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출애굽기 2장 해설

2009.01.10 11:15

류호준 조회 수:14368

 출애굽기 2 장

 

[1-10절]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2장의 첫 단락은 1-10절까지로 모세의 출생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왜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출애굽기 초두에 놓이게 되었을까? 단순히 연대기적 고려에 의해 그렇게 되었을까? 아니면 다른 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정경으로서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단순히 연대기적 정보나 전기적 사건을 전달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언제나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모세의 출생 이야기는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을까? 대답은 오히려 간단하고 분명하다. 죽음에 직면한 한 어린아이의 운명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운명을 그대로 예표(豫表)한다. 이것이 종종 히브리 설화자의 이야기 전개방식이기도 하다. 출애굽기 2 장에는 종종 성경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이야기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작은’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전개될 ‘큰 이야기’를 말하려는 방식이다. 출애굽기에서 ‘큰 이야기’는 출애굽이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된 ‘작은 이야기들’ ― 모세의 출생과 구원과 입양 이야기, 그가 행한 최초의 구원과 해방 이야기 ― 는 앞으로 전개될 중심적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한다. 풀어쓰자면, 갓난아기 모세가 나일 강에서 구출된 사건과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구출되는 사건, 왕의 아들로 입양된 모세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이스라엘, 압제받는 동포를 구원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이 수행해야할 사명 사이에 있는 관련성은 작은 이야기가 큰 이야기를 가리키는 패턴을 보여준다.

 

 

작은 이야기가 앞으로 전개될 큰 이야기를 가리키게 되는 독특한 방식의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누가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열두 살 때 성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성전’ 모티브는 누가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께서 얼마나 “나의 아버지의 일들”에 바쁘셨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더욱이 삼일 동안이나 ‘찾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의 율법사들과 성경(율법서)을 놓고 토론하는 곳에서 예수는 ‘발견’된다. 마치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예수를 발견하게 된 것 역시 말씀(구약성경)을 가르치고 계셨을 때와 같다. 이처럼 이 작은 이야기는 전체를 위해 서있는 예표와 같다.

모세의 부모의 이름은 본문에서 알려지지 않지만, 다른 곳에 의하면(6:16-20) 아므람과 요게벳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나이 먹은 딸(미리암, 4절, 15-20절; 민 26:59)과 아들(아론, 참조, 4:14; 6:20; 7:7)이 있었지만 내러티브는 모세의 출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선 단락에서와 본 단락에서, 바로의 명령을 좌절시키고 망치는 주요 행동들은 모두 여자들이 한다.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 산파들(1:17)과 바로의 딸(2:5-10)이 그들이다. 본문에서 출생 시의 모세는 ‘잘 생겼다’(俊秀)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창세기 1장에 반복되어 나오는 ‘좋다’(히, ‘토브’)와 동일한 단어다. 모세의 출생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의 출생 속에 놓인 이스라엘의 출생 역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행위임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가 곧이어 타락이라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태어난 모세와 이스라엘이 적대적 세력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여기서 내러티브는 독자들에게 긴박한 위기감과 함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한 여자를 통해 태어난 생명이지만 완벽하고 깨끗하고 아무런 오염도 되지 않는 원시 상태의 생명이었다. 그러나 곧 바로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세의 어머니는 석 달 동안 최선을 다해 숨긴다. 

 

 

본문의 줄거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떠내려가는 이 작은 상자” 이야기다. 갓난아기를 태운 이 작은 배는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 속의 노아의 “배“를 연상시킨다. 창파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처럼 아주 연약하고 불쌍한 한 생명이 막연한 소망 가운데 물위를 떠내려가고 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이 아기가 ”준수하게 생겼음“(아름답게 창조되었다)을 보았다고 성경의 저자는 간결하게 묘사한다. 독자로서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창조를 미리 보고 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창조될 이스라엘은 마치 창세기의 첫 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창조 세계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준수하고 선하게 창조될 것이지만 동시에 위험천만한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될 것을 가리키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어린 아기는 물위에 떠있었으며, 그 강물은 깊고도 푸른 물,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대항하는 죽음의 강물이라는 사실이다. 갈대상자를 놓은 장소는 다름 아닌 나일 강변의 갈대들 사이였다. 여기서 ‘갈대들’(히, ‘숩’)이란 단어는 후에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물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참고로 이스라엘이 건넜다고 알려진 바다 이름은 사실상 홍해(紅海, Red Sea)가 아니라 갈대바다(Reeds Sea)이다. 어린 아기는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먼저 건너야할 이 강물 곁에 있는 셈이다. 위대한 예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죽음의 강물 위에 연약한 어린 아이와 바로의 딸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녀가 갈대 상자를 열어보니, 한 아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그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6절)

 

 

여기 그녀의 아버지인 바로, 신의 아들인 바로가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배우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실 것을 행하고 있었다. 즉 그녀는 이 히브리 아이를 위해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후에 아들로 삼게 된다.

