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에세이: "나의 네덜란드 유학기"

2007.11.03 20:53

류호준 조회 수:22429

『개인적 여정』
 


바다와 제방들, 풍차와 튜울립, 젖소들과 배(舟)들, 수로들과 자전거 길들, 고색창연한 교회들과 문지방이 닭아 버린 박물관들, 자전거들과 카페들, 아인트호벤의 필립스사와 암스테르담의 아약스 축구팀, “그 일기”의 안네 프랭크 (Anne Frank) 소녀와 “주는 나의 피난처”의 코리 텐 붐(Corie ten Boom) 여사, 그리고 히딩크 축구 감독 등, 이런 것들이 네덜란드라 하면 지나친 환언법일까? 물론 네덜란드인들이 자랑스럽게 말하듯이, “하나님은 하늘을 만드시고 네덜란드인은 땅을 만들었다”라고 하는 땅 개척의 네덜란드와 네덜란드인들. 물론 주의 깊은 신학도들은 언약 신학자 보에시우스, 코케우스, 알미니안주의의 창시자 알미니아누스, 그리고 도르트 종교회의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2년간의 미국생활을 뒤로하고 대서양을 건너 두개의 이민가방을 들고 유럽의 관문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에 내린 것은 1991년 10월 하순경이었다. 이미 미국 오대호 연안의 추위와 폭설을 경험한 나로서는 눈이 시릴 정도의 진 초록색 잔디가 마치 엘리스의 “이상한 나라”(Wonderland)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 후 가족들과 합류하기까지 정확하게 한 달 동안 나는 하늘의 햇빛을 본 날이 없다. 회색 빛 하늘, 우중충한 옷차림들, 예측 없이 내리는 시린 빗방울들, 비를 즐기기나 하듯 우산 없이 거니는 젊은이들, 두어 평 남짓한 독신자 기숙사방, 무척이나 작은 소형차들, 이상야릇하게 들렸던 네덜란드어… 이런 것들이 나의 네덜란드와의 첫 만남이었다.

내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Amsterdam)을 알게 된 것은 1972년 경, 자유대학교의 철학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손봉호 선생님의 철학 강의를 들으면서였다. 그를 통하여 볼렌호벤 (D.H.Th.Vollenhoven: 1892-1978)이니, 도에베르트(H. Dooyeweerd: 1894-1977)니, 반 퍼슨(C.A. van Peursen: 1920-)이니 하는 발음하기조차 힘든 철학자들의 이름을 접하게 되었고, 그때 들은 “기독교적” 철학 강의에 심취한 나는 언젠가 그 대학으로 가서 공부하였으면 하였다. 물론 철학이 아니라 신학, 그것도 구약학이 되었지만, 신-칼빈주의(Neo-Calvinism)의 산실인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로의 유학은 여러모로 의미 깊은 개인적 여정이 되었다. 더욱이 미국의 네덜란드계 개혁파 신학 교육기관인 칼빈 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육받고 그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나로서는 자유대학교에서의 신학연구는 자연스러운 학문적 귀향인지도 모른다. 여러 면에서 나는 사전에 많은 이익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기도 하였다.


                                                               『“기독교적” 대학교』

유서 깊은 고도(古都) 암스텔담에 위치하고 있는 자유대학교는 네덜란드 전체에 산재해 있는 13개 대학교들 중의 하나이다. 1880년 10월 20일에 세계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중의 하나로 (다른 두 사람은, 자유대학교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와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벤자민 월필드[Benjamin Warfield]) 추앙받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에 의해 세워진 이후 신-칼빈주의의 본산으로 세계에 개혁주의 신학의 수원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자유대학교는 현재 약 15,000여명의 학생과 3,500명의 교수 및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독교적” 종합대학이다.

