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겸손과 교만과 정의”

- 예언서를 중심으로 -


들어가면서


“그 사람은 겸손해,” 혹은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아마 사람의 외형적인 조건과 관련을 맺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돈 좀 있다고 해서 의시대거나,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행세(行勢)하거나, 학벌과 가문이 좋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경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교만하다, 거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꼴불견이라 하면서도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그런 위치나 신분에 오르는 지름길 사닥다리가 어디 있나 쳐다본다. 교만은 위선과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세상은 원래 그러려니 하더라도 교회나 교단에도 교만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큰 절망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장로교단들 안에서도 언제나 자기교단이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장자교단’이라고 뽐내는 교단도 있다. 혹은 외형적 사이즈가 큰 교회의 목사들이나 교인들 역시 은근히 자신들에 대해 프라이드를 갖는 경향이 있다. 정당한 자존감이 아닌 못된 자만심이다. 일반적인 관찰에 따르면 대형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당당하게 댄다. 물론 나쁜 일은 아니다. 반면에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느 교회에 출석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동네 교회에 다녀요”라며 말끝을 흐리기 일쑤다.


왜 그럴까? 세상에 혼자 자랑하는 사람은 없다. 독방에 앉아서 자신이 쌓은 업적이나 성취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정신병자가 아니고선 그런 사람은 없다. 자랑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자랑은 항상 비교에서 출발하며 경쟁을 촉발한다. 예를 들어, 어떤 여인이 명품 핸드백을 갖고 있다고 해서 교만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만 교만해진다.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서 얻어지는 우월감을 즐긴다. 그리고 비교에서 우월하면 자연히 으쓱대거나 우쭐하거나 기분이 좋아진다. 쉽게 말해서 교만해지기 시작한다. 이처럼 자만심과 교만한 태도는 언제나 비교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5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쪽방에 사는 사람에 대해 언제나 자기가 한 수 위에 있다고 생각 하게 된다. 벤츠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티코 자동차를 타는 사람에 대해 약간의 동정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할 수는 있어도 자기와 동급의 동료 인간으로 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 것이다. 교인 수 5백 명 쯤 되는 교회의 담임 목사는 30명 정도 되는 개척교회의 신참 목사에 대해 숨겨진 우월감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 인간성 속에 유전 인자처럼 들어있는 ‘높아지려는 마음’은 매우 태고적이다. 자조 섞인 말로 한국 사회를 ‘평등사회’라고 부른단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만들어 낸 신조어란다. 평등사회에서 ‘평’이라 함은 “몇 평에 사는가?”이고, ‘등’이라 함은 “성적이 몇 등인가”하는 말에서 나왔단다. 비교를 통한 우월감은 언제나 교만에 이른다. 어려서부터 이런 보이지 않는 경쟁과 그곳에서의 성공 그리고 성공에 따른 우월감을 배우도록 조장하는 사회 풍조가 개탄스러울 뿐이다.


개인과 교회와 사회 뿐 아니라 인종 간에도 교만은 상존한다. 백인 우월사상은 말할 것도 없지만, 타 민족, 특별히 저개발국가나 동남아 출신의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인종적 편견 속에 경제 문화적 우월감에 따른 교묘한 교만이 들어 있지 않다고 누가 부인하겠는가? 교만은 국가 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소위 대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이 약소민족이나 연약한 국가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일이 교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대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국가 간의 보이지 않는 불평등 조약은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우습게 보는 우월감과 교만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교만’은 단순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교단과 사회와 인종과 국가 간에서도 발견되는 무서운 악성 종양이다. 그리고 이 교만이라는 악은 근원에 있어서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유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질서를 무시하면서부터 시작된 악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만은 모든 악의 근원이며 우두머리며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교만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교만은 사람이 자신의 실제 크기보다 자신을 더 크게 부풀리면서부터 시작된다. 교만은 허영과 허풍과 자랑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고 말하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즉 허풍을 떨거나 과장하기 시작할 때 우쭐해지고, 그것이 먹혀들어 갈 때 거짓말하게 되고, 거짓말을 통해 자신의 위치나 신분이 상승하는 것을 즐기게 되면, 그것을 더욱 자랑하게 되고 자랑은 마침내 교만에 이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자랑에서 시작된다.


