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가슴으로 읽는 성경”

변상봉 목사

 

 

성경은 무엇으로 읽어야할까? 눈으로, 귀로, 머리로? 물론 눈으로 읽고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마음과 가슴과 심장으로 읽는 것입니다. 영어에 “하트”(heart)는 한국어로 “마음”, “가슴”, “심장”으로 번역됩니다. 아래는 가슴과 마음과 심장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확신을 담고 있는 글입니다. 글쓴이는 내 제자로서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변상봉 목사입니다. 저자의 허락을 받아 약간의 수정을 거처 이곳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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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을 읽고(read) 듣습니다(listen). 이러한 우리에게 성경은 문자이자 음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와 음성은 가볍지 않습니다. 특별한 생명력과 묵직한 힘(power)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력과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적 기원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체적인 그 무엇이 성경에 이러한 생명력과 묵직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 신학교 시절 한 은사님의 표현으로 하면 ‘하심’, 곧 ‘하나님의 마음’(God's heart)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하나님의 마음을 ‘파토스’(그리스어: πάθος), 즉, 정념(情念, Pathos)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눈으로 성경을 읽고, 귀로 성경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눈과 귀만으로는 묵직한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면 ‘심장’(하트)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고동치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심장으로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성경읽기 방법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사랑의 편지”(Love letter)입니다. 사랑의 편지(Love letter)는 문자(letter)로 쓰여 있지만, 이 letter(편지) 전체를 관통하여 강물처럼 흐르는 것은 “사랑의 감정”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대할 때, 일반적으로 사랑이나 공의, 거룩함 같은 추상적인 성품이나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품과 역사적 행적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연구하여 어떤 결론에 이르거나 행동 방향을 정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편지(love letter)를 이렇게 읽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의 글자”(love letter)는 마음 곧 “심장”(가슴,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문자하나 하나에 스며들어 있는 연인의 숨결을 느끼며, 심장이 가는대로, 마음의 움직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 대해 다양한 언어로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드신 후 신생아를 안은 아빠처럼 심히 기뻐하셨습니다(창1:31a,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 기쁨은 사랑이 가슴에 넘쳐날 때 나오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피조물 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첫 사랑이 다양한 스토리들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키스하시며(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자신의 영혼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셨습니다. 인간의 심장에 하나님의 마음을 집어넣어주셨습니다(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풍요롭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일터(직장)와 거주지(집)로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생명나무를 주시며 무한대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통한 질서의 계명을 금반지와 같은 사랑의 선물로 주시며 인간의 행복을 위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과 같이 귀하고 아름다운 돕는 배필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딸 바보처럼, 인간에게 푹 빠진 “인간 바보”가 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 하나님의 가슴은 참으로 따뜻한 아버지의 품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 분의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의 심장은 심쿵! 두근두근! bounce! bounce! 됩니다. 끊임없이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들에 심장이 한없이 쿵쾅쿵쾅 뛰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과 기쁨을 누립니다. 성경을 통해 만나게 되는 이 분은 언제나 감동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주 우십니다. 때론 좌절하시며 탄식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5-6) .

 

고뇌와 슬픔 속에 비통한 감정을 쏟아내기도 하십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 슬프다 죄를 범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 1:2-4)

 

때론 너무나 화가 나서 사자처럼 포효하시며 분노의 소리를 지르기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니 목자의 초장이 시들고 갈멜 산 정상이 마를 것이다.”(암 1:2)

 