 

 

이 “구출의 이야기”에서 여성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제 1장에서 산파들이 주역을 맡는 것과 비슷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본 장에는 전혀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기를 강물에 떠내 보내는 것도 여자요(어머니),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여성(누나)이요, 이 아이를 집어든 인물도 여성(공주)이요, 그 아이를 기르는 것도 여인(어미니)이요, 이 아이를 양자 삼은 것도 여성(공주)이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행위들을 반영해 준다. 이것이 여성의 일들(업적)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주장하겠는가?

 

 

잠시 우리는 모세의 출생과 그가 이집트에 입양되는 이야기로부터 나와서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사건은 소위 “신(新) 왕국”으로 알려진 기간에 이뤄지는 것인데 이 기간의 바로 왕조는 아멘오피스(Amenophis) 2, 3, 4세 (=Ichnaton), 호렘헵(Horemheb), 람세스(Ramses) 2세 (대략 주전 1430-1230년)의 치세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 중에 셈족의 그룹들이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시기에 이집트와 시리아-가나안지역 (아마르나 편지가 증거 하듯이) 간에 외교적 통로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셈족들은 광산근처나, 혹은 도시에 거주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관공서의 직책이나 혹은 “작가”로 교육받기도 하였다. 그들은 언어와 문학을 배움으로써 고도로 발달된 이집트 문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아마 이러한 사실은 모세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빛 아래서 보자면, 우리는 왜, 예를 들어, 모세의 율법 수여 안에는 고대 이집트의 윤리적 문헌들에서 발견된 요소들이 발전되어 발견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는 이 세대의 “일반적” 역사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 시대에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11-15a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본문은 매우 미묘하다. 모세는 ‘장성’(長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장하다 혹은 장성하다는 말은 사실적일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단순히 생물학적, 육체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형제들을 찾아 그들에게로 갔다”(11절 상).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모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고민스러웠다. 동시에 그 내면에는 무엇인가 꿈틀거림이 있었으며 이러한 내적 꿈틀거림 때문에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였다. 그는 자기의 형제들이 노역하고 있는 것을 ‘본다.’ 한 애굽 사람이 자기의 형제인 한 히브리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을 ‘본다.’ 본문은 ‘보다’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단순히 눈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이 비록 애굽에서 애굽 사람으로 양육 받고 교육받았지만 애굽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히브리 사람이 곧 자기의 형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11절). 자연스런 끌림이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을 증명하는 것일까? 피부색 때문에 자기의 정체성을 알게 되었을까? 이것들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물론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과정을 통해 자아 정체성에 대한 고뇌 깊은 질문을 하였음에 틀림없다. 예사롭지 않는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 친모와 유모와 바로 왕궁의 공주의 관계, 바로의 타 민족 정책과 혹독한 노예제도 등은 바로의 궁정에서 모든 학문을 통달한 모세로서는 지속적이며 본질적 질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 질문에 심각한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물의 현상과 표면이 아닌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보았다.”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무엇인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대항하여 일어서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공포로 몰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은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암시적으로 말한다. 어쨌든 본문에는 세 번에 걸쳐 “보았다”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는 자기의 형제들이 고되게 노역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 애굽인이 히브리인을, 곧 자기의 한 형제를 쳐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았다. 바로 여기서 그는 사건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대부분의 경우, 이 이야기는 현상적인 것 말고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모세는 자기가 한 애굽인을 죽이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모세가 한 일은 창세기 50:24에서 요셉을 통해 약속된 것이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아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부터 인도하여 내시사….” 또한 모세가 한 일은 이사야 59장에 나타난 아름다운 말씀, 즉 야웨에 대한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야웨께서 정의가 없는 것을 ‘보시고,’ … 야웨께서 아무도 남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놀라셨다. 그래서 야웨께서 몸소 사람을 구원하셨다. 그가 의로 옷 입으시고 개입하셨다”(15절 이하를 보라). 이와 같이 모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것은 그가 행한 최초의 구원 행동이었다(11-12절). 그러나 그의 구원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두 명의 히브리인들 사이의 갈등과 다툼에 판결을 내리고(13-15절), 마지막으로 우물가에서 목자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여인들을 구출하고 도와준다(16-20절).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된 이야기를 통해 내레이터는 모세를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미리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구원자와 중재자로서 모세의 사역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가 특별히 두 번째 사건 속에 들어 있다. 즉 두 번째 사건에 등장하는 다투는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간섭과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으로 삼았느냐?”(14절). 이것은 앞으로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는 수많은 일들의 시초에 불과하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의 이유가 된다. 자기 형제들과 동족들에 의해 배척을 받고 동시에 바로의 서슬 퍼런 체포령 때문에 먼 곳으로, 광야로 피신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위한 적합한 장소가 광야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 광야는 그런 시간과 장소를 그에게 제공하게 된다. 광야는 단순히 은둔과 피난의 장소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한 존재인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었다.1)

