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오늘이 생애 최고의 날이라 생각하면 커피 향은 왜 그리 그윽한지…”

-쉽지 않은 예순 다섯 고개를 넘어서며 -

 

류호준

 

부지런히 달려온 세월, 우여곡절도 있었고, 달리던 트랙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행복한 순간들, 슬펐던 일들, 아쉽고 안타깝던 순간들, 밤새워 기뻐하던 일들이 이제는 두루뭉술하게 다가온다. 교수로 25년을, 교회에서는 목사로서 18년, 가정에선 네 자녀의 아버지로 손자·손녀 다섯을 둔 할아버지로서, 지난 39년 인생길을 함께 헤쳐 온 아내의 남편으로서, 뒤 늦게 찾은《3329》친구들 근황에 반가워하는 나로선 오늘 이 순간 스스로 수고했다며 쑥스러운 박수를 보낸다. 올해 말 정년퇴직이니 감회도 새롭다. 그런데도 올 한해 예순다섯 고개 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목 디스크, 족저 근막염, 전립선 비대, 허리 디스크, 난청, 손마디 저림, 시력 약화, 만성피로 등 갑작스레 몸이 불편한 한해였다. 그래도 가족 건강하고 마음 편안하니 하늘에 고마울 뿐이다.

 

요즘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인 코헬렛이 전한 글(구약성서의 전도서)을 읽으면서 삶과 인생을 생각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그는 인생과 삶을 세 가지 단어로 압축하고 있다. ‘나이 들어가는’ ‘늙어가는’ 우리 친구들, 이건 아니다, 노사연의〈바램〉노랫말처럼 ‘익어(여물어)가는’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몇 자 적어 본다.

 

첫째, 인생은 히브리어로 “헤벨”과 같다고 한다. 헤벨의 문자적 뜻은 ‘숨 쉰다’ ‘숨 넘어 간다’ ‘숨 막히다’의 숨(breath)인데, 인생이 그렇게 잠시 잠깐이라는 거다. 대방동 성남중학교에 코흘리개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육십 중반을 넘어가다니 정말 인생은 숨 가쁘다. 그러다 어느 날 숨넘어가듯 가는 것이 아니겠나. 인생은 ‘헤벨, 헤벨, 헤벨’이라니 덧없고 허무하기도 하고, 모순투성이고 부조리한 죽살이가 아니겠는가? 삶의 의미도 지속적이지 않은듯하니 말이다. 늘 새겨본다. 헤벨을.

 

둘째, 이스라엘의 현자는 우리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가르쳐준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모두가 무덤으로 들어가는 날이 있다는 뜻이겠지. 울 어머니가 네 자녀를 기르시다가 서른아홉에 혼자되시어 장남인 내가 평생 모시고 살았는데 몇 개월 전에 쓰러지셔 부득불 병원에 모시게 되었다. 갈 때마다 “메멘토 모리”를 떠올린다. 말을 못하는 노인, 치매 앓는 분, 코줄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는 분, 피골이 상접하여 목불인견인 노인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건강하게 살다가〈구구팔팔이삼사〉했으면 좋으련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남은 생을 낭비하지 않고 잘 써야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유머와 낭만을 잃지 않고 넉넉하고 관대한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베풀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셋째, “까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문구다. 문자적 번역과 뜻은 “날들을 잡아라.”(seize the day), “순간을 즐겨라”(enjoy the moment)가 되겠다. 달리 말해 매일 주어지는 ‘오늘’(지금)이라는 하늘의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잘 사용하라는 조언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오늘이 그와의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만나니 더욱 값지고 의미 충만하여 뿌듯한 마음이 든다. 옛 친구들과 이렇게 소통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지인과 커피를 마시는 오늘이 내 생에 최고의 날이라 생각하면 커피 향이 왜 그리 그윽한지 모르겠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홍천에〈시간을 잃어버린 마을(時失里)〉의 반우 이종우를 찾았다. 그러니까 고교 졸업하고 46년 만에 처음 만났다. 막상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였고 친구가 내려준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면서 지난 시절들을 이야기했다. 한해가 이렇게 저문다. 내년 기해(己亥)년에도 우리 모두의 삶에 더 많고 좋은 이야기들이 이어졌으면 정말 근사하겠다.

 

* 위 글은 성남고등학교 동기동창 29회 3학년 3반 회보인 3329(三三而久 = 3학년 3반은 영원하다)에 12월 송년호에 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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