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수난주간 설교: “배반과 은혜”

2020.04.09 22:20

류호준 조회 수:325

배반과 은혜

요한복음 18:1-11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

 

 

 

수난주간으로 이어지는 사순절 기간 주일에는 특별히 요한복음에 기록된 사건들 중, 예수께서 체포를 당하던 밤으로부터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허락하고 그를 유대인들에게 넘겼던 시간까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요한복음과 함께 요한 제바스천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걸작인 성 요한의 예수 수난곡”(The Passion According to St John)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 * *

 

살면서 가장 끔직한 일들은 주로 밤에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몰려와 우리를 압도할 때도 밤 시간이고, 견딜 수 없는 고독을 경험하는 때도 밤 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탈진하고 맥이 풀리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마치 길을 잃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할 때와 같습니다. 위기들은 어둠 속에서 기승을 부리나 봅니다. 실제로 어려운 일이나 위기의 순간들을 대낮이 일어납니다만, 그 순간들에 대한 기억 속에는 빛이 없습니다. 기억 속에는 캄캄한 어둠만이 있지요. 즉 위기를 당하면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중에 혼란스러워집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따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던 때는 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문입니다. 그 기도 가운데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사실이 요한복음 18장에 와서 비극적인 역설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께 그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마치자마자 예수의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 출신의 유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들 중에 경찰로 파송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밤을 밝히는 초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폭도들 광경은 우리도 텔레비전에서 종종 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증오가 되고 증오에 사로잡히면 광기에 서려서 폭도가 됩니다. 자기들과 다르다고 생각이 되면 누구든지 제압하여 잡거나 유괴하거나 무섭게 폭행을 가합니다. 이런 폭도들을 예수의 제자들 중 하나인 유다가 데리고 온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말하기를, 유다가 예수께 입 맞추며 배반했다고 합니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친밀감의 표현이 아닙니까? 그런데 입을 맞추며 배반을 했다면 정말 미치게 만드는 배반입니다. 그러자 곧 밤이 되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배반의 상처

 

역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배반이나 배신의 행동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가장 큰 형벌에 처해야한다고 합니다. 배반과 배신은 신뢰를 깨버린 죄입니다. 배신은 충성과 의리와 믿음을 철저하게 깨뜨리고 박살냅니다. 배반은 예수가 우리들이 알기를 바라고 그처럼 간절하게 기도했던 하나 됨(통일)을 산산조각 냅니다. 배반은 우리가 믿었던 누군가가, 아니 우리에게 악수하고 포옹하고 입을 맞출 정도로 가까웠던 누군가가 우리를 대항하여 등을 돌려댄 것입니다. 뒤에서 칼을 꽂은 것입니다.

 

가족 식구나 직장 동료나 가까운 친구에 의해 배신을 당하였을 때가 있었습니까? 그 때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누굽니까? 한 때는 믿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어떤 경우든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도록 허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있는 비밀의 방까지 다 열어 보여주었더니만 그 비밀들을 악용해서 우리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생채기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다는 것은 모두가 다 뼈저리게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원수들은 그런대로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만, 배반과 배신 자체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고 괴로운 문제입니다. 배반처리는 참으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유다가 나쁜 놈이라고?

 

우리는 가룟 유다를 아주 심하게 다루어왔습니다. 아주 나쁜 놈이라고, 배반자라고, 그건 사람도 아니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유다를 배반자의 원조라 하면 당연히 유다를 거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다에 대해 전혀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 안에도 유다의 크로모솜(유전인자)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어둡고 음산한 가능성 말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믿었던 것들을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가능성 말입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과격할 정도로 유다와 거리두기를 하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이 배반을 하게 되는지 그 작동경위를 알지 못합니다. 왜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했는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가볍게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우리 안에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소스라칩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리고 그분의 확신과 생각들이 무엇이지도 잘 압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확신과 생각들을 우리의 삶을 위한 신조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분노, 두려움, 이기심과 같은 작은 주머니들이 언제 터져 나와 우리를 잡아먹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과 순간이 언제 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는 열 둘 중 하나가 자기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제자들의 관계맺음이 얼마나 허술하고 쉽게 깨어질 수 있는 것이었는지 곧 바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그게 저입니까, 주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저는 그 문제를 걱정해왔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건데 저는 그것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가룟 유다 유전인자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용서하기 가장 어려운 죄는 사실상 내 속에서 내가 갈등하며 처리하기 어려운 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악과 죄에 대해 무자비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악과 죄에 대해서도 무자비하다는 것입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배반의 유전인자가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무섭고 두려운 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야박하고 무자비하게 대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유다를 두려워합니다. 십자가는 영웅적 자기희생의 상징이지만 유다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의 상징입니다.

 

베드로의 배신처리방법

 

베드로는 유다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게 되자, 칼을 휘두르며 예수를 잡으러 온 군인들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그가 한 일이라곤 대제사장의 무고한 하인의 귀를 잘라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성경은 그 하인의 이름을 말고(Malchus)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그 하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이름을 밝히는 중요한 이유는 독자들인 여러분과 저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이 현장에 있다가 다친 자들을 기억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달리 말해 우리가 욱하는 마음으로, 때론 예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던진 날카로운 폭력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고현장에 있던 무고한 행인도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들은 유령인간이 아닙니다. 진짜 사람이며 고귀한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처럼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그들은 집에선 어머니요 아버지요 형이요 아들이요 누이요 자매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주거나 죽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가르쳐주는 영원하고도 보편적 진리가 아닙니까?