교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눈은 ‘낙타의 눈’이 된다. 달리 말해 그는 낙타의 눈처럼 눈을 내리깔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C. S. 루이스가 잘 말했듯이 교만한 사람은 위를 쳐다 볼 수 없다. 그러니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일 리가 없다. 이처럼 교만은 허풍과 허영, 시기와 질투, 비교와 위선, 열등감과 자랑과 같은 악덕(惡德)들이 한데 어울려서 만들어 낸 악성 괴물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교만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구약 성경의 지혜문헌은 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만’이나 ‘겸손’과 같은 덕목들을 다룬다. 교만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거나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혹은 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일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경고하는 잠언들이 많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는 단순한 실수도 우연한 잘못도 아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 안에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두 다리로 서겠다는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에 대해 자랑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교만은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라고 한다(시 14:1).


구약에서 말하는 교만


구약성경에서 ‘교만’이란 용어는 대략 61개의 본문들 안에서 사용되는데 주로 예언서들과 시형 본문에 나타난다. 오만방자한 태도, 다른 사람들의 궁핍과 가난에 대해 빈정대면서 무정하게 대하는 태도, 우쭐대거나 잘난체하는 행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교만은 마음의 성향인 동시에 태도이며 때로는 실제 행위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교만은 사회성을 띤다.


흥미 있는 사실은 교만에 해당하는 가장 보편적인 히브리어 단어(‘가바’)는 “높다” “높은 데 있다” “위에 있다”는 뜻을 가졌다. 위아래의 위치(位置)를 나타내는 단어다. 우리말에 “낮고 천하다”는 관용어가 있고 이에 상응하는 “높고 귀하다”는 말이 있다. 낮은 것은 항상 천하거나 볼품없다는 뜻이며 높은 것은 언제나 귀하거나 권세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높아지면 교만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며, 동시에 언제라도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창 11:1-9)나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하늘까지 닿는 우주적 나무에 관한 꿈 이야기(단 4장)나 하늘에서 떨어져버린 새벽 별(계명성)에 관한 비유적 시(사 14:14-20),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추락 이야기(창 3장) 등은 결국 ‘교만’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비참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구약 지혜서에는 교만이나 겸손을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지만, 예언서에는 주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교만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이 교만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지막 평가와 조명을 받는다.


우상숭배와 불의와 교만성


예언서들에 기록된 교만 관련 본문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예언서 전반에 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먼저 예언서 전체를 종합해서 살펴보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항상 다음  두 가지 전형적인 죄와 고질적 병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하나는 ‘우상숭배’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불의’였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죄악은 마치 십계명의 전반부와 후반부처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권력과 세력)을 추구하는 사회에선 자연히 하나님은 무시되고 그분이 요구하신 ‘정의와 공의’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우상숭배의 결과로서 사회적 불의는 가속화된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일, 권력을 사용하여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일, 부정직한 상행위를 일삼는 일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하나님과 그의 가르침을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병리현상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깊어갔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신앙과 삶을 나누어 생각하는 이원론적 편의주의에 빠졌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일과 사회적 책임을 나누어서 생각한 것이다.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상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종교는 일종에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영적 신앙적 악성 바이러스는 이스라엘 사회 안으로 깊숙이 급속히 퍼져갔다.


하나님은 이런 병든 사회에 대해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그에 따른 심판과 재앙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무엇이 그들의 죄악이었던가? 무지, 반역, 배반, 불의, 불법, 폭력, 착취, 배도, 우상숭배, 혼합종교, 군사적 힘을 의지함, 정치적 타협 등 다양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교만성’(hubris)에 최종적 방점을 찍는다.


예언서에는 ‘교만(驕慢)’ ‘자만(自慢)’ ‘자고(自高)’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용례로는 사 2:11, 17; 9:9; 13:11; 렘 13:15; 48:29; 겔 7:10; 호 5:5; 7:10 등이 있다. 물론 교만이란 용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실제적으로는 교만이란 중심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예언서 본문들은 많다.