자유대학교는 그 기원에 있어서 기독교 대학이며, 이 사실은 자유대학교가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매우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자유대학교는 규범들과 가치들, 철학과 종교를 통해서 표출되는, 사회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심각하게 다룸이 없이는 학문적 연구가 수행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가능하다면, 자유대학교는 이러한 사회적 역할 위에 자신을 모델화 하려고 힘쓴다. 이것은 대학 설립의 근본적인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사실은 지금까지 학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자유대학교는 교육과 연구의 양대 기능을 통하여 다양한 학문의 영역에 걸쳐 매우 적극적이며 현재 15개 학부에 47개의 학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효율성을 살리기 위하여 모든 기구들과 시설들이 한 캠퍼스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특별히 16층의 육중한 콘크리트의 괴물(?) 본관 건물 안에는 서점, 우체국, 선물점, 컴퓨터점, 카페 및 학생 식당 등을 포함하고 있다. 본 캠퍼스 외에 자전거로 약 5분 거리에는 기숙사 아파트들이 있다. 캠퍼스는 암스테르담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동차나 대중 교통수단들을 통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다양한 버스 노선이나 전차를 통하여 암스테르담 도시 한복판으로 연결되며 학교 바로 근처에 있는 세계 무역회관에 정차하는 철도를 통하여 네덜란드의 유명한 국립 공항 스키폴(Schiphol), 그리고 암스테르담 중앙역 및 그밖에 전국의 어느 곳에도 쉽게 다다를 수 있다.


                                                         『하늘 가까이 있는 신학부』

자유대학교에서의 신학부의 위치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외형적 상징성이 있다면 그것은 대학 건물에 신학부가 위치하고 있는 물리적 자리를 언급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신학부는 학부들로서는 본관 16층 건물의 맨 위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밑으로 철학부, 역사학부, 문학부들이 각 층마다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배열에 대해 학설들이 구구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가장 설득력 있고 재미있는 학설(?)은 자유대학교의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 헤르만 도여베르트(1894-1977)의 우주법사상(wetidee[네] cosmonomic idea[영]) 혹은 선험적 근본이념(transcendental ground idea)에서 유출되는 15가지 개체구조(individuality structure) 및 양상구조(modal structure)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자연법으로 불리는 영역과 또 다른 하나는 규범 및 문화적 영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 영역들은 각각 다양한 양상들과 함께 특유의 주권과 언어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들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신앙적 양상이며 그 아래로 윤리, 법률, 심미, 경제, 사회, 언어, 역사/문화, 논리/분석 (이상은 규범 문화적 양상), 감각/심리, 생물, 물리, 운동, 공간, 수적(이상은 자연법 양상들) 양상들이 각각의 주권적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늘 가까이 있는 신학부가 어떻게 땅의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 자유대학교의 신학적 전통이기도 하며 이것은 바로 신-칼빈주의의 진원지인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지대한 신학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자유대학교의 신학부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두 가지 구체적인 역사적 문제점을 언급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라고 자유대학교의 조직 신학 교수였던 베인호프(J. Veenhof) 박사는 말한 적이 있다("Honderd jaar theologie aan de Vrije Universiteit" in Wetenschap en Rekenschap: Een eeuw wetenschapsbeoefening en wetenschapsbeschouwing aan de Vrije Universiteit, [Kampen: Kok, 1980], 44). 즉 자유대학교의 설립 역사는 그 당시의 국가 교회라고까지 할 수 있던 네덜란드 국가 개혁 교회(Nederlands Hervormde Kerk = 이하 NHK)가 처해 있던 교회적 그리고 신학적 상황을 배경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에 언급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GKN]에 관한 상세한 역사적/신학적 기술로는 J. Veenhof, 'Geschiedenis van Theologie en Spiritualiteit in het Gereformeerde Kerken," in 100 Jaar Theologie: Aspecten van een Eeuw Theologie in th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1892-1992), ed. M.E.Brinkman [Kampen: Kok, 1992]를 참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는 1892년으로부터 출발하려 한다. 그 이전에 두 그룹은 일반적으로 네덜란드 국가 개혁 교회(NHK)로 불리던 국교회로부터 분리해 존재하고 있었다. 1834년에는 ‘아프스케이딩’(Afscheiding: 분리)의 그룹이, 1886년에는 ‘돌로앙티’ (Doleantie: 분리, 반대)의 그룹이 있었다. 1892년에 이 두개의 그룹들이 연합하여 네덜란드 개혁교회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 이하 GKN)를 이루게 된 것이다. 영적 혈족관계의 이 두개의 그룹들의 대표자들을 연합하도록 한 신학적 구심점은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집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개혁주의적 전통이란 신앙고백 문서들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교리들과 영적인 경험 및 삶을 진실 되게 추구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삶에 대한 가장 심각한 중요한 이슈들로는 (1)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이슈; (2) 창조세계의 운용에 관한 이슈; (3)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된 인간을 향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이슈 등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창조와 구속의 문제를 동등하게 포괄적으로 심각하게 취급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확립이었다. 이러한 신 중심적(神中心的) 경향은(Theocentric orientation) 인간 삶의 영역을 단순히 개인에만 국한시키는 개인적 경건주의에 머무르지 않게 하였으며, 그 전망을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국가와 사회로 확대시킬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혁주의적 전망은 기독교 학교 제도(Christian School System)의 발달과 기독교적 정치의 실현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학문적 차원에서의 신학교육의 필요성은 철저한 개혁주의적 각인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창설자 아브라함 카이퍼와 그의 사람들에 눈에 대학의 이상이 어떻게 비쳐졌든지 상관없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의 생각 속에 신학부는 대학 속에 중심적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자유대학교 신학부』