 

 

 

[15b-22절]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앞 단락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모세는 애굽에서 탈출하게 된다. 그 자신이 출애굽을 선행(先行)한다.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피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미디안 지역으로 온다. 내레이터는 모세가 미디안의 한 우물곁에 앉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특정한 장면(type scenes)을 소개하는 관습은 히브리 내레이터가 종종 사용하는 문예적 기법이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 익숙한 히브리인들은 ‘우물’이라는 단어가 우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집의 하인이 우물가에서 이삭의 배우자가 될 리브가를 만나게 된 경우(창 24장)나 야곱 역시 라헬을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 일(창 29장)을 떠 올릴 수 있다. 다말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시아버지인 유다를 통하여 자녀 얻기를 소원하였던 다말은 에나임 마을 입구에 앉아서 유다가 오기를 기다렸다. 에나임은 ‘쌍둥이 우물’이라는 뜻으로 후에 다말은 쌍둥이를 얻게 된다. 이처럼 우물은 유목민들에게는 생명유지 장치다. 가축이나 사람에게 생수를 제공하고 대지를 비옥하게 하는 우물은 희망과 미래를 상징한다. 따라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의 한 우물에 앉게 되었다는 보고는 희망이 약동하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한다.2)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곧 이어 도전을 받게 된다. 미디안의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양떼들에게 먹이려 하는데 (남자)목자들이 그녀들의 양떼들을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우물로 상징되는 번성과 평화가 도전받고 깨어지는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우리는 족장 이야기 가운데 이삭의 우물들을 기억할 것이다. 양떼를 길렀던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지만 매번 마다 적대적 세력의 도전 때문에 이리 저리 피해 다녀야만 했다. 생명과 번영과 번성을 상징하는 우물에서 적대적 세력들은 여인들의 양떼들을 몰아낸다. 모세는 사건에 개입하였고 그들을 몰아내고 여인들을 구원해낸다. 구원자 모세의 역할을 미리 보는 순간이다. 모세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사건이다.

 

 

거기서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의 일곱 딸들과 그의 아버지 르우엘을 만나게 된다.3) 그녀들은 모세를 ‘애굽인 사람’이라고 그들의 아버지에게 소개한다(19절). 유대인의 미드라쉬에 의하면, 모세는 자기를 ‘애굽인’으로 소개한 것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내가 당신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인 그 애굽 인이 당신들을 구했소이다. 왜냐하면 그가 없었더라면, 또한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기에 있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에서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들은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름을 ‘게르솜’이라 짓는다.4) “내가 타향에서 나그네가, 타지에서 낮선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였다. 아들의 이름을 통하여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분명히 한다. 모세는 객지인 미디안에 나그네로 머무르게 된다. 그곳은 들판이며 광야였다. 그곳은 어린 시절의 학교로부터 해방자로 만드는 장소이었다. 교육의 장이었다. 광야라는 장소와 시간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점검하고 우리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었었는지를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 때 뒤로 물러가 묵상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장소와 시간이 광야일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고 있다. 즉 그들 역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사는 것을 배워야했다. 훗날 광야에서의 삶이 그것이었다. 나그네로 이 세상을 사는 전통은 신약에서도 계속된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여 살지 않는다”는 말이 이것을 가리킨다. 신약성경 중에 베드로전서는 이 점을 가장 강하게 부각시킨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부른다(1:1).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타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C. S. 루이스 역시 “영광의 무게”라는 저명한 설교 가운데, 나그네로서의 삶을 “위로받을 길 없는 비밀”(inconsolable secret) 이라고 부른 일이 있다.5)

 

 

출애굽기 1-2장을 마감하면서, 한 가지 독특한 현상이 돋보인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산파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우리는 2장 마지막 3절 가운데서 5번이나 ‘하나님’이란 단어를 발견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노예로 남아 있게 된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그곳으로부터 다음의 말씀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그 고통소리를 들으시고(‘솨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자카르’)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보시고(‘라아’), 그들을 아셨다(‘야다’).”(24-25절)

 