그렇다면 ‘교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무엇이 교만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궁극적인 확신과 신뢰를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두는 것을 가리켜 교만이라 한다. 그리고 그런 교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 악한 행실을 맺는다. 따라서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교만을 지적하였을 때는(예, 렘 13:9; 겔 7:10,20; 16:56; 호 5:5; 7:10; 암 6:8; 8:7; 습 2:10) 오만방자하고 변덕스럽고 무례하고 거드럭거리는 사람을 지목하였다.


아모스와 교만


예언서 안의 대표적인 ‘교만-본문’ 서너 곳을 살펴본다. 먼저 글 쓰는 예언자들의 효시인 아모스로부터 출발한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는 여로보암 왕의 왕궁이 있었다. 남방 유대 출신의 예언자 아모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보냄 받은 곳이 북 이스라엘의 왕도 사마리아였다. 그는 그곳에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 그의 심판 선언 메시지 안에는 ‘야곱의 자랑’이란 독특한 문구가 나온다(6:8; 8:7). 야곱의 자랑은 야곱의 교만을 일컫는 말이다. “내가 야곱의 자랑을 혐오하며 그 궁궐들을 싫어하므로 이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대적에게 넘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야곱의 자랑’이며 북 이스라엘의 교만이었던가? 역사적으로 당시 여로보암 2세 치세 하에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 번영, 막강한 군사력, 사회적 안정 등이 그들의 자랑거리였다. 난공불락의 성채들, 최첨단의 군사무기를, 24시간 가동되는 공장들, 하늘을 찌를 듯한 교회당의 첨탑들, 위용을 자랑하는 우장한 성전 건축물들, 이 모든 것들은 야곱의 집이 자랑하는 것들이었다. 달리 말해 이스라엘이 세워 놓은 수많은 군사요새들은 하나님의 보호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야곱 집의 자만의 표상들이었으며, 그들의 대저택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한 채 약자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진 폭력의 증표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 안에서 그들은 허약한 안전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루어 놓은 성공과 번영과 건강은 정직과 정의에 기초를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향락 산업의 발달, 성적 타락, 경제적 불평등과 불균형, 사회 저변에 갈려 있는 자만과 안일, 흥청망청하는 소비문화, 빈익빈부익부의 양극화, 사회 계층 간의 괴리 현상, 날을 잃어버린 강단의 메시지 등은 장밋빛 번영 속에 피어난 독초들이었다. 이처럼 교만은 하나님 없는 자신 만의 왕국을 세워가는 삶이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를 멀리 하고 오히려 그분의 정의를 짓밟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짓밟는 행위는 삶의 전 영역에 나타난다. 외식(外飾)적이고 위선적인 종교행위는 강화되고, 정치와 사법은 약자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경제는 힘 있는 자나 가진 자를 위한 제도일 뿐 가난한 자는 항상 취약적이 되어간다. 정치가 ‘교만’해지면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이사야와 교만


주전 8세기의 또 다른 대표적 예언자 이사야에 따르면 교만은 “인생을 의지하는 것”이다(참조, 사 2-3장). 무엇이 인생을 의지하는 것일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라는 잠언적 문구는 이사야 2장과 3장 사이에서 회전문 역할을 한다. 달리 말해 2장과 3장은 하나님께 궁극적인 신뢰와 확신을 두는 대신에 인간적인 것들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유다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노래들이다. 그 중앙에 잠언적 경구가 자리 잡고 있다. 유다의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는 대신에 은과 금, 마필과 병거가 무수한 이방 땅의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자신들의 안보와 번영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교만한 생각이요 삶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어리석은 유다가 의지하고 추구한 것들을 다음과 같은 시적 용어들로 표현한다. ‘레바논의 높고 쭉쭉 뻗은 백향목’, ‘바산 지역의 울창한 상수리나무들’, ‘높은 산들과 우뚝 솟은 언덕들’, ‘높은 망대들과 견고한 성벽들’, ‘우람한 상선들과 항구들’, ‘위대한 신전들과 건축물들’(사 2:7; 13-16).


