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룻다와 욥바에서 일어난 일”

행전 9:32-43

 

들어가는 말

 

살면서 힘든 일이 계속된다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기는 가끔이라도 평화로운 날들도 있어야 헐떡거리는 숨을 돌릴 수 있겠지요. 초기 교회의 삶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교회는 온갖 시련과 박해에 시달렸습니다. 교회의 자랑이던 전도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유대교로부터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사도들이 그나마 버티고 있었지만 나머지 수많은 예수의 제자들은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진 곳에서 민들레 홀씨처럼 복음의 씨앗이 되어 뿌려졌습니다. 때론 흙이 얕은 돌밭에, 때론 가시덤불 밑에, 때론 사람들이 걸어 반질반질하게 된 길 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때론 좋은 땅에 떨어져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만큼의 놀라운 결실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라도 박해는 그치고 평온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시련과 난관이 항상 계속되는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의 끝부분을 다시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보십시오. “그리하여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역에 걸쳐서 평화를 누리면서 튼튼히 서 갔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로 정진해서, 그 수가 점점 늘어갔다”(31절)는 말씀입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박해를 통하여 교회는 “평안”과 “확장”이라는 두 가지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해 가운데서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입니까? 박해 때문에 쭈그려 들 것 같은 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는 확장되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는 것입니다.

 

잠시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로 전진했다”는 문구에 집중해보십시오. 이 구절 안에는 왜 교회에 평온(샬롬)이 있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을 경외(거룩한 두려움)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즉 그들이 박해 가운데서도 평정심과 평강을 잃지 않는 이유는 사람의 생사화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성령의 위로로 전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후견인이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셨기 때문에 시련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회는 “전진하는 교회”였습니다.

 

평온할 때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평온의 시기에 교회는 가만히 있지 않고 오히려 평온의 기회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아 앞으로 씩씩하게 전진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 사도인 베드로의 움직임을 살펴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더라.”(32절)는 문구로 오늘의 본문이 시작합니다. 움직임, 활동, 에너지, 사역, 일, 교제, 능력, 기적, 놀람, 경이, 개종, 회심, 섬김, 눈물, 봉사, 열정, 사방으로, 땅 끝까지 등을 예기하는 시작입니다.

 

베드로는 평온한 시기를 이용하여 “사방으로 두루” 지역 교회들을 찾아갑니다. 사적 방문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단을 대표한 공식적 방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찾은 지역은 두 곳입니다. 한 곳은 룻다와 샤론 지역이고(32-35절), 다른 한곳은 욥바였습니다(36-43절). 첫 번째 방문지에서 베드로는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한 남자를 고쳤고, 두 번째 방문지에선 방금 죽은 한 여인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부가설명: 누가의 기록 특이점]

 

특이할 만한 사실은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당시에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그룹인 “여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은 여자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만나주셨고 그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누가는 두드러지게 드러냅니다. 즉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선 여자들도 남자들과 동등한 위치와 신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상황을 고려하면 가히 혁명적이요 전복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잠시 누가복음의 1-2장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중심에 서있습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한 남자가 등장하면 곧이어 다른 여자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시몬이 나오자(2:25-35), 곧이어 여자 예언자 안나가 나옵니다(2:36-38), 가버나움의 백부장(7:1-10)이 나오면 그 옆에 나인 성 과부(7:11-17)가 등장합니다. 당시의 가부장적 종교 기득권층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질타는 비싼 향유를 예수께 부은 어느 충격적 사건에 담겨있습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시몬이란 이름을 가진 어느 바리새인 집에 예수가 초청을 받았습니다. 동네에서 평판이 아주 좋지 않은 한 여인이 갑작스레 그 집에 들이닥쳐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옥합을 깨어 향유를 붓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는 남자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질책하면서 그들이 사람처럼 여기지 않았던 그 여인을 높이 평가하십니다.(7:36-50) 이런 기사를 쓰고 있는 누가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이처럼 여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누가복음서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참조, 13:11-17과 14:1-6; 13:18-19와 13:20-21; 15:4-7과 15:8-10을 비교해보세요).