그렇다면 우리가 듣고 또 듣고 하는 이 친숙한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그 분은 다시 돌아 오셨는가? 아니면 그는 노예의 백성들에게 이방인이셨는가? 마치 모세가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이방인 됨, 낯선 자됨, 객이 됨의 역사와 같은 것이 아니던가? 애굽, 미디안, 게르솜, 광야 등과 같은 상황 속에서 네 가지 하나님의 동사들이 발견되는 것이 아닌가!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이스라엘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실 뿐 아니라 그들 속에 참여하신다. 그는 고전 4장에서 사도가 말한 것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어두움에 감춰진 것들을 빛 가운데로 드러내실 것이다”(5절). 모세의 행동은 이제 진정한 의미로 충만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23-25절]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본 단락은 앞선 이야기(출 1-2장)와 앞으로 전개될 출애굽 이야기(출 3장 이하) 사이를 연결 짓는 회전문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을 심하게 압제하였던 애굽 왕의 죽음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미래를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된다. 마치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되었던 것과 같은 모양이다. 즉 지상의 왕 웃시아의 죽음은 천상의 왕 야웨 하나님의 새로운 활동의 시작이었던 것과 같다. 히브리 내레이터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제는 서서히 깨어날 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새벽이 가까올 수록 어둠이 깊은 것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될 즈음에 이스라엘의 고통과 절규는 극에 달하게 된다.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전에 해산의 고통이 심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로의 압제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에 대해 깊이 고뇌하고 갈등하였다. 그들의 족장들의 하나님께서 상당히 오랫동안 그들에게 부재하시고 침묵하셨기 때문이었다. 본 단락에서 시편의 탄식시의 주제(하나님의 부재와 침묵)가 메아리 치고 있다. 참고로, 본 단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출애굽기 1장에서 잠깐 언급될 뿐, 2장에서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숨어계신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 부재하신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 단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 소리(23절)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반응(24-25절). 먼저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그들의 저항과 괴로움과 탄식의 목소리를 드높일 수가 없었다. 바로의 학대와 압제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저항의 목소리는 더 심한 학대를 가져오고, 탄식의 소리는 혹독한 보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대와 압제의 정점에 있었던 애굽 왕 바로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동안 갇혀있던 탄식과 억압되었던 신음소리가 봇물 터지듯이 일제히 하늘을 향하기 시작했다. 울분과 원망과 한숨과 탄식이 한데 어우러졌다. 그것은 단순히 압제자 애굽 왕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치하셨던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탄식과 탄원이 한데 어우러진 외침들이었다. 상당한 기간 동안 침묵과 부재로 일관한 것처럼 보인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공적으로 공개적으로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탄식하고 부르짖고, 신음하고 괴로워한다. 그들의 절규와 신음소리가 하늘에 이른다.6) 절실한 도움을 청하는 비명소리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통과 괴로움과 신음을 공개적으로 토설(吐說)하고 발설(發說)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압제자들은 침묵하는 노예들을 원하는 법이다. 노예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그들의 압제상황을 대놓고 드러낸다면 압제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노예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드러내 놓고 밝히기 못한다는 것은 현실 자체를 결정하는 권한을 압제자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죽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비존재이다.

 

 

본 단락의 전환점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는 순간에 있다. 이스라엘이 소리 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견딜 수없는 극한 지점에 이르게 된 이스라엘 자손들이 소리를 지르게 된 것이다. 사실상 그들의 절규가 하나님을 향해 의도적으로 외쳐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말고 누구에게 그런 고통을 말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그런 절규에 대해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다. 네 번에 걸친 이스라엘의 반복적 부르짖음(“탄식하다”, “부르짖다”, “부르짖는 소리”, “고통 소리”)에 대해 하나님 역시 네 번의 동사의 주어가 되시어 응답하신다. 히브리 원어를 직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솨마)”,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자카르)”, “하나님께서 보셨다(라아)” “하나님께서 아셨다(야다).”

 

 

하나님께 돌려지는 일련의 행위들을 보면 특징적인 현상이 발견된다. 먼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가운데서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들의 탄식과 신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그에 대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직접 보시고, 그들의 형편을 아셨다는 보고를 자연스럽게 기대할 것이다. 다시 말해 23절에서 바로 25절로 건너뛰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24절이야말로 본 단락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자기의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문구에 특별한 신학적 강조가 들어 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에 대해 바로 응답하시는 대신에 먼저 자신이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대목이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표상이 부각되는 순간이다. 출애굽기의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이할 때마다 내레이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근거로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특성과 성품과 정체성은 이스라엘이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위험과 위협아래 그들이 절망할 때 마다 희망을 공급하는 절대적 원천이 된다. 그분은 어떤 분이시던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크신 하나님(출 34:6)이신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들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않으시며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충실하시어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기억하심에 기반을 둔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기대어 간구하고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와 맺은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돌보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을 ‘능력의 기억자’(The Powerful Rememberer)로 부각한다. 430년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에 성실하게 행동하시겠다는 결심이 출애굽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출애굽은 하나님의 언약에로의 자발적 성실하심으로부터 기인한다.

