있다. 그 책 역시 흥미진진하게 읽어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도 박 박사님에 대한 우호적인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사적인 기록보다는 그의 신학여정을 다른 학문적 작품이었기에 그 나름대로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그리고 나도 나이를 들어가면서 박윤선 박사님에 대한 생각도 뒤안길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그의 따님이신 박혜란 목사가 자기의 아버지에 대한 책을 펴낸 것이다. 목사의 딸이 그 책이다. 미국 덴버에 거주하시는 박혜란 목사는 이미 70대에 들어선 할머니 목사님이시다. 박윤선 박사님이 사별한 전처 사모님의 소생 5명 중에 제일 똑똑하고 자기 주관이 강한 어찌 보면 매우 입지전적인 목사님이시다. 그는 이 책에서 가혹하리만치 자기 아버지 박윤선 박사님의 민낯을 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읽는 내내 아하” “아니?” “이럴 수가” “저런” “그래도 그렇지라는 탄성이 목에서 솟구쳐 올랐다. 아마 독자라면, 특별히 박윤선 목사님을 알고 있는 한국교회의 50~60대 이상의 목사들(총신과 합신과 고신)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III

 

나는 지금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책을 읽은 후 며칠 내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을 다시금 여러분에게 상기하고자 할뿐이다. “도대체 목사가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뭐일까?”라는 질문이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경건한 목사의 삶일까 하는 질문이다. 이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목사, 신학생, 혹은 평신도)이 목사나 신학도의 경우는 자기 자신에 대해, 평신도라면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 한번쯤 던져야할 질문이다. 누구를 비판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적어도 영혼의 인도자인 목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책의 장르에 대해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떠올린다. 박혜란 목사의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책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적 가족이야기인가? 공적 작품으로서 저술인가? 자기 아버지 박윤선 박사의 교조주의적이고 유교적 권위주의와 위선적 삶을 폭로함으로써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자나 교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썼을까? 아니면 전처 가족(특별히 비참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아낸 비운의 어머니)과 후처 가족(특별히 후처로 들어온 박윤선 박사의 야박하고 매몰찬 사모) 사이에서 일어난 비극적 모순을 자신의 신학적 잣대로 극대화시킨 한풀이 글일까? 이에 대한 평가는 이 책을 자세하게 읽은 후에 각자가 대답해야할 질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나는 박윤선 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심스런 평가를 해본다. 아버지 박윤선 박사에 대한 딸 박혜란 목사의 모질고 한스런 비탄과 비판 보다는, “역시 박윤선 박사는 그 시대의 아들이었구나.”하는 시대적 한계성 안에 살았던 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는 편이 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이 책을 써내려갔더라면 그를 숭상(?)하고 흠모하는 후학의 합동과 고신계열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특별히 그녀로부터 그의 신학적 유산위에 과도하게 학교를 세우고 있다는 지탄을 받고 있는 합동신학교 출신 목회자들 - 피할 수 없는 부드러운 채찍질이 되지 않았을까한다. 물론 얼마나 한이 맺힐 정도였으면, 특별히 여자로서 자신의 어머니가 겪은 인고의 세월과 비극적 죽음, 전처 자녀들의 불행들 그리고 유전인자(DNA) 속에 가족에 대한 인식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 박윤선 박사의 두뇌구조에 대한 분노가 신학의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저렇게 서슬 퍼렇게 표출될 수도 있구나 하는 안쓰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절제되고 더 많은 독자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방향으로 글을 써내려갔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씁쓸함은 아직도 여운처럼 내 주위를 맴돈다. 밤을 지새워 슬픈 이야기를 읽었다.

 

목사의 딸이란 책에 대한 느낌(有感)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느낌(遺憾)도 뒤따랐다

 

박혜란,목사의 딸(아가페북스, 2014). 288. 정가 13,000

목사의 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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