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속이 상해도"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

 

 

60대 중반을 훌쩍 넘긴 교회 권사님이 수요일 저녁 예배 후에 목사인 나에게 묻는다. “목사님하고 함께 신앙생활한지 어연 20년이 넘어가는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지난 20년 동안 강단에서 목사님의 얼굴 표정이 바뀐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학교 일을 하시면서, 목회 하시면서 온갖 일들을 다 겪으셨는데 어떻게 얼굴 표정이 한 번도 안 바뀔 수 있습니까?” 잠시 말을 멈추시다가 “속은 많이 뭉그러졌을 텐데요”라고 말끝을 흐린다. 목젖을 타고 뭔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대답하기는 했다. “속이 많이 상하긴 했지요” 라고.

 

뭐라고 답변하기도 그렇고 해서 잠시 어색한 침묵을 불러들였다. 조금 후에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내가 말을 꺼냈다. “권사님, 미국에 라스베가스 라는 도박의 도시가 있어요. 들어보셨지요?” “예, 들어봤죠.” “권사님, 그런데 카지노에서 도박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으흠.......” 아시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표정관리입니다! 하하하”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포커페이스(Poker face)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

 

카지노에서 포커 게임을 할 때, 그것도 상당한 액수를 걸고 도박을 할 때, 조심스런 일 중에 하나가 표정 관리란다. 상대방에게 수를 읽히지 않으려면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한다. 들고 있는 패가 아주 좋지 않아도 내색을 하면 안 된다. 설령 패가 너무 좋아도 무표정해야 한다. 얼굴 표정을 통해 내 수가 읽히기 때문이다.

 

도박장에서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목회는 더더욱 그래야하지 않을까? 목회는 주식 시장의 화면을 보면서 일희일비하는 일이 아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감정표현이 즉흥적이거나, 안색이 쉽사리 바뀌거나, 분노조절장치가 망가졌거나, 표정이 직설적일 경우, 교인들에게 직간접으로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볼 것, 안 볼 것을 다 보지만 그 때 그 때마다 그것들에 대해 즉흥적으로 반응한다면 목회는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목회는 본래 이런 저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목회자가 걸어가는 길에 언제 탄탄대로가 있단 말인가?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일, 억울한 오해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일, 화를 치밀어 오르게 하는 일, 보기에도 한심스런 일, 어처구니가 없는 일, 감정 다툼에 신력의 장단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불편한 진실을 쳐다보아야 하는 일, 신앙기복이 죽 끓듯이 심한 사람들을 보는 일, 내로남불 식의 공동체 생활하는 사람을 견디어야 하는 일, 본인이 문제의 진원지임에도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막무가내 형 사람들을 참아내야 하는 일, 사람은 왜 저리도 안 바뀔까 하는 허탈감, 내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보다 하는 자괴감과 무력감, 무엇보다 내 자신이 이 길에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회의감, 그러니 소화불량에 때론 불면증에 시달리기에 딱 좋다. 울화병이 필수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럼에도 모두 속으로 삼켜야 한다. 침묵하면서 속을 쓸어내리는 편이 낫겠다.

 

****

 

그러나 단순히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물론 인생은 기다림과 견딤의 연속이지만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나를 견디게 한 원동력은 “신앙의 힘”에 있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그 어떤 험한 파도와 시련의 폭풍우에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성령님에 대한 믿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깊이 알려주고 소개해주고 연결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나의 평생에 소중한 길벗이 되었다. 읽고 또 읽고, 읊조리고 깊이 묵상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나는 하늘 위로를 얻는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라고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노래했지. 성경을 통해 나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하늘 평안”(heavenly peace)을 선물로 받고 있기에 지난 20여년을 얼굴표정 변화 없이 걸어올 수 있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권사님, 앞으로도 얼굴 표정 변함없이 이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395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28
829 Book Review: Interpretation 59 (October, 2005), pp. 428-429에 실린 류호준 교수의 서평 류호준 2006.10.03 89242
828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좌우편 죄수들의 정체는?” [3] file 류호준 2014.03.20 66365
827 설교: “감사: 쟁기질 하듯이 그렇게”(추수감사절 설교문) [1] 류호준 2007.11.18 59725
826 시: 유고시 1 편 [7] 류호준 2007.06.12 34628
825 신학 에세이: “예언자들의 소명과 우리의 소명”(그말씀 12월호 게제) 류호준 2010.11.09 34264
824 “성금요일과 부활절 그리고 세월호” [4] 류호준 2014.04.18 31571
823 설교: "복음의 긴급성"(눅 10:1-20)(490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 [1] file 류호준 2007.10.29 22976
822 에세이: "나의 네덜란드 유학기" [2] 류호준 2007.11.03 22830
821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서 큐티 27) 류호준 2011.07.14 21405
820 설교: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 류호준 2010.09.23 21048
819 회고 에세이: " “쓰지 말아야 했던 편지” [7] file 류호준 2010.07.23 20833
818 로마서 묵상(26): “하나님 도와주세요!” file 류호준 2010.11.03 20344
817 강해논문: "예레미야의 새 언약" (렘 31:31~34) file 류호준 2006.05.21 20310
816 설교: “환대의 향기” file 류호준 2010.10.10 20080
815 설교: “거인을 죽이는 강심장” file 류호준 2010.12.05 19673
814 신앙 에세이: "버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6] 류호준 2008.08.12 19603
813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어요!”(묵상의 글) [2] 류호준 2008.02.19 19546
812 일상 에세이: “친구 하덕규 이야기” [4] file 류호준 2011.01.09 19453
811 신학 에세이: "겸손과 교만과 정의"(그말씀 3월호 게재예정) 류호준 2011.01.20 18857
810 번역에세이: 희망 (바라는 것) 류호준 2007.12.07 18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