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Bible Class

시장님, 거기서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201614일 월요일 오늘 전국적으로 각종 기관에선 시무식이 열렸습니다. 시무식은 일 년을 잘 해나가자는 뜻으로 단체 구성원들의 단합과 협동과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는 것이 통상적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소도시(경기도 과천시)의 민원실에 오후 4시경 서류 한 장을 발급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민원실 입구 마당 한 가운데 뭔가 아주 어색하기 그지없는 것이 소반이 놓여 있어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앉은뱅이 상에 올라 있는 돼지머리였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십대로 보이는 시청 남직원 몇몇이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부서에서 일하던 시청 직원들 얼마가 마지못해 삼삼오오 모여들고 시장님처럼 보이는 중년 여성이 저만치 걸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보아하니 재작년에 새롭게 선출된 여 시장님이었습니다. 잠시 둘레에 있는 사람들과 목례로 인사하더니 참모 정도 되는 사람이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시장님은 곧 합장하는 자세로 하늘 향해 손을 싹싹 빌더니 모가지만 있는 돼지님 앞에 넙죽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닌가? , , .

 

나는 내 눈을 의심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21세기 대명천지에 뭔 돼지머리 앞에서 고사를? 듣자하니 시장님은 한국의 명문대 출신으로 시민 친화적 행정으로 시정을 잘 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오늘 내가 본 여 시장님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늘로 향한 벌렁코, 말쑥하게 면도를 한 얼굴, 슬프게도 목이 베인 채로 머리만 소반에 올려 진 그 불쌍한 돼지님 앞에 지극 정성껏 절하는 모습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해외토픽거리겠지요. 한심하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고 꼴불견이기도 한 그 어색한 모습, 소반에 담은 돼지머리 앞에 넙죽 절하는 그 고독스런 모습을 보니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정도구나. 대 과천시의 시장이라는 분이 2016년의 시작을 저렇게 하는 것을 보고, 시장 노릇 해 먹기가 얼마나 힘들면 저런 한심한 구태를 뿌리뽑지 못하고, 그저 늙은 개들 같이 복지부동의 몇몇 아래 것들 비위 맞추느라 혹시 저렇게 따라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그러면 안 되죠. 아이고, 시장님, 시장노릇하시느라 얼마나 힘 드시겠습니까? 어쨌든 측은한 마음에 나는 그 자리를 떴습니다. 참 씁쓸한 오후였습니다

 

벌려진 돼지 입과 콧구멍에 돈까지 찔러 꽂는 것은 뭘까? 운수대통? 소원성취? 대박? 들어보니 영화계에서도 새로운 영화 시사회 후에는 감독과 배우들이 모여 고사상 돼지머리에 머리를 조아리고 대박을 비는 가관이 일상적인 통과예식이라고 하네요. 한국의 최고 과학자들이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웃지 못할 일이 실제로 있으니 할말을 잊습니다. 일반회사들 특히 생산공장에서는 아직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라고도 하고요. 하기야 한국의 재벌 기업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소식에 내 과민함이 무디어지지 않을찌 모르겠습니다. 재벌회사들도 새로운 건물을 완공한 후나 새로운 대형기계나 장비를 도입해서 공개할 때마다 돼지 주둥이와 콧구멍에 돈을 찔러넣는 