신학부의 학풍은 “철저함,” “꼼꼼함,” “세심함”등 과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협소함으로도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허세를 부리지 않고 근면, 검소하게 학문하는 모습을 사방에서 볼 수 있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소박한 교수들의 부지런함과 학문에 거는 철저성은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의 오랜 전통의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강력한 개혁주의 전통에 그 신학적 뿌리를 두고 있는 신학부의 교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재미있는 전통중의 하나는 정교수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보관하여 걸어 놓는 일이다. 자유대학교의 꽃은 신학부였기에 신학부의 교수들의 면모는 곧 자유대학교의 산 역사이기도 하다. 신학은 오랜 학문적 전통과 기반 위에 세워지기에 지나간 교수들을 지금의 교수들과 함께 언급하여 신학부의 학풍과 체취를 살펴보는 것도 과히 지나친 일을 아닐 것 같다.

자유대학교의 신학부는 초창기부터 개혁주의 신학을 그 모토로 설정하고 출발하였다. 우리는 신-칼빈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두 사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가 그들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년 10월 20일(수) 오후 1시 암스테르담의 “새 교회”(Nieuwe Kerk)에서 열린 자유대학교 개교식 시에 행한 연설 제목 그대로 “영역 주권론”(Souvereiniteit in eigen kring)을 제창하고 구속신학과 아울러 창조신학의 기반을 넓혀 기독교 문화 창달에 크게 공헌한 신-칼빈주의의 태두라 할 수 있으며, 그가 1896년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정식 대학 개교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으면서 행한 제 6회 스톤 강연(Stone Lecture)의 열매인『칼빈주의 강론』(Lectures on Calvinism = Het Calvinisme, Amsterdam, 1900)과 함께, 그의 역작인『신학 대사전』(Encyclopaedie der heilige godgeleerdheid, 3 vols [1892])은 그와 함께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기초를 다지면서 개혁주의 신학의 기반을 놓은 헤르만 바빙크의『개혁주의 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 4 vols. [1892])과 함께 신-칼빈주의 프로그램의 양대 기둥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신-칼빈주의 프로그램의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요소로서는 (1) 한편으로는 19세기 말 유럽의 개신교 신학들에 편만해 있는 자유주의적 현대신학과 도덕주의적 윤리신학에 대항하고, 또 한편으로는 종교 개혁적 신학의 “새로워짐”을 주장하고 나선 프로그램이다. 물론 양자 간의 접근 방식이 다소 차이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전투적인 카이퍼는 조심스러운 바빙크 보다는 좀 더 결단력 있는 측면을 보여 주었는데, 특별히 카이퍼는 자유주의적 윤리신학에 대하여 신학원리상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반면 바빙크는 그들과의 공통점을 인정하곤 하였다; (2) 종교개혁신학의 갱신과 변호는 자연히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사려 깊은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성경의 유기적 영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하여 성경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통한 계시의 전달을 약화시키지 않는 길을 열어 놓게 되었다; (3) 신-칼빈주의의 가장 특색 있는 영역은 “일반은총” 개념의 광범위한 확장 프로그램이다. 일반은총은 죄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신자들로 하여금 문화와 역사의 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준다. 일반 은총론은 왜 “창조”가 항상 개혁주의 사상과 행동에 있어서 중요한 방향설정의 기점이 되고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신-칼빈주의의 중요한 이슈들은 자유대학교가 신학교를 목표로 출발하지 않고 대학교로 출발하여 대학교로 남아 있으면서도 신학 없는 대학교를 상상할 수 없도록 만든 신학적 이유이기도 하다.


