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설교: “환대의 향기”

2010.10.10 23:40

류호준 조회 수:19866

“환대의 향기”

누가 15:1-10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터질 것 같은 세상

 

요즈음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압감, 압력, 긴장, 근심과 염려, 불안 등이 사방천지 공중에 가득한 것 같습니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고, 자녀들 대학 등록금은 일 년에 천만원대에 이르고, 청년실업률은 모든 젊은이들을 긴장시키고, 한반도의 기류는 그리 밝지 못하고, 기후와 날씨까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남북 간의 관계도 예측불허이고, 경제 기후 역시 흐림입니다.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가 도처에서 들립니다(롬 8:22). 대중 미디어 매체에서 보여주는 사회적 국가적 소용돌이 회오리바람들 가운데서 일상의 보통 사람들은 좀 더 참을성이 없어지고 쉽게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며, 죽고 사는 심각한 문제도 아닌데 투덜대고 신경질을 부리고 불평하고 구시렁대는 모습입니다. 비유로 하자면 요즈음 사람들은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휴화산(休火山)들입니다. 신앙의 차원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나태, 권태, 귀찮음, 덧없음, 허전, 무료, 짜증, 분노, 무기력, 의미 없는 몸놀림, 지루한 일상 등과 같은 것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불만 가득한 이 세상에 신선한 바람이 불 수 있을까요? 방금 전 읽은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불평과 짜증으로 가득한 사람들 가운데로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으십니다. 세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잃어버린 양 비유, 잃어버린 동전 비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탕자(蕩子)의 비유입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을 하신 것은 불만투성이의 바리새인들과 종교학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불만 가득한 사람들

 

그들은 예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수군거리며 예수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며 그들과 함께 지내실 뿐 아니라 그들과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나 종교 학자들은 사람을 구별하여 사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귈 사람과 사귀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사람들을 부류로 나누어서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쓸 만한 사람, 못 쓸 사람, 괜찮은 사람, 근처에 가서는 안 될 사람 등으로 구별 지었습니다. 물론 그런 판단을 할 때는 언제나 여러 가지 종교적(신앙적)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율법 준수였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 생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종교예식이나 할례, 음식 규례나 정결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고상한 율법준수의 엄격함은 있어도 신앙생활의 기쁨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언제나 심각하고 엄숙하였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천박한 자들의 하찮은 소란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천한 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기셨습니다.

 

 

“불만 vs. 환대”

 

따라서 그들의 불만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영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들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편이 된다는 뜻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불만과 불평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환영하고 환대하고 받아들이실 때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불평과 불만”은 예수님의 “환영과 환대”와 대척점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종교적 지도자들이 예수에 대해 보인 다양한 반응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따져 묻고 다그치거나 화를 내고 분을 품거나 아니면 죽일 계획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다양한 반응들 가운데 하나가 불만과 불평이었는데, 불평과 불만은 예수께서 누군가를 환대하거나 영접하게 될 때 그들이 보였던 반응입니다. 투덜대고 못마땅하거나 달갑지 않게 뒷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쑥덕거림, 그들의 불만, 그들의 투덜댐, 그들의 달갑지 않은 표정과 대조되는 모습이 예수의 환한 얼굴, 영접, 환대, 환영, 받아들임입니다. “불만과 환영” “쑥덕거림과 환대.” 이것은 언제나 함께 가는 한 쌍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환대하면 결코 그에 대해 쑥덕거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면(환영, 영접) 그에 대해 투덜대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주제, 두 가지 반응에 대해 베드로전서가 잘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본문은 독자들에게 제자의 길(道)을 걸으라고 권면합니다. 그 권면들은 마치 지혜의 말씀들을 모아놓은 듯합니다. 예를 들어,

       ․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조심하라.”

       ․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아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착한 청지기들처럼 서로를

         섬기고 봉사하라.”

       ․ “봉사할 때도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그리고 이 말씀입니다.

       ․ “불평하지 말고 서로에게 환대하라.”

       ․ “쑥덕대거나 뒷말하지 말고 서로에게 환대하라.”

 

영어에 ‘병원’은 ‘hospital’이라고 합니다. ‘환대’는 ‘hospitality’라고 합니다. 호텔업을 ‘hospitality business’ (환대를 전문적으로 하는 직종)이라는 본뜻입니다. 모두 ‘받아들임’과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기쁨이 오는 길

 

예수님은 구시렁대고 불만 가득하고 쑥덕거리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비유들을 말씀하시면서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기쁨이 어떠한지, 어떤 기쁨이 진정한 기쁨인지, 그 기쁨을 그려주십니다.