 

 

하나님의 네 가지 행동들 중 마지막 행동에 대해 한글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였다”로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하나님께서 알았다(‘야다’)”이다. 여기서 타동사인 ‘알다’가 목적격을 갖지 않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셨다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상황을 깊숙이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부르그만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이 노예들이 창세기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은 조상들과 맺은 약속들이 강력한 개입을 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아셨다. 하나님은 옛 추억들 때문에 약속들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고, 옛 기억들 때문에 현재적인 고통들과 들려오는 신음소리들도 아셨다. 그리고 아셨기 때문에 반드시 행동해야만 하셨다.”7)


1) 참고, J. Gerald Janzen, Exodus, Westminster Bible Compan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p. 23-24.

2) 참조, J. Gerald Janzen, Exodus, Westminster Bible Compan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7), pp. 24-25.

3) 르우엘은 '하나님의 목자‘라는 뜻을 지니는데 출 3:1에서 이드로로 불린다. 다른 곳에서는 호밥을 모세의 장인이라고 부르는데(삿 4:11), 흥미롭게도 민 10:29에서는 호밥을 미디안 족 르우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세의 장인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즉 르우엘(이드로)인지 호밥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아마 이스라엘에게는 모세의 장인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별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세는 동쪽 광야의 셈족 어떤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다는 사실이다.

4) ‘게르솜’은 ‘게르샴’과 언어유희를 이룬다. 게르샴은 ‘게르’(이방인) 와 ‘샴’(그곳에서)의 합성어로 ‘그곳에서 이방인이 되다’는 뜻이다. 모세는 자신을 가리켜 “이방 땅에 사는 외국인이 되었다”라고 부른다.

5) 류호준,『일상을 걷는 영성』(서울: SFC, 2008), pp. 37-44;『영혼의 겨울에 부르는 희망의 교향곡: 시편 사색 II』(서울: 이레서원, 2008), pp. 267-296, 특별히 p. 287.

6) 23절과 24절에서 내레이터는 네 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절박함을 강렬하게 표현한다. 동사: ‘아나’(탄식하다); ‘짜아크’(부르짖다), 명사: ‘솨아’(부르짖는 소리); ‘네아카’(고통 소리).

7) Walter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in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ume I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pp. 706-70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587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30
» 출애굽기 2장 해설 류호준 2009.01.10 14368
128 출애굽기 1장 해설 [4] 류호준 2009.01.10 15091
127 신앙교육(8): "괜찮은 죄인인가 몹쓸 죄인인가?" 류호준 2008.12.22 9588
126 신앙교육(7): "지은 죄들에 대해 어떤 변명들을 둘러대십니까?" 류호준 2008.12.13 9453
125 신앙교육(6): "하나님은 왜 당신이 불순종하도록 허락하십니까?" [2] 류호준 2008.12.09 8681
124 설교: "그리스도, 우리의 재판장"(대림절 설교) file 류호준 2008.12.06 9700
123 신앙교육(5): "왜 불행이 당신에게 일어납니까?" 류호준 2008.11.30 9113
122 설교: "모험가가 되라 하시는 그리스도" [3] 류호준 2008.11.23 9267
121 신앙교육(4):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 땅에 두셨는가?" 류호준 2008.11.19 10305
120 신앙교육(3): "창조신앙이 왜 중요한가?" 류호준 2008.11.16 17345
119 신앙교육(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류호준 2008.11.11 13987
118 신앙교육(1):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 류호준 2008.11.07 14560
117 신앙 에세이: '그리스도인'과 '예수쟁이' 류호준 2008.10.14 9660
116 하나님에 이끌려 사는 삶 (창세기 큐티) [1] 류호준 2008.10.06 10947
115 요셉의 유언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10.06 11028
114 야곱의 고백: 하나님의 은혜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10.06 10593
113 야곱의 유언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10.06 11307
112 손자들을 축복하는 할아버지 (창세기 큐티) [1] 류호준 2008.10.06 9828
111 고향에 묻어주오! (창세기 큐티) 류호준 2008.10.06 9976
110 신학에세이: “하나님은 몇 분인가?”(이정석 교수) 류호준 2008.10.05 11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