                                                                  『신학부의 학제 구성』

신학부의 학제는 박사과정 입학 이전까지의 공적 교육기간은 약 6년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8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신학공부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인문계 고등학교(Gymnasium)를 마친 후 바로 대학의 신학부에 진학하여 신학 공부를 하게 된다. 물론 고등학교 과정시 고전어(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및 현대어 (영어, 독어, 불어 등)를 습득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의 대학제도상(한국도 마찬가지) 대학 2학년이상 수학한 자에게 네덜란드 대학의 1학년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대학의 신학부 과정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구별될 수 있다.

제 1 단계는 신학의 기초를 놓는 해로 일 년 반 정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신학과목들이 제공된다. 이 과정은 종합시험으로 그 끝을 맺는다. 제 2 단계는 기초 신학 석사 연구과정으로 약 3년 정도가 소요되며 학생들은 신학의 모든 분야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이 기간을 성공리에 마치면 제 3단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된다. 제 3 단계는 고등한 신학 석사 연구과정으로 공식적 교육의 마지막 단계이다. 약 4년 정도 소요되며 이 기간은 학생이 자기의 전공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전공 및 부전공을 선택하여 연구한다. 예를 들어 신약을 전공하는 학생은 부전공으로 아람어나 시리아어를 반드시 택해야만 한다.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이 기간 중 일 년 간 전문적인 목회 훈련과정을 밟아야 한다. 제 3 단계는 최종적으로 논문을 씀으로써 마치게 된다(네덜란드어로는 독토랄[doctoraal thesis] 논문이라 부르는데, 박사학위 논문인 doctoral dissertation과는 구별된다). 이 논문은 적어도 3명의 전공 교수 앞에서 구두시험으로 방어되어야 하며 이 방어를 성공리에 마치면 학생에게는 독토란두스(Doctorandus; 약칭 drs.) 학위가 주어진다. 독토란두스 (Doctorandus)는 박사가 될 소양이 있다는 뜻으로, 이제부터 이 학생은 독자적인 학문적 연구에 종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가 전공하고 싶은 분야의 주임교수의 허락에 따라 그는 박사학위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유학하기를 원한다면, 대부분의 영미의 학교들에서도 그렇듯이 한국에서 신학교 과정(M.Div.)을 마치고 유학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아와서 일할 토양 속에서 교육을 받고 떠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유학을 갈 경우, 그곳에서 독토란두스(Doctorandus)과정에 입학하게 되는데, 약 1년여 이상을 네덜란드어 및 기타 부족 과목 수강등 입학 준비과정을 마쳐야 하며 그 후에 2-3년간 전공 과목수강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토란두스 논문(doctoraal thesis)을 제출하게 된다. 그후에 박사학위 과정은 전공 담당 주임교수가 먼저 과정 입학 허락을 해야 하며 박사학위 위원회의 최종적 인준에 입학이 허가된다. 그 후에 학생은 실질적으로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연구원(onderzoeker)의 신분으로 학위 논문 테마를 교수와 논의하여 결정한 뒤 수 년 간의 길고도 힘든 학위 논문 준비에 들어간다. 학위 논문은 영어, 독어, 불어, 네덜란드어 중 택일하여 어느 언어로든지 쓸 수 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에서의 학위는 한마디로 자기와의 고독한 싸움의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지도교수의 지도와 채찍, 그리고 격려와 자극을 받으며 다른 사람이 밟지 않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밟아 간다.


