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모험가가 되라 하시는 그리스도
마태복음 25:14-30

류호준 목사


예수님은 비유를 가르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엮어내십니다. 마치 직물을 짜듯이 그렇게 비유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 비유를 들으면서 청중들이 그 비유 이야기의 직물 속으로 엮어 들어가듯이 그런 방식으로 비유들을 짜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비유를 귀담아 들어 보십시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먼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그의 하인들을 불러 모아 그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자, 여러분은 아마 편안한 자세로 이 이야기를 듣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도대체 이 이야기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내게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나에게 위협적으로 들리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야?”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야기가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여러분은 마침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 말도 안 돼? 
   ․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이건 공평치 않아!
   ․ 형벌이 너무 심해!

이 이야기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까지 여러분은 이야기 속에 잡혀 있게 됩니다. 이야기의 직물 속으로 엮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방식의 비유였더라면

아마 이 이야기가 다음과 같았더라면 훨씬 더 여러분이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어떤 사람이 먼 여행을 가면서 그의 하인들을 불러 자신의 재산을 맡긴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는 5000만원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2000만원을

        또 다른 한 사람에는 1000만원을 주었다.

        그리고 그는 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5000만원을 맡은 사람은 나가서 장사를 하였는데 모두를 잃었다.

2000만원을 받은 사람도 그와 똑같이 장사를 했는데 모두 잃었다.

한편 1000만원 받은 사람은 그 돈을 장롱 속에 잘 보관하였다. 

오랜 후에 하인들의 주인이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 하인들을 불러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듣고 결산을 하였다.


5000만원을 받았던 하인이 설명하였다. “금융권 내부 정보에 밝은 사람의 도움으로 주식을 샀습니다. 그런데 금융시장이 갑자기 요동치더니 주식은 모두 휴지 조작이 되었고 투자한 금액 모두들 잃었습니다. 매우 죄송합니다.”

그러자 2000만원을 받았던 하인이 설명하였다. “저 역시 그렇게 주식에 투자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증권 회사에 잘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도움으로 비밀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의 권고에 따라 2000만원 모두를 투자했는데 결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때에 주인이 이 두 하인에게 말했다. “이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인간들아, 주식에 투자하여 대박이 날 것을 기대했다면 너희들이야말로 도둑놈들이고, 불한당(不汗黨)이다. 너희들의 전후 이야기를 법정에 고했더라면 너희들은 모두 철장행이야! 감옥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00만원을 받았던 사람에게 주인이 이렇게 말한다. “자네 같은 하인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잘 알고 있었던 자네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높이 평가한다. 증시(證市)라는 것이 얼마나 괴팍스런 괴물인지를 자네는 잘 알고 있었군. 이 어려운 시절에 본전이라고 잘 간수했으니 잘했도다.”

자,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더라면 훨씬 실제적이고 합리적이 아니겠습니까?


한 달란트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시는 예수님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은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입니까? 한 달란트 받은 것만도 서러운데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책망하신다는 것입니까?

“너 악하고 게으른 종아!” 목소리를 높여 꾸짖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인들에게 명하십니다. “이 자를 끌어내어라.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 바깥에 끌어내어 어둠 속에 던져 버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도록 하라”

우리는 이러한 심한 형벌에 대해 움츠려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우 섬뜩한 형벌입니다. 이 불쌍한 하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가 너무 조심스러웠던 것 아닙니까? 조심스럽고 소심했다는 것이 그렇게도 심한 형벌을 받아야할 잘못이란 말입니까? 보수적 성향으로 재산을 관리한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입니까? 더욱이 그는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가 받은 것을 고스란히 그대로 간직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탕자처럼 흥청망청 돈을 낭비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 이즈음 되면 여러분과 저는 지금 이 이야기 직물 속으로 깊숙이 엮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 불쌍한 사람, 한 달란트 맡은 사람에 대해 왜 그렇게 화를 내시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무슨 이유인가?