 

오늘의 본문에서도 누가는 병든 한 남자와 죽은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그들이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둘 다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았습니다. 특이할만한 점은 분량으로 따지자면 남자에 관한 기사보다 나중에 나오는 여자에 대한 기사가 더 길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남자의 상황보다 그 여자가 처한 상황은 더 아득하여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두 사건 중에 나중에 나온 사건의 결말은 더욱 극적입니다.

 

룻다에서 일어난 일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걸어서 이삼일 길은 족히 되는 룻다 지역에도 신앙공동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곳 성도들을 심방 갔습니다. 그곳에는 중풍으로 침상에 누운 지 여덟 해가 된 남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애니아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하십니다. 베드로의 말에는 요즘의 짝퉁 부흥사나 권위적 목사처럼 어떤 영적 우월감이나 과시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행하신 기적 행위와 꼭 닮았습니다(참조, 눅 5:18-25). 역시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생명의 능력이 성령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임하였고, 베드로는 그 부활생명의 능력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 치유의 근원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진정성 있는 전달자였습니다. 혹시 베드로를 수행한 제자들 중에 사마리아 성읍에 종교비지니스를 하던 시몬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치유를 빌미로 돈을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참조, 8:18-21). 구약에서 엘리사의 비서관인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의 치유를 빌미로 뇌물을 강요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치유된 사람을 보았던 룻다와 샤론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기적이든 치유든 말씀선포든 구제행위든 무엇이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당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곳이 모든 사람의 영원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욥바에서 일어난 일

 

욥바는 룻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다비다(아람어 이름임. 도르가는 헬라어로 영양(羚羊) 혹은 노루란 뜻)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여제자”란 호칭이 매우 특별합니다. 이 낱말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 곳에서만 나타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비다라는 이 여제자에 대해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비다는 분명히 과부들의 후원자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과부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그룹이었습니다(39절). 누가는 그녀의 삶을 한 문장으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라고 묘사합니다. 다비다가 죽었을 때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던 많은 과부들이 보여준 행동을 통해 우리는 그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더라.” 우리는 다비다의 삶을 돌아보면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결코 말이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삶과 행동으로 하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 특별히 신실한 예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신앙을 머리에서 시작하지 않고 가슴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임하심, 성령의 내주하심은 사람들의 머리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가슴과 심장에서 일어납니다. 부활생명이 그들의 삶 전체에 충만해지면 마음에는 기쁨, 긍휼, 인내, 희망, 용기, 희생, 친절, 돌봄 등이 자라기 시작하고 결국 바깥으로 삶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긍휼의 마음, 희생의 정신, 돌봄의 가슴이 없는 제자는 가짜 제자며 짝퉁 제자입니다.

 

다비다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과부)들을 위해 속옷과 겉옷을 지었다고 합니다. “속옷과 겉옷”이라는 문구는 사람전체를 따스하게 하는 표현구입니다. 그녀가 만든 옷들은 각 사람을 위한 맞춤형 옷이었습니다. 속옷과 겉옷은 다비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들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기억하며 한 뜸씩 한 올씩 떴던 사랑의 결실이었습니다. 따스하게 하는 속옷과 겉옷, 위로와 확신과 희망을 주는 속옷과 겉옷이었습니다. 이게 착한 일(선행)이며 누군가를 위해 섬기는(구제) 일입니다. 그 일을 “심히 많이”했던 여인 다비다! 도르가!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영예로운 명칭은 “여제자”였습니다.