      ․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의 목자의 기쁨, 목자는 그 양을 어깨에 들쳐 메고

       기뻐합니다.

      ․ 어떤 여자가 등불을 밝히고 온 집안을 뒤지며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마침내 잃었던 동전을 찾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찾자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즐거워합시다. 내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좋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잠깐만 멈추십시오! 이 짧은 두 개의 비유들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꼭 토를 다셨습니다. 일종의 논평을 다신 것입니다. “자,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이렇게 말입니다. 마치 “자, 귀가 있는 자들은 내가 한 말을 들을지어다.” 아니면 “자, 너희가 전해 들었거니와 나도 너희에게 말하노라”처럼 토씨를 다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그 비유에 대해 뭐라고 논평을 다셨습니까?

       ․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늘에 있을 기쁨에 대해서였습니다.

       ․ 하나님의 천사들이 맛볼 기쁨에 대해서였습니다.

       ․ 회개에 대한 아주 영적이고 종교적인 언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누가 15장의 비유들을 읽어가다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하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비유인 ‘탕자의 비유’를 읽어보면 이전 두 개의 비유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 끝에는 예수님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논평이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의 끝에는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말씀하는 내용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큰 형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말만 있습니다. “아들아, 지금은 흥겨운 때고, 마땅히 기뻐할 때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비록 예수께서 이 비유에 대해 논평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독자들은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겁니다.

 

어쨌건 아버지의 기쁨, 여인의 기쁨, 목자의 기쁨 안에는

       ․ 찾는 일,

       ․ 마침내 찾음,

       ․ 집으로 돌아옴,

       ․ 귀향,

       ․ 달려 나가는 아버지,

       ․ 눈물로 부둥켜 얼싸안는 아버지와 아들,

       ․ 동전을 손에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여인,

       ․ 어깨에 들쳐 메고 기뻐 소리 지르는 목자 등이 있습니다.

 

천상에서 오는 기쁨,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기쁨은 언제 드러납니까? “은혜로 가득한 환대”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잃어버린 것 하나에게까지, 잃어버린 것 마지막 하나에게까지 여러분을 가도록 하게 하는 그런 ‘환대’입니다.

 

 

“환대의 삶은 예배로부터”

 

“자리를 마련함: 기독교 전통인 환대를 회복하다”(Making Room: Recovering Hospitality as a Christian Tradition)라는 책에서 저자 크리스틴 폴(Christine Pohl)은 말하기를 “환대의 삶은 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관대하심을 인식하는 예배로부터 환대의 삶은 시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일 겁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오로지 반문화적(counter-cultural)인 친절을 구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한때는 잃어버린바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발견되었고 그 은혜에 압도되었고 그 은혜로 구원받았고 그 은혜로 되찾은 인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환대를 베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포옹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경험, 우리의 지식, 우리의 취향, 우리의 느낌에 비례합니다. 풀어 말하자면

       ․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어야,

       ․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아야,

       ․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적이 있어야,

       ․ 하나님의 은혜를 느껴본 일이 있어야

               - 우리도 다른 사람을 포옹할 수 있을 것이며

               - 그런 포옹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행동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 성례의 물두멍 앞에서 우리가 받은 세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 성례의 식탁에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환대받고 있구나!” 하는 기쁨, “내가 환영받고 있구나!” 하는 기쁨은 여러분이 그 양, 그 동전, 그 떠돌던 아들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한 때는 잃어버린 자였지만 지금은 찾은바 된 자이고, 한 때는 보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보게 되었습니다.”라는 찬송을 읊조려보십시오.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 찬송 305장).

 

환대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즉 여러분이 누군가를 대면하듯이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넉넉하심을 직접 경험하고 느껴야 비로소 환대와 환영의 팔을 벌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이 비유들 안에 묘사되고 있는 기쁨은 여러분 자신이 마지막 하나까지를 찾으려고 애쓰다 마침내 발견하고 그래서 축하하고 즐거울 할 때, 벼랑 끝에 있는 그것에 손을 펼쳐 끌어내고, 보듬고 돌보고 얼싸안고 기뻐 소리 지를 때, 비로소 그 기쁨은 가장 충만한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you.).

 

 

공동체의 환대

 

그러나 이 기쁨은 자기 혼자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혼자 감격하여 부르는 찬송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교회)에서 환대라는 것은 오직 ‘나만을’ 혹은 ‘나에게’로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기쁨이고 공동체의 환대여야 합니다.

 

목사의 가장 큰 두려움이 있다면 “오늘 설교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설교 가운데 최악이었어!” “요즈음 헌금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혹은 “왜 이 교회는 그 찬송만 불러!” “강단에서 이야기들만 계속하시면 나는 더 이상 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거야!”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로서 그런 말들은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가장 두려운 말이 있다면 길거리에서 어떤 분이 “목사님, 지난주에 교회에 방문했는데 누구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하는 소리입니다.