이러한 감정들의 절정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하는 울부짖음에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왜 이토록 아프고 격렬한 감정들을 쏟아내는 것일까요? 요한 3장 16절은 이 모든 것들이 다 사랑고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배반했습니다(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죄로 인해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회개의 기회(second chance)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요셉과 모세를 통해, 이사야와 아모스 같은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무엇보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찾아오셨고, 또 찾아오십니다. 찾아와 두 팔을 둥글게 머리에 올리고, 고동치는 심장에서 피어나는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빅 스마일로 보여주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속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뜨거운 감정으로 녹아있습니다. 이 감정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역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속을 깊이 파들어 가보면, 휴화산이 아니라 마그마가 펄펄 끓고 있는 활화산입니다. 언제든 폭발적으로 솟구쳐 하늘과 세상을 뒤덮을 뜨거운 감정(pathos)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그 분의 가슴에 못질을 한 채 배은망덕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삶을 대변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시는 그 분의 모습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동시에 고맙고 감사합니다. 둘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왔을 때, 멀리서부터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그 모습(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더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에서 우리는 우주의 심연에서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라 온 세상을 따뜻하게 뒤덮는 창조주의 웅장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치리시고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노래합니다(눅 15:24, “이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도다.”).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기쁜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이 기쁨은 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듯 큰 기쁨으로 뿜어져 나옵니다.

 

성경 저자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그들의 심장으로 느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달할 때, 그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특히 사랑의 감정이 흘러넘쳤습니다. 자신들의 심장으로 하나님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토해내고 성경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저자들이 느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심장으로 느끼며 읽어야 합니다. 그때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나를 창조하시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나의 왕이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말씀 속에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심장으로 이 말씀을 읽을 때,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권능으로 임하게 됩니다(comes powerfully). 좋은 메신저는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며,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나라를 청중들의 심령에 권능으로 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랑의 주 예수님을 만납니다. 떨리는 심장으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그 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체험하고 벅찬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감격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취하여 열매 맺는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제시하시며(계 21:1-2), 그곳에서 별 같이 빛나는 영광을 누릴 것이라 약속하십니다(단 12:3). 그곳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과 진정한 행복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소리를 문자로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런데, 그 문자 속에 묵직한 하나님의 사랑이 강처럼 흐르며, 마그마처럼 끓고 있습니다. 언제든 폭발하여 온 세상을 뒤덮을 수 있는 사랑의 활화산입니다.

 

앨런 아이버슨이라는 NBA 농구선수는 농구선수로서는 키가 매우 작은 183cm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2m가 넘는 거구들이 득실거리는 NBA에서 신인상, 정규리그 MVP. 득점왕 4회(역대 최단신)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기초로 ‘농구는 신장(키)이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지식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신학박사도 아니고, 아예 신학교 근처에도 못 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우리가 눈과 귀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읽기는 눈과 귀가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입니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눈과 귀가 다소 어둡더라도, 눈과 귀가 더 좋은 사람보다 성경의 더 깊은 이해와 본질, 핵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포함한 성경의 저자들은 고동치는 하나님의 심장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그 심장 한복판을 달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성경 곳곳에서 고동치는 하나님의 심장으로 뛰어 들어가 내 심장으로 그 분의 심장을 느끼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통하는 성경읽기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ad the Bible with your Heart and Feel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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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1: 오늘 아침 내게 보내온 변 다니엘(상봉) 목사의 문안 글에는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저자의 마음을 알 수가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M.Div 시절 선생님에게서 배운 내용들은 현재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들이 보다 깊은 생각의 기초가 되어 현재 설교를 할 때나, 이곳 서울대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저의 가르침의 근간을 이루고 저 나름의 글을 쓰게 하기도 합니다. 최근 신학대학원(M.Div) 시절 배운 내용과 그 이후 미국에서의 저의 신학 여정과 개인적인 성경읽기를 기초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써 보았습니다. 그냥 이곳 대학생들을 돕고, 그들과 나누기 위해서 편하게 쓴 글이기에 정식논문 형태로 각주를 달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편하게 한번 봐 주시고, 계속 가르침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추신2: 변상봉 목사는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하고(B.A. & M.A.)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M.Div.)를, 미국 미시간의 캘빈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으로 신학석사(Th.M.)를,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의 브라이트 신학대학원에서 구약 지혜문헌의 거두인 레오 퍼두(Leo Purdue) 박사 밑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현재 대학생 성경읽기 단체(UBF)의 서울대학교 지부 지도 목사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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