 

다비다가 병들어 죽게 됩니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였습니다. 욥바 지역 전체에 큰 슬픔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과부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욥바에 있던 신앙 공동체는 두 사람을 보내어 룻다에 체류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베드로는 도착하자마자 다락방에 올라가 죽은 다비다를 위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이 말에 다비다가 일어나 앉습니다. 또 다른 기적입니다. 앞서 룻다에서처럼 욥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알고 주님을 믿게 됩니다. 여기서도 기적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다시금 행전 1:8을 떠 올려야할 시간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와 이곳 룻다와 욥바까지 와서 부활하신 예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분만이 진정한 치유와 회복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주님으로 믿으십시오. 그분에게로 돌아오십시오.

 

[생각해 봅시다]

 

1. 누가는 지속적으로 “여자”들에 특별한 관심을 둡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예들을 살펴보며 대답해 보세요. 혹시 애니아(32-35절)와 다비다(36-42절)를 대조하는 본문 구성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지는 않을까요?

 

2. 본문을 시작하는 부사구 “그 때에”(32절)는 언제를 가리킵니까? 이 부사구가 담고 있는 뜻을 확장해서 설명해보세요.

 

3. 초기 기독교회가 직면했던 어려운 상황을 염두에 두고, 룻다, 욥바와 같은 작은 마을에 신앙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예를 들어 “룻다의 성도들”(32절)이란 문구를 묵상해 보십시오.

 

4. 행전에는 사도들이 일으킨 기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기록된 기적들을 열거해보세요. 그렇다면 기적의 목적은 무엇입니까?(참조 35절, 42절)

 

5. 다비다를 “여제자”라고 부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다비다의 삶은 예수의 제자 됨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요?

 

6. 다비다가 지은 “속옷과 겉옷”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요?

 

7.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던 여인”이란 문구는 그리스도의 이 여제자의 비석에 적합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비석에는 어떤 비문이 적히기를 바랍니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3] 류호준 2018.03.29 1073
699 “누가 당신을 우리의 감독자로 세웠나요?” [1] file 류호준 2018.08.19 33
698 신앙에세이: "헌금 횡령 게이트" [1] file 류호준 2018.08.15 134
697 신앙 에세이: “두 눈으로” [1] file 류호준 2018.08.11 96
696 신앙 에세이: “망망대해 풍랑 속에 일엽편주(一葉片舟)” file 류호준 2018.08.09 138
695 "출애굽 인구와 행렬 거리 측정" file 류호준 2018.08.07 176
694 클린조크: “좋은 놈, 나쁜 놈, 추한 놈” [1] file 류호준 2018.08.06 162
693 일상 에세이: “에코 체임버를 경계하라!” [1] file 류호준 2018.08.04 174
692 신앙에세이: "죄수 바울과 로마군 대대장 율리오 에피소드" [3] file 류호준 2018.08.02 255
691 뒷 이야기: “설교자들 위한 책들”(비크너와 부르그만) [3] file 류호준 2018.07.27 265
690 신앙 에세이: “달과 별들이 떠 있을 때” [3] file 류호준 2018.07.25 187
689 일상에세이: “무엇이 당신의 유일한 위안입니까?” [1] file 류호준 2018.07.24 222
688 신앙에세이: “웃음은 신비로운 약입니다. 좋을 때든 끔직할 때든” [1] file 류호준 2018.07.21 128
687 신앙 에세이: “해시태그(hash-tag)가 된 여인 라합” [1] file 류호준 2018.07.16 154
686 일상 에세이: “경찰관과 소방관” file 류호준 2018.07.15 121
685 일상 에세이: “나이듬과 유머" file 류호준 2018.07.14 128
684 클린조크: "성경적 여성주의"(Biblical Feminism) [2] file 류호준 2018.07.11 313
683 일상 에세이: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file 류호준 2018.07.09 340
682 신앙 에세이: “릴리아 모리스와 찬송가” file 류호준 2018.07.09 787
681 일상 에세이: “사진 찍어 주실 수 있겠어요?” [1] file 류호준 2018.06.20 317
680 신앙 에세이: “찾아갈 만 한 곳 한 군데쯤은~” file 류호준 2018.06.11 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