한 달란트를 갖고 있다는 것에 붙어 달려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섯 달란트 사람과 비교하려는 위험에 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섯 달란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 아마 여러분은 자부심이 강하거나, 
   ․ 잘난 체 하고 싶어 하거나, 
   ․ 작은 일을 하고도 생색을 내거나, 
   ․ 일부러 겸손한 체하게 되는 위험이 있게 됩니다.
   ․ 혹은 “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은연중 자만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 달란트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 마음속에 조용히 열등감이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 
   ․ 내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초라한 존재야, 
   ․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 그저 그런 사람일뿐 이야. 
   ․ 나를 보라고, “가진 것도 없지, 배운 것도 없지, 가문도 별 볼일 없지,
     그렇다고 외모가 받혀주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 나는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저 왜소한 존재이지.”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여러분보다 더 똑똑하고 잘나고 훌륭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지적이고 세련되고 재능이 있고 멋진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저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기가 죽은 상태로 말입니다. 정말 살맛이 안 나겠지요! 그러면서 이 사실을 알기도 전에 여러분은 질투와 시기로 안색이 새파래질 것입니다. 마치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일 때처럼 그의 얼굴에는 시기로 새파랗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시기(猜忌)란 한자어에서 ‘시(猜)’자는 ‘개 견(犭)’변에 ‘푸를 청(靑)’자가 합성되어 ‘개가 푸른 상태’, 즉 개가 다른 개가 먹이를 소유한데 대하여 으르렁거리며 새파랗게 되어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쨌거나,

이 세상에는 가인들로 가득합니다. 
   ․ 내면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 시기(猜忌)로 안색이 새파랗게 된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부요하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열등감과 시기와 질투를 넘어설 수 있는 한 가지 유일한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삶을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갖고 있는 한 달란트를 여러분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금의 여러분이기를 바라시지 여러분 옆에 있는 다른 다섯 달란트
     사람과 같기를 바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느라 시간과 인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끝이 없는 질투들로 삶을 탕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이 갖고 있는 한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목적이 있으셔서 의도가 있으셔서 그렇게 만드셨다고 생각하십시오. 한 달란트는 하나님의 ‘의도적 창조물’(intentional creation)이구나 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항상 여러분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항상 여러분보다 더 잘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끝이 없는 슬픔과 비애와 비참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일까?” 라고 질문하시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삶을 가지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일까?” 라고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옛 부터 내려오는 한 랍비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랍비의 이름은 수샤(Susha)입니다. 랍비 수샤가 말합니다.

죽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섰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묻지 않으셨다. 
   ․ 랍비 수샤야, 왜 너는 아브라함 같지 않았느냐? 
   ․ 랍비 수샤야, 왜 너는 모세 같지 않았느냐?

그는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 랍비 수샤야, 왜는 랍비 수샤 같지 않았느냐?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

삶의 예술은, 삶을 예술적으로 산다는 것은 
   ․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 내가 누가 아닌지를 아는 것입니다.

삶의 예술은, 삶을 예술적으로 산다는 것은 
   ․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며, 
   ․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삶의 예술은, 삶을 예술적으로 산다는 것은 
   ․ 나는 한 달란트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고마워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나는 두 달란트 사람도 다섯 달란트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고마워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련을 짓고 사는 예술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현재의 그 모습이 참 좋습니다. 당신의 지금의 그 상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의도하신 그 방식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선택은 다음 중 하나일 것입니다. 
   ․ 나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감사하면서 받아들이는 일.
   ․ 나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경쟁과 시기의 늪으로 빠져 들어 가는 일.

현재 우리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빛과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지만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 비교하여 측정한다면 결국 어둠과 죽음으로 걸어 들어갈 것입니다.