 

베드로는 유다보다 괜찮은 사람인가?

 

역사는 유다보다 베드로에게 좀 더 관용적이고 우호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도우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은 그 저돌적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역에 조인하였던 초기에,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로 갈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러시면 안 된다고 앞장서서 가로막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베드로였습니다. 당신은 결코 십자가를 져서는 안 된다고 예수를 꾸짖기까지 했던 장본인이은 다름 아닌 베드로였습니다. 마치 그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이 그리스도의 용맹스런 제자는 칼을 들고 폭도들을 향해 몸을 던져 돌진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해지겠지만 이런 폭력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 평화의 왕을 배반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피를 본 폭력은 언제나 다시 많은 장소에서 다양한 때에 무차별적으로 피를 보기 위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피는 피를 불러냅니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냅니다. 그런데 누가에 따르면, 이번에는 예수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십니다. “더 이상 그만!” “멈춰!”라고 하신 것입니다.

 

폭력은 언제나 폭력을 불러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폭력적인 순간들 가운데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을 듣게 됩니다. “이런 짓은 이제 그만해!” “네가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상해하지 말라! 더 이상 자살 폭탄을 품고 다니지 말라. 나 죽고 너 죽고 해보자 하지 말라! 더 이상 부족 간에 살육을 하지 말라.” “구걸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당신을 무섭게 만든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지나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파괴하는데 더 이상 혀를 사용하지 말라” “더 이상 이런 일을 하지 말라!” “더 이상 폭력은 안 돼!”

 

물론 타락한 세상 안에 산다는 것은, 비극적으로 부득이하게 칼과 창을 들고 우리자신을 방어해야할 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방어하기 위해 칼을 든다고 감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위해 칼을 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대해 죽음으로

 

예수님은 모든 죄들을 위해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서 죽으려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의 편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슬림과 유대인과 불교인들과 크리스천들을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는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가 위하여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의 전() 배우자를 위해, 여러분을 해고한 사장을 위해, 아니 여러분을 향해 등을 돌린 유다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는 여러분 영혼 속에 들어있는 유다를 위해서도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와 대속의 잔

 

요한에 따르면, 베드로가 그의 칼집에 칼을 다시 집어넣은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는가?” 이 구절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히브리 예언자들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하박국 오바댜 스가랴 의 언어를 이해해야 할 겁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을 은유적으로 여호와의 잔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예언자들은 자기를 배반한 자들을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자기파괴가 될 술잔은 마셔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선택한 이 미친 폭력적 삶에 우리를 내버려 두어, 우리가 그 밑바탕까지 내려가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는 핵심은, 정말로 취하기를 원한다면 나의 잔을 들이켜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는 이제 곧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잔을 마실 것이라고 하셨을 땐, 그는 자기가 우리를 위해 심판의 형벌을 자신이 대신 받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죄들을 속죄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방편을 주시려고 십자가로 떠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버림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용서와 치유의 잔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잔을 영원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여호와의 잔은 더 이상 심판의 잔이 아닙니다. 주님의 성찬 테이블에 나올 때마다, 우리는 자비와 긍휼의 잔을 드는 것입니다. 성찬의 테이블에 나아올 때 마다 우리는 우리의 피조된 본성의 선함과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반하여 행동했던 모든 죄들을 용서해주는 용서의 잔을 드는 것입니다. 이 자비와 긍휼의 잔은 죄의 용서를 줄 뿐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에게 저지른 상해들을 치유하는 묘약을 줍니다. 성찬의 노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몸의 모든 고통들을 온전하게 치유하시기 위해 그분께서 상함을 입은 것입니다.”

 

초기 교회는 이 은혜를 알고서는 정말로 기뻐했고 흥분했습니다. “용서하는 은혜”, “치유하는 은혜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배 시에 매주일 여호와의 잔”(성찬의 잔)을 마시곤 했습니다. 거의 삼백 년 동안 교회는 정규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종종 심한 폭력의 희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예식서와 동일한 성찬식을 하려고 여호와의 식탁 둘레에 모였을 때, 목사는 성찬을 이런 말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그러면 회중들은 , 당신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다시 목사는 여러분의 마음을 드십시오!”라고 하면 회중들은 곧 이어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듭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렇게 이 박해받고 얻어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비천하기 그지없던 교회는 기쁨으로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항(심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뭔지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밤이 아무리 캄캄하고 칠흑 같다 하더라도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폭력적이 되어간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에 요동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행하는지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여러분 자신의 유다 유전인자가 여러분에게 하는 짓거리도 별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대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함께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하고 용기를 가져야할 온갖 이유를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의 첫 절들에게 약속한 것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추되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넉넉한 승리자라는 말입니다. 그분 때문에, 그분의 약속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분은 모두 아멘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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