이것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다 ‘높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내세울만한 것들, 자랑할 만한 것들, 뽐낼만한 것들이다. 교만의 표현이다. 예언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 대신에 소위 이러한 인간적 장치들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반역이며 우상숭배며, 우상숭배는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는 ‘어리석음’의 극치라는 것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이런 어리석음이 교만이라는 것이다. 이 본문을 현대적으로 번역하자면, 교만은 큰 소리로 “우리는 칼과 창을 믿습니다. 우리는 금과 은을 믿습니다!”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칼과 창으로 대변되는 군사력과 금과 은으로 상징되는 경제력은 예나 지금이나 한 국가의 힘과 위상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지표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런 인간적인 것들을 의지하는 것은 마치 사람의 코에 나오는 숨이 매우 순간적인 것처럼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적 연고와 끈들은 모두 썩은 새끼줄이다. 그것을 잡거나 의지하여 올라가려는 순간 끊어져 한 없이 추락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교만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고집적이고 완고하다(사 9:9). 하나님께서 세차게 내리치셨으면 잘못을 반성하고 죄를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을 것이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겠다!” 완고한 고집이다. 교만한 자는 목이 곧아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구약의 표현을 따르자면 전쟁이든 전염병이든 기근이든 어떤 일들을 통해서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기회를 주신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환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하여 기회를 놓치고 더욱 고집스럽게 반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집으로 인해 강퍅하게 된 마음의 상태를 예언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그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사 9:13)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강퍅하고 고집인 것이 교만이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것이 고집인 동시에 교만이다.


이사야에서 교만에 관해 잘 그려내고 있는 또 다른 본문이 계명성(새벽별)에 관한 본문이다(사 14:12-20). 본문은 바벨론 왕의 몰락을 묘사하면서 그를 찬란하게 빛나는 새벽별로 의인화시킨다. 그의 교만은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들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13-14절).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통해 타락한 천사의 정체를 추적하거나(참조, 눅 10:18; 벧후 2:4) 아니면 고대 근동 지역의 신화에 나오는 우주적 산들과 만신전(萬神殿, pantheon)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지만 본문의 의도는 분명하다. 자신을 ‘지극히 높은 분’(하나님)과 동등하게 놓으려는 바벨론 왕의 지극한 교만(hubris)을 정죄하고 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달리 말해 자신을 창조주의 위치에 놓을 뿐 아니라 이 세상 역사의 궁극적 주권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 보다 더 큰 교만이 어디 있겠는가? 사실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는 인류의 초기 에덴동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첫 인류를 향한 뱀의 유혹은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살려는 의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율적 존재라는 생각, 이것이 최초의 인류가 냉큼 먹어버린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 후로부터 인류는 이 유혹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 가운데 “우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악한 자)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문구가 더욱 더 절실하게 들려오는 듯싶다.


예레미야와 교만


주전 7세기의 대표적 예언자인 예레미야서에서 역시 민족적 ‘교만’에 관해 다양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도 교만은 민족의 장래와 운명을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에 의존하려는 태도와 입장을 가리킨다. 다른 것들이라 할 때 그것은 인간적 지혜나 모략이나 술수 일 수도 있고, 돈이나 경제력 혹은 군사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강대국과 맺은 유대관계와 상호보호조약일 수도 있었다. 어찌됐건 예언자들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불렀다. 유다 역사의 말기를 살고 있었던 예레미야 역시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상숭배에서 찾는다. 여기서 우상숭배라 하는 것은 보이는 형상이나 신상에 대해 절하거나 제사를 드리는 것만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다가 짓고 있던 우상숭배는 종교제의적인 차원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윤리적인 차원, 국제정치적인 차원 등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가 유다백성들이 다른 신들을 섬긴다고 정죄하였을 때 그가 말하고 있는 다른 신들이란 개인과 국가와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주권적으로 결정짓는 ‘세력들’이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유다를 둘러싼 주변의 강대국(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등)이 유다가 섬기는 신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우상숭배를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질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섬기거나 의지하는 것이 우상숭배며 교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다가 허리에 띠고 유브라데스로 가서 거기 물가에 파묻어 감추라고 하셨다. 후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띠가 썩어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다(13:1-7).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그렇다면 무엇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인가? 이어서 설명이 나온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들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였기 때문이다”(10절). 교만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거절하고 자기마음대로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다시금 교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악의 근원임이 드러난다.


