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24]

“제발 싸우지 마!”

 

 

[본문: 로마서 9:24-29]

 

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요절]

 

“이 그릇은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4)

“He called us not only from the Jews but also from the Gentiles”(Romans 9:24)

 

 

 

“신약성경에는 종종 ‘유대인과 헬라인’이란 문구가 나옵니다. 일세기 당시에 인류를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적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세상에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이방인(헬라인)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헬라인이라 함은 하나님의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을 가리키는 대명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다른 민족들을 경멸하였고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감을 은연중 과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선택받은 민족’이란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헬라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별종(別種)으로 여겼습니다. 아무 것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별 볼일 없는 것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콧대를 세우는 것이 볼썽사나웠습니다. 둘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다리를 놓아야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죽으신 이유는 갈라지고 소원해진 ‘사이’ -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를 화목케 하고 화해시켜 평화(샬롬)를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종들과 사도들과 제자들 역시 이 거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출신이었지만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다리를 놓은 건축가(bridge-builder)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둔 어떤 아버지와 같습니다(눅 15:11-32). 언제 그 가정에 큰 기쁨이 있을까요? 상처 입은 아버지의 마음에 언제 큰 기쁨과 평화가 회복될까요?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 탕자의 회개하는 귀향일까요? 물론 그렇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돌아온 탕자 동생을 그의 형이 영접하고 환대 할 때 온전해 질 겁니다. 형과 동생이 서로를 얼싸 안는 ‘거룩한 포옹’ 속에 아버지의 눈물은 기쁨의 무지개 색상을 띨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 모두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도 놓칠 수 없는 배 아파 낳은 자녀들입니다. - 참고로 여기서 ‘배 아프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긍휼’에 해당하는 ‘레헴’입니다. - 그러므로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들끼리 다투는 일처럼 상심(傷心, 마음이 깨어짐 = 긍휼)되는 일은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자기의 계획대로 이런 그릇 저런 그릇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유대인 그릇과 이방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다 쓸데가 있어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그릇은 자기들만 최고라고 우길 것도 아니고, 이방인 그릇은 왜 유대인 그릇이 저렇게 형편없냐고 비난할 것도 아닙니다. 물고 뜯으면 피차 망하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이며,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이방인들을 경멸하고 무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방인들 역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며 조롱하였습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둘 사이는 마치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가운데서 슬퍼하고 괴로워할 분이 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두 아들을 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 아버지께서 이제 두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차근차근 그러나 엄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먼저 큰 아들인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방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데, 그러면 못써! 너만 내 아들이 아냐! 그 아이도 내 아들이거든! 그 아이는 네 동생이야!”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이미 구약성경에 나와 있다고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아마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질책해서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들이나 나나 모두 유대인들이 아니오? 우리 유대인들의 자랑스러운 특성이 무엇이오?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호세아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모르신다면 유대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알았다면 분명히 생각 없이 덮어놓고 알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은 호세아서에서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1:10, 2:1).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는 큰 아들인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원래 내 아들, 내 백성이 아니었지만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긍휼) 내 아들로 내 백성으로 입양했단다. 그러니 그들은 이제 네 형제요 네 동생이야. 알았느냐?”

 

한편 하나님 아버지는 이제는 자기의 둘째 아들이 된 이방인들을 앞에 앉혀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호의(은혜)로 내 집의 자녀가 되었어.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자꾸 네 큰 형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거야? 너 네 주제파악을 해야 할 것 같아!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그건 큰 착각이야. 만에 하나라도 너희가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면 그건 큰 실수야. 너는 입양한 아들이 아냐? 네 주제를 알아야지! 그 아인(유대인들) 내 친 자식이야. 그런데 네가 뭐라고 내 아들, 아니 네 형에 대해 좋지 못한 말을 하니? 그건 안 되지!” 그러시면서 하나님 아버지는 작은 아들 이방인들에게 나무를 벤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사람 집에 큰 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곧게 자라다가 나중에는 비뚤게 자랐습니다. 이리 저리 버팀목을 사용해서 곧게 자라도록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그 나무를 베어 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뿌리 채 다 뽑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뿌리 둥지는 그냥 남겨두기로 말입니다. ‘그루터기’를 남겨 두기로 한 것입니다. 다시 새싹을 피울 미래의 희망을 남겨 둔 것이지요. 이것이 사도 바울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운명과 미래에 대해 차근하게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전체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등을 돌려대지만, 그래서 그들에게는 멸망과 저주만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 다시 말해 애간장이 끊어지는(斷腸)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를 남겨두신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모두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입니다.”(사 1:9) 자취와 흔적조차 남지 않는 완전 파멸이었을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에게 남겨진 ‘씨’(후손) 예수님이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은 이어져 내려옵니다.

 

살펴보니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큰 아들이 탕자(蕩子, prodigal son)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작은 아들(이방인)이 탕자였으나 이제는 큰 아들(유대인)이 탕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도 집 안에서 잃어버린 탕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 복음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큰 아들의 귀향을 마지막까지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은혜를 탕진하는 탕자(蕩者) 하나님(Prodigal God)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심과 성실하심은 우리 죄인들이 기댈 마지막 구원의 언덕입니다. 그분의 풍성한 긍휼과 은혜 안에 모든 인류의 -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여러분과 저 - 밝은 미래와 찬란한 희망이 숨어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 - Simon & Garfunke)l

 

당신이 지치고 한없이 작아질 때,

그리고 울고 있을 때 기꺼이 난 당신의 눈물을 닦아 드릴께요.

저는 항상 당신 편이예요.

그리고 당신이 어려움에 처했으나 도움을 받을 친구를 찾지 못했을 때

저 험한 물결위에 누운 다리처럼 난 당신이 나를 딛고 견뎌 나가도록 힘이 될께요.

 

당신이 기진맥진했을 때 그리고 무일푼으로 거리의 노숙자가 되어 당신이 맞을 저녁이 

두렵게 느낄 때라도 난 당신을 편히 받아 줄께요.

어둠과 고통이 당신 주위를 덮치더라도

저 험한 물결 위에 누운 다리처럼 난 당신이 나를 딛고 견뎌 나가도록 힘이 될께요.

 

은빛 희망을 향해 배를 저어 나가세요. 당신의 미래는 밝아 올 거예요.

모든 꿈은 당신의 의지에 달렸답니다. 어떻게 꿈들이 밝아 올 지 바라보세요.

당신이 친구를 필요로 한다면, 난 언제라도 당신 뒤편에서 함께 배를 저어 나갈거예요.

저 험한 세상에 다리처럼, 당신의 맘을 감싸 드릴께요.

저 험한 세상에 다리처럼, 당신의 맘을 감싸 드릴께요.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When you're down and out  When you're on the street 

When evening falls so hard I will comfort you  I'll take your part  

Oh when darkness comes And pain is all ar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lay me down.

Sail on silver girl, Sail on by  Your time has come to shine
All your dreams are on their way  See how they shine  Oh if you need a friend
I'm sailing right beh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ease your mi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ll ease your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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