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천사의 얼굴을 가진 전도자 스데반”

행전 6:8-15

 

[들어가는 말]

 

지난 시간에 우리는 초기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가 큰 갈등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에는 출신 지역에 따라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이 둘 사이에 불거진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진영의 대표 격이 되는 사람들은 서로가 자기들 편에 속한 가난한 과부들에게 더 많은 구제(아마 요즈음 말로 식권을 나눠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좋으리라)가 할당되도록 하다가 충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즉 가난하고 굶주리는 과부들에게 식량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재정이 편파적으로 지출된 것이 발단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사도들도 이런 분쟁과 갈등에서 자유하지는 못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궁핍한 교인들의 처지를 생각하여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헌납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재정 지출을 관장하는 일에 서툴렀고 이로 인해 교회 내에 갈등이 붉어지게 된 것입니다. 즉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사도들은 교회의 제도를 정비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사회봉사직(social service)이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구제(섬김, 봉사)의 대상은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형평성에 맞게 분배가 되도록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누구보다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 예수 부활 생명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두루 살피는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인 동시에 편파적이지 않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초기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는 일곱 명을 선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일곱 명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든든한 인도자(리더)들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선출한 일곱 명의 리더들은 열두 사도들을 보필하여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복음 전파에 정진하는 일에 앞장 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투명한 재정 관리를 통해 구제(사회적 섬김과 봉사)가 정상적으로 시행되도록 할뿐 아니라 사도들과 함께 복음 전파에 힘을 쏟았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일곱 명의 리더(leader) 가운데 한 명인 전도자 스데반 선생에 관한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스데반 집사라고 하지만 이것은 오래된 오독입니다. 스데반은 요즘 우리가 말하는 “집사”는 더더욱 아닙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는 일곱 명을 “집사”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참고로 빌1:1과 딤후 3:8-13을 살펴보세요). 차라리 전도자 스데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전도자 스데반 선생이 하는 일을 보면 그가 단순히 “집사” 역할을 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전도자 빌립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행전 8:4-13, 29-40). 어쨌든 스데반 선생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헬라파의 지도자로서 그리스(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특출한 사람이었습니다.

 

본 단락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은 민간에 행하니.”(8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 선생을 특징짓는 문구에 주의를 기울여 보기로 합니다. (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8절). (2)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10절). (3)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15절). 이 세 가지 표현은 각각 스데반 선생이 처한 당시의 여건들과 관련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사람들에게 큰 기사(奇事, 기이한 일)와 표적(表迹, 겉으로 드러난 형적)을 행할 때 전도자 스데반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奇事)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경우 병을 고치는 신유(神癒, 신의 힘으로 병을 고치는 일) 기적이나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축사 逐邪,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그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 것을 보면(행전 5:12-16) 스데반 선생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기적을 행하는 자들, 푸닥거리를 통해 악귀를 쫓아내는 자들(퇴마사, 무당)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신유와 축사의 기적들은 부활하신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증(sign)들이었습니다. 달리 말해 병마와 같은 것들에 고통당하고 찌들어 사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징들이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기사와 표적들은 영원한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깜빡이 불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와 표적은 스데반이라는 어떤 영험이 많은 사람이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전도자 스데반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현시(顯示)이며, 표적은 억눌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진정 자유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권능)의 드러내 보임입니다. 이것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 선생이 단지 기사와 표적만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가 주시는 영원한 부활생명에 대해서 강하게 전하였음이 다음 이야기에서 분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으로”

 

전도자 스데반이 민간에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고 종종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담대하게 증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교인들이 들고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하게 됩니다. 스데반과 심하게 논쟁하게 된 유대인들이 누구인지 본문이 말해줍니다. 그들은 자유민들로서,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유민들은 아마 주전 63년경에 폼페이우스가 전쟁포로로 로마로 끌고 갔던 유대인들의 후손들로서 자유의 몸이 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위에 언급된 사람들은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들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정착해 살면서 해외에서 같은 곳에서 살았다는 소속감에 근거해서 자기들끼리 고유의 회당 공동체를 예루살렘에 건설했던 모양입니다.

 

[부연 설명: 회당]

 

유대인들은 “회당”이라는 종교적 센터를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회당을 “시너고그”(synagogue)라 하는데, “함께 가다”는 헬라어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모임”이란 뜻입니다(행전 6:9; 계 3:9). 회당에서 유대인들은 모여 기도와 성경봉독 및 강론과 마무리 축도로 안식일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봉독은 고정된 순서에 따라 모세오경(토라)을 읽고, 거기에 곁들여 매번 예언서(우리 성경으로는 역사서와 예언서 모두)에서 한 단락을 덧붙여 읽습니다. 글을 아는 유대인 남자라면 성경봉독과 아울러 해석까지 요청받을 수 있습니다(참고, 눅 4:16-21; 행전 13:15). 회당장은 회당의 예배가 적법하게 진행되도록 책임을 맡았고, 그에게는 돕는 회당 시중꾼이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와 그 뒤로는 회당에서 종교재판도 열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한 재판결과에 따라 율법을 어긴 유대인에 대해서는 재판관 세 사람의 판결이 있으면 채찍으로 벌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벌은 회당장이 집행했습니다.