왜 어둠과 죽음으로 치닫게 됩니까?
- 그것은 우리가 결코 성취시키거나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끊임없는 압박감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가 씨를 심지도 않는데서 추수하는 잔인한 주인이요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곡식을 거둬들이려는 잔혹한 
농부라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삶을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분명하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놓으신 그 방식대로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는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 마침내 마귀의 영역, 마성(魔性)적 영역에 빠지게 될 것이다.
   ․ 바깥에, 어둠 속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에 있게 될 것이다.


가치관의 전복: “작은 것은 아름다워!”

예수님은 한 달란트 하인을 꾸짖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작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두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한 달란트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관심을 나타내신 것은 큰 것을 경배하고 큰 것을 섬기려는 우리의 가치관을, 가치 저울을 뒤집어 놓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별 볼일 없고 중요하지도 않고 미미하기 그지없는 것들을 집어 들고 계십니다.

   1) 5천명을 먹이시기 위해 2마리의 작은 물고기
   2) 겨자씨앗 - 가장 작은 씨앗으로 알려진
   3) 과부의 동전 - 당시 통용되던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
   4) 소금 한 줌
   5) 들판의 꽃 한 송이
   6) 공중의 새 한 마리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과 주의를 이런 작은 것들에 집중시켜, 사물들과 인생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고 중요한 사람들, 다섯 달란트 사람들을 찾으시지 않으십니다.
   ․ 그분은 간음하다 잡혀온 한 여자, 
   ․ 길거리에 구걸하던 맹인 거지, 
   ․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세리(세금징수원), 
   ․ 귀신에 사로잡혀 무덤 주위에서 살던 사람.
이런 사람들을 찾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들을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 보통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를 익숙하게 하시고 적응시키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1000만원 받은 하인을 심하게 다루신 것입니다.
- 그가 누구입니까? 그는 신문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 죽어서나 부고에 실리는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약간만 문을 열어놓고는 
    교회나 공동체에 깊숙이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별 볼일이 없는 초라한 존재라고 하면서 그 뒤에 “나는 재능이 없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불같은 분노를 쏟는 것입니다. “너 악하고 게으른 종아!”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 하나님은 작은 한 달란트 사람들을 가지고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은 한 달란트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하인들을 대부분 선택하신다.
   ․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 자기의 교회들이 한 달란트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끌어나가기를 바라신다.


모험을 감수(甘受)하는 자

예수님이 오늘의 비유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가야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그가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느꼈던 세계를 떠났던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는 우리에게 모험을 하기를 기대하십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나에게 합당하지 못하다.
   - 자기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그는 내게 합당하지 못하다. 
   -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네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38)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모험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길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들을 갖고 일하는 것은 위험이 따릅니다.

바울의 경우

바울은 예수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들었을 때 그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수많은 위험에 직면하였으며,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고 매를 수없이 맞았으며 길에서 강도를 만나고 강탈을 당했으며, 위험천만한 여행을 했으며 배가 파선하여 죽다 살아난 일도 있었고, 재판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형장에 이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영광과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며, 죽는다 하더라도 이익(얻는 일)이다.”

그는 그의 재능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섬기는 일에 사용되지 않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된다면, 땅에 묻히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모험

우리의 비유는 우리에게 모든 삶은, 모든 인생은 모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께 헌신된 사람과 인생은 모험이라는 것입니다. 위험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모험입니다.

-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는 삶은 모험이며 도박입니다.
-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는 삶도 모험입니다.

또 다른 비유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들과 달란트들을 단순히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는 데만 사용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노후의 은퇴시기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도박과 같은 모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너로부터 네 생명을 달라고 할 것이다”(눅 12:20)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하여 이것저것을 저축하고 쌓아두면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달란트와 재능들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숨겨두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를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너무 늦게 배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재능들과 달란트들을 돌아보시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우리와 함께 살펴보시옵소서. 우리의 삶 안에 있는 당신의 선물들을 풀어놓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우리의 삶과 사랑을 창조적으로 투자하도록 인도하소서. 아멘.

2008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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