                                                            『최후의 날은 최상의 날이어라』

지도교수(Promotor)의 인도아래 논문이 다 준비되면 최종적으로 대학의 박사위원회의 출판 인준을 받아야 하며, 동시에 학위 논문 공개 방어식 날짜도 잡아야 한다. 한 사람의 학위 수여를 위하여 한 날짜가 개별적으로 정해지고 모든 교수는 이 예식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다. 마치 결혼식 날짜를 잡고 예식장을 잡는 것과 동일하다. 방어식이 거행되기 적어도 한 달 전 즈음에 학위 논문은 출판되어야 하며 약 80권을 학교에 제출한다. 이 책들은 네덜란드와 유럽의 중요한 대학에 배포가 된다. 한편 대학에서는 학위 논문에 대해 공격할 다른 대학의 정교수급을 학자들을 비밀리에 확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 달 동안 학위 논문을 자세히 검토하여 공격하도록 요청한다. 드디어 “그 날”이 오면 정해진 멋진 예복(턱시도)을 입고 두 명의 들러리를 대동한 채로 정해진 예식장에 입장한다. 그날은 그가 수많은 방청자들 앞에서 그가 보낸 지난 수년간을 가장 적절하게 결산해야하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까만 학위 까운을 입고 엄숙하게 앉아 있는 교수들의 얼굴들이 마치 장례식을 집전하는 장의사처럼 보인다. 타 대학에서 온 공격수들은 (공격자들은 적어도 5명) 마치 먹이 떼를 찾아 급강하하는 독수리 떼처럼 날카로운 발톱으로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 시간이 왜 그렇게도 길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던지! 그 시간이 지나고 교수들이 잠시 퇴장한다. 잠시 후 그들은 식장에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 박사학위가 통과되었다는 선언을 한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잔치집으로 급변한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데』

“공부가 인생에 전부가 아니다”는 것은 외국에서 공부하려는 사람들, 특별히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잠언이다. 물론 “공부”를 좁은 의미에서 이해하는 한 이 말은 사실이며, 따라서 책상에서 얻는 지식은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이 성육신을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 조항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한, 신학 하는 사람은 인간 삶의 진솔한 내면들을 진지하게 취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외국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모습들 — 관습과 문화, 사고방식과 예절, 예배와 휴가, 정치와 선거, 국토개발과 환경 보존등 — 을 살펴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이러한 일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일이나, 학위 논문을 쓰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인식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Kerk in, Kerk uit, Museum in, Museum uit (“교회 안으로, 교회 바깥으로, 박물관 안으로, 박물관 바깥으로”). 이 말은 네덜란드인들이 어른이 된 후 그들의 유년기를 기억하면서 어머니의 손에 강제로 끌려 신물나게(?) 들락거렸던 “두 곳”을 표현한 관용구이다. 이 관용구속에서 우리는 네덜란드인들의 정신과 인격을 형성하는 두개의 기둥, 즉 종교와 문화, 하늘과 땅의 만남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종교물 소개와 문화물 소개는 이러한 신학적 의미에서 이해되고 읽혀졌으면 좋겠다.

암스테르담에는 유서 깊은 교회당들이 많다. 종교적 관용의 정신은 보여준 그들에게는 1306년에 시작된 옛교회(Oude Kerk), 1408년에 그 기원을 찾는 새교회(Nieuwe Kerk), 안내 프랭크가 나치의 공포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창문으로 바라보며 희망을 간직했던 서부교회(Westerkerk)와 그 첨탑, 렘브란트에게 환상의 영감을 공급하곤 하였던 남부교회(Zuiderkerk; 1611년)등이 있으며, 이 말없는 역사의 증언들은 찬란했던 과거의 거울들로 지금도 그 영화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한편 국립 박물관(Rijksmuseum)에는 네덜란드인들의 신앙과 경건을 화폭으로 대변해 주는 국보적 17세기 화가 렘브란트의 가장 유명하고도 가장 큰 대작 야경꾼(Nachtwacht, 1638-42; 크기 359 x 438 cm)을, 반 고호 미술관(Rijksmuseum Vincent van Gogh)에서는 “감자 먹는 사람들”(aardappeln eeter)을 비롯한 수많은 반 고호의 그림들을, 유럽 3대 교향악단에 이의 없이 손꼽히는 암스테르담 교향악단과 그들의 유명한 연주회장(Concertgebouw)에서는 일 년 내내 세계 정상급 연주가들의 연주를 접할 수 있다. 또한 공포와 인내의 신비한 협주곡을 들려주는 안내 프랭크의 집(Anne Frankhuis), 네덜란드인들의 영원한 화가 렘브란트 생가(Rembrandthuis), 해양국가 네덜란드의 역사와 맞물리는 국립 해양 박물관(Rijksmuseum Nederlandsche Scheepvaart), 암스테르담의 유명한 꽃시장(Drijvende Bloemenmarkt aan het Singel), 그리고 암스테르담 근교의 현란한 야외 꽃 정원(Keukenhof)등은 네덜란드 체류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다.


