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당신은 현대판 헤렘의 신봉자들인가요?”

- 신앙개혁기념일에 즈음하여 -

 

평생 이런 글은 쓰지 않고 마음으로 삭이곤 하는 사람이지만, 성격상 남의 집일에 대추 내놔라 감 내놔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요즘 들어 “세상살이가 이렇게 탁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몇 자 적어본다. 한국 교회의 신앙공동체에서도 그렇고 신학공동체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 양상들을 보고 듣기 때문이다. 아니 보이고 들려오기 때문이다. 심한 허탈감과 자괴감을 느낀다. 일말의 도덕적 책임감이 내 양 어깨를 누르기도 한다. 이유야 어떻든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종교목장에서의 혈투들을 보면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까맣게 되다 못해 완전 하얗게 된다.

 

신앙공동체의 곯은 내상들이 용암처럼 분출되어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다툼, 투쟁과 반목, 싸움과 충돌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한쪽이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게 된다. 한쪽에선 정의의 승리를 축하하고 노략물을 나누기도 하고, 다른 한쪽에선 아직 끝난 것은 아니라하며 끝까지 가겠다고 항전 의사를 굽히지 않기도 하다. 아니면 지금도 처절하고 야비하게 진행 중인 온갖 전쟁들이 교회 안과 밖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다.

 

몇몇 대형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갈등들, 몇몇 교단들 안에서 일어나는 수치스런 일들, 몇몇 신학대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사태들뿐 아니라 심지어 지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불편한 다툼들이 그런 패턴들이 아닌가?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그 내막이 특정지역으로 국한되었겠지만 이젠 만천하에 드러나는 세상이 되었다. 심지어 신상털이와 같은 인격살인이 때론 정의의 이름으로 버젓이 일어나지만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는 무정부시대(anarchy)가 되었다.

 

게다가 종종 정의는 힘과 동일시되는 시대가 되었다. 숫자의 힘이든, 다수의 힘이든, 크기의 힘이든, 민중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상징의 힘이든, 언론매체의 힘이든, 유치한 주먹의 힘이든, 심지어 카톡교의 힘이든, 정의는 종종 힘과 동종이라고 까지 믿게 되었다. 게다가 종교적 전투에 나선 주도적 신앙인들이나 신학공동체의 머리들은 적대국의 원수들을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완전히 씨까지 말려야 한다는 “완전 진멸”(히, 헤렘)의 신봉자들이곤 하다. 구약성경의 전쟁이야기에 종종 등장하는 “완전파괴”말이다. 신의 이름으로 모든 거짓되고 사악하고 부정한 것들을 완전 파괴한다는 헤렘의 수행자로 자처하곤 한다. 정죄와 보복이 아니라 거룩함의 회복이라는 구호아래서이다.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 십자가 밑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이걸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하나?

 

이럴 때일수록 교회 공동체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함께 신앙 생활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왜 예수는 요한 17장에 기록된 대제사장의 기도문을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문으로 남겨주었는가? 사도신경 안에 “성도의 교제”(communion of saints)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가라지와 알곡이 함께 섞여 있는 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의 “긍휼의 정의”(compassionate Justice)를 어떻게 이해하고 누구에게 적용해야하는가?

 

갈기갈기 찢어진 “그리스도의 몸(Body)”을 보면서 정작 울고 아파하고 가슴을 치며 하늘을 쳐다보는 “몹쓸 죄인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 정의감에 충만한 “괜찮은 죄인”들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 종교를 개혁하는 일에 전사가 되어 힘찬 구호를 외치고 횃불을 높이 드는 일에 나서지 말고, 먼저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개혁해야할 첫 번째 대상이 자신의 부패한 마음임을 상기하는 기도의 시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가을 숲길을 걸으며”

beautiful autumn colors in Michigan.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396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28
789 사순절 묵상: “저는 괜찮은 죄인인데요?” file 류호준 2020.03.04 244
788 신앙 에세이: “길(道)의 사람들” file 류호준 2020.03.03 199
787 일상 에세이: “예배 취소” 류호준 2020.02.28 350
786 신학 에세이: “교회공동체와 전선(戰線)” 류호준 2020.02.26 212
785 오늘의 기도: “주님, 바다를 가르시고 풍랑을 잠재워 주소서” 류호준 2020.02.22 265
784 신문사 대담: “목회자는 성경 무시하고 교인은 성경에 무지… 이래서야” [4] 류호준 2020.02.14 291
783 신앙 에세이: “한결같이” file 류호준 2020.02.11 212
782 신학 에세이: “기억하고 기념하라!” 류호준 2020.02.07 372
781 신앙 에세이: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file 류호준 2020.01.28 413
780 신앙 에세이: “오래전 어떤 조언” 류호준 2020.01.27 206
779 신앙 에세이: "함께 춤을 추실래요?" file 류호준 2020.01.24 350
778 클린조크: "뚜레쥬르" [1] 류호준 2020.01.12 794
777 클린조크: "나도 종말론 집회를 할까?" [1] 류호준 2020.01.08 262
776 신앙 에세이: “경이로운 하나님의 선택” [2] file 류호준 2020.01.04 269
775 신앙 에세이: "경쟁의 사각 링에 던져진 교회들" [1] 류호준 2019.12.16 634
774 대림절 이야기: “비극 속에 은혜의 빛줄기가” file 류호준 2019.12.10 397
773 신앙 글: “좁은 길” 류호준 2019.12.05 264
772 일상 에세이: "볼 배급" 류호준 2019.12.04 669
771 일상 에세이: “함께 살지 않아서…” 류호준 2019.11.25 198
770 신앙 에세이: “하나님의 평강과 생각거리” file 류호준 2019.11.25 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