 

유대인 해외 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예루살렘의 한 회당에서 스데반이 해외 교포출신의 유대인들과 열띤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논쟁이었을까요? 본문에 적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너무도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했을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부활하신 예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mortal being)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제 그를 당신들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그 부활의 영생이 당신들의 것이 됩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오.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복음의 핵심을 전하면서 자연히 유대교가 왜 예수를 죽이게 되었는지, 유대교가 알고 있는 율법과 성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고 질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자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자 그들이 퍼뜨린 악담(11-14절)안에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즉 헬라파 유대인 크리스천인 스데반과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점에서 스데반의 입장을 공격하고 유대인 공회에 고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11절). 즉 모세의 율법에 대해 신성 모독적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거룩한 곳을 거슬러 말했다”는 것입니다(13절). 이 거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런 비난의 내용은 사실상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상에 계셨을 때 예수님도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이해와 그 관행들에 대해 매우 직설적으로 비판적이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서 전도자 스데반을 비롯한 초기 예루살렘 교회 내에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헬라파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의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이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행동은 특히 이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충실하게 율법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살았고 게다가 자기들끼리 회당 모임을 가질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도자 스데반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되자 화가 난 해외교포 출신의 유대인들은 전도자 스데반을 모함하여 이렇게 유대인 산헤드린 공회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율법선생)들을 충동시켜 와서 스데반을 잡아가지고 산헤드린 공회에” 세웠습니다(12절). 그들이 스데반을 잡기 위해,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예루살렘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주 못된 짓을 도모하게 됩니다. 은밀하게 찾아가서 설득하여 스데반에 대해 악담을 퍼뜨리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유인하고 설득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너무 뻔하지 않겠습니까? 매수(買收) 한 것입니다. 학연이나 지연이나 혈연관계를 동원해서 혹은 돈 봉투나 선물 따위로 남을 꾀어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돈에 자기들의 영혼을 판 수많은 사람들도 불쌍하지만, 악한 일을 위해 돈으로 사람을 사려고 한 그 사람들은 더더욱 불쌍한 인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산헤드린 공회에 거짓증언들로 세웠습니다. 위증하게 한 것입니다. 법정에서 통용되는 가치는 오로지 “진실”인데 그들은 매수하여 거짓 증인들을 세운 것입니다. 참 악질적이고 나쁜 짓입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그런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아마 자기들의 조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가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

 

유대인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 서있는 전도자 스데반입니다. 사실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산헤드린 공회에 모인 대부분의 무리들과 방청인들은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스데반을 모함하고 그를 제거하려드는 늑대 무리들입니다. 스데반은 사자 굴속에 던져진 먹잇감에 불과 했습니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저 야만적인 사람들 앞에 선 전도자 스데반. 사람들이 주목하여 스데반을 쳐다봅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는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이라. 그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얼굴 어느 구석에도 어둠의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과 확신과 당당함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달리 말해 하나님의 영이 스데반 안에서 빛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전에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누가 12:11-12) 아마 성령께서 전도자 스데반에게 이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전도자 스데반은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감지하였을 것입니다. 심지어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직감했을지도 모릅니다. 독자들로서 우리는 그가 바야흐로 예수를 뒤따라 고난과 죽음을 당할 순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동시에 장차 올 영광스런 세상의 찬란한 빛이 그의 얼굴에 서렸습니다. 천사의 얼굴처럼 그의 얼굴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사람의 얼굴,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죽음 앞에서도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굴로 말하는 사람, 얼굴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전도자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영하는 얼굴의 소유자였습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을 때에만 우리 안에서 내비치시는 광휘는 어둔 세상을 밝히게 될 것입니다. 아마 재판정에서 스데반의 얼굴을 쳐다보다 그 얼굴의 천사의 얼굴과 같은 모습에 넋을 잃게 된 사람들 중에는 후에 개종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적대적 환경에서 당당함과 평온함과 확신에 찬 결의를 갖게 하였는지 두고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그 얼굴은 그들이 걸어가는 고단한 신앙의 길에 빛을 비춰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얼굴인 그대의 얼굴에 책임지십시오!

교회여, 그리스도의 얼굴인 그대의 얼굴에 책임지십시오!

 

 

[생각해 봅시다]

 

1. 스데반을 집사라고 부르는 것과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교회의 직분에 대해 이야기 해보세요.

 

2. 스데반과 논쟁을 하게 된 상대방 그룹들은 누구이며 왜 논쟁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왜 스데반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까?

 

3. 진실을 파괴하면서까지 자기의 조직을 위해 매수행위를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없나요? 어떤 행위들이 그런 일들일까요?

 

4. 전도자 스데반이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과 성전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5. 우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나요? 누군가 당신의 얼굴을 기억하며 잠시 쉬었던 신앙의 순례 길을 다시 걷게 된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겠습니까.

 

6. 본문에서 어떤 메시지가 당신의 마음에 깊이 찾아옵니까?

 

[저만치 떠나는 가을 못내 아쉬워서]

가을이 못내 아쉬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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