                                                  『여러 나라 말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면…』

기숙사에 입주하여 살던 처음 며칠간에 벌이진 일이다. 아직 네덜란드어가 서툴고, 역시 영어가 훨씬 편하였던 나였기에 문의 사항이 있으면 기숙사 담당 여직원에게 늘 영어로 의사를 소통하였다. 삼십대 초반의 무뚝뚝한 그녀의 일은 기숙사 열쇠를 관리하고 환경미화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는 네덜란드인이었다. 하루는 문의사항이 있어서 그녀의 사무실에 갔는데, 한 외국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녀에게 무엇인가 물어 보는 것이었다. 어깨너머로 들어보니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독일어였다. 여자 직원은 거침없이 독일어로 답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때마침 또 다른 여학생이 기숙사 입주에 관해 문의하러 사무실에 들어섰다. 이번에 그들이 주고받는 언어는 불어였다. 나는 기가 막혀 풀이 죽었다. 얼마 후 그녀와 이야기하는 도중 나는 그녀가 유대인이란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는 지금 나의 전공분야인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 (물론 고대 히브리어가 아니라 현대 히브리어이긴 하지만)를 거침없이 말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자기는 적어도 6개 국어는 자유스럽게 말한다고, “네덜란드어”로 주절거리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그녀 앞에서 몸 둘 곳을 몰랐다. 보따리를 싸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만 굴뚝같았다. 특별히 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현대어들(영어, 독어, 불어, 네덜란드어)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다면(적어도 읽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자산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 혜택을 지금 나는 적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 1996년도에『목회와 신학』에 실렸던 글을 약간 수정하였다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066
817 Book Review: Interpretation 59 (October, 2005), pp. 428-429에 실린 류호준 교수의 서평 류호준 2006.10.03 88906
816 설교: “감사: 쟁기질 하듯이 그렇게”(추수감사절 설교문) [1] 류호준 2007.11.18 50950
815 시: 유고시 1 편 [7] 류호준 2007.06.12 34537
814 신학 에세이: “예언자들의 소명과 우리의 소명”(그말씀 12월호 게제) 류호준 2010.11.09 33983
813 “성금요일과 부활절 그리고 세월호” [4] 류호준 2014.04.18 31441
» 에세이: "나의 네덜란드 유학기" [2] 류호준 2007.11.03 22429
811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서 큐티 27) 류호준 2011.07.14 21356
810 설교: "복음의 긴급성"(눅 10:1-20)(490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 [1] file 류호준 2007.10.29 21070
809 설교: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 류호준 2010.09.23 20895
808 회고 에세이: " “쓰지 말아야 했던 편지” [7] file 류호준 2010.07.23 20792
807 로마서 묵상(26): “하나님 도와주세요!” file 류호준 2010.11.03 20260
806 강해논문: "예레미야의 새 언약" (렘 31:31~34) file 류호준 2006.05.21 20229
805 설교: “환대의 향기” file 류호준 2010.10.10 19866
804 신앙 에세이: "버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6] 류호준 2008.08.12 19536
803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어요!”(묵상의 글) [2] 류호준 2008.02.19 19490
802 설교: “거인을 죽이는 강심장” file 류호준 2010.12.05 19463
801 일상 에세이: “친구 하덕규 이야기” [4] file 류호준 2011.01.09 19379
800 신학 에세이: "겸손과 교만과 정의"(그말씀 3월호 게재예정) 류호준 2011.01.20 18648
799 번역에세이: 희망 (바라는 것) 류호준 2007.12.07 18628
798 로마서 묵상(24): “제발 싸우지 마!” file 류호준 2010.10.06 17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