 

환대, 영접, 받아들임, 돌봄, 기꺼이 손을 내 밈… 우리 교회 공동체는 이런 환대와 환영과 영접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각 사람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를 환대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영접해야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을 뻗어 닿아야 할 범위, 우리가 찾아 나서야할 범위, 여러분이 포옹하고 얼싸안아야할 범위는 그리스도 자신이 손을 내밀어 닿고 찾고 얼싸안았던 만큼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차리십니까? 이 말에 담긴 이중적 의미를 알아차리십니까? 즉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팔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팔로서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포옹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자신을 포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회퍼 식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손과 팔이 되기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섬겨도 되겠습니까?” “제가 봉사해도 되겠습니까?” 식당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교회에서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온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손을 펼쳐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품에 안으시고 환대하시는 교회(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유년 주일 학교 아이들의 입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의 입에서, 청년들의 입에서,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의 입에서, 집사님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환대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저는 그리스도의 손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 사역위원회의 봉사자가 될 때,

       ․ 부엌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환대할 때,

       ․ 교회당 문에서 사람들을 영접할 때,

       ․ 낯선 사람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눌 때,

       ․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힘든 사연을 들어 줄때,

       ․ 주일학교 교사들이 어린아이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할 때,

       ․ 목회자들이 열과 성을 다해 사람들을 양육할 때,

                 - 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환대하는 것입니다.

 

가장 적은 사람들까지

       ․ 찾고,

       ․ 발견하고,

       ․ 축하하고,

       ․ 돌보고,

       ․ 얼싸안고

       ․ 놓치지 않으려고 꼭 붙잡고,

       ․ 마침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손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생각하기로는 종교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투덜대고 불평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들과 식사를 하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여러분을 환영해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보다, 이곳이 내가 다른 사람들을 환영하고 영접하는 장소인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은혜로 가득한 환대”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불평하고 불만으로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건드리면 떠질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분위기 안으로 “은혜로 가득한 환대”를 불어 넣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환대를 통해서 기쁨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마치 철철 넘쳐흐르는 물 대접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흘러내리는 눈물 속의 포옹,

       ․ 숨 막히는 기쁨,

       ․ 어깨에 양을 메고 외치는 기쁨의 소리,

       ․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손들,

       ․ 그 사람의 얼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2010년 10월 3일 무지개 교회 주일 설교 전문]

 

 

아래 그림은 [아브라함의 환대] 입니다.

 

 

아브라함의_환대.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055
815 Book Review: Interpretation 59 (October, 2005), pp. 428-429에 실린 류호준 교수의 서평 류호준 2006.10.03 88899
814 설교: “감사: 쟁기질 하듯이 그렇게”(추수감사절 설교문) [1] 류호준 2007.11.18 50901
813 시: 유고시 1 편 [7] 류호준 2007.06.12 34537
812 신학 에세이: “예언자들의 소명과 우리의 소명”(그말씀 12월호 게제) 류호준 2010.11.09 33981
811 “성금요일과 부활절 그리고 세월호” [4] 류호준 2014.04.18 31437
810 에세이: "나의 네덜란드 유학기" [2] 류호준 2007.11.03 22427
809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 (이사야서 큐티 27) 류호준 2011.07.14 21356
808 설교: "복음의 긴급성"(눅 10:1-20)(490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 [1] file 류호준 2007.10.29 21028
807 설교: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것” 류호준 2010.09.23 20895
806 회고 에세이: " “쓰지 말아야 했던 편지” [7] file 류호준 2010.07.23 20792
805 로마서 묵상(26): “하나님 도와주세요!” file 류호준 2010.11.03 20259
804 강해논문: "예레미야의 새 언약" (렘 31:31~34) file 류호준 2006.05.21 20229
» 설교: “환대의 향기” file 류호준 2010.10.10 19866
802 신앙 에세이: "버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6] 류호준 2008.08.12 19536
801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어요!”(묵상의 글) [2] 류호준 2008.02.19 19490
800 설교: “거인을 죽이는 강심장” file 류호준 2010.12.05 19460
799 일상 에세이: “친구 하덕규 이야기” [4] file 류호준 2011.01.09 19379
798 신학 에세이: "겸손과 교만과 정의"(그말씀 3월호 게재예정) 류호준 2011.01.20 18642
797 번역에세이: 희망 (바라는 것) 류호준 2007.12.07 18627
796 로마서 묵상(24): “제발 싸우지 마!” file 류호준 2010.10.06 17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