한편 예레미야서의 다른 곳에 따르면, 교만은 ‘헛된 자랑’ ‘어리석은 자랑’과 동의어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랑은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적이다. 왜냐하면 헛된 자랑은 자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렘 9장 23절에는 헛된 자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고대사회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지혜’, ‘힘’, ‘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왜 그럴까? 지혜와 힘과 재물, 그것들은 자기 스스로 충족(自滿)하다는 생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환영(幻影)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교만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그러므로 지혜, 힘, 그리고 부는 무엄하게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형적인 호적수(archrival)들이다.


수년전 하버드 대학 개교 350주년 기념식에서 총장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세 가지 목표들을 밝힌 바 있었다. 돈, 힘, 평판.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도 이와 비슷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운 뿐이다. 그 당시의 사람들 마음에도 항상 세 가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와 힘과 지혜.


이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세 가지 형태를 가리킨다. 돈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 든다. 힘이나 권력이 있으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판과 지혜가 있으면 구태여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삼중적 세력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단호하게 말한다. “네 지혜를 자랑치 말라!” “네 힘을 뽐내지 말라!” “네 부를 자랑치 말라!” 예레미야는 말한다. 만일 그것들을 자랑하고 뽐낸다면 너희는 이세벨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다. 결국 이세벨이 처하게 된 비참한 운명 ― 들판에 널려진 거름처럼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대신, 누구든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랑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곧 하나님은 이 땅에 신실함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주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자랑해야할 것이 있다면 지혜나 힘이나 부가 아니라, 신실함과 정의와 공의여야 한다.


교만과 겸손과 정의(正義)


결국 렘 9:23-24에서, 예레미야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삶의 방식들에 대해 말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사는 방식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지혜, 힘, 부를 추구하는 삶의 스타일이다. 이것이 교만한 삶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사는 방식이다. 신실함과 정의로움과 공평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겸허하게 사는 방식이다. 이즈음 되면 우리는 예언자 미가의 저 유명한 명구를 기억하게 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헤세드)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보다시피 교만과 겸손의 근본적 차이는 누구와 함께(하나님) 인생길을 걷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직면하는 커다란 유혹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려는 삶의 유혹이다.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춘 삶을 살려는 유혹이다.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자아확장, 자아실현을 위해 동원하려는 유혹이다. 돈과 평판과 힘을 축적하려는 유혹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거나 항복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이미 죽음에 이르는 길로 들어선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말했고, 또한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오직 한 가지 대안만 있다고 예레미야가,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어떤 길인가? 자신의 생명을 내주는 길이며 친절과 정의와 공의를 베푸는 일이 그것이다.


정의로운 삶을 소망하면서


교만의 반대는 겸손한 삶이라기보다는 정의(正義)를 추구하는 삶이다.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길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할 길이라는 말이다. 무엇이 정의(justice)인가? 정의란 ‘무엇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지를 분별하여 그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물건의 정당한 소유자, 곧 물건의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행위가 바로 ‘정의’다. 예를 들어 보자. 출애굽 당시 바로가 히브리인들의 길을 막은 것은 정의의 하나님을 공격한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바로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소유하는 정당한 소유주다. 다윗이 밧세바를 그녀의 남편 우리아에게서 훔쳤을 때 그는 정의로운 하나님께 대든 것이었다.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였을 때, 그들은 정의의 하나님을 공격한 것이다. 정의를 깨뜨렸을 때 그것은 곧 정의로우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다윗과 바로와 아합과 이세벨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일의 중심에 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진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자신들에게로 가져갔던 것이다.


그렇다. 정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아야할 마땅한 ‘그들의 몫’을 찾아서 돌려주는 것이다. 정의는 인종적 동등을 의미하기도 하다. 정의는 남자와 여자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정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정의와 한 쌍을 이루는 공의는 정의를 넘어선다. 공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서로에게 친구가 되는 곳에 존재하며,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몇 킬로미터를 더 갈 때 존재한다. 자신이 희생하는 곳 말이다. 공의는 사람들이 사랑과 정의를 함께 섞는 곳에 존재한다. 단순히 사람들의 권리를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부자와 가난한 자, 흑인과 백인,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으로만 충분한 것도 아니다.


예언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공의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공의가 거주하는 새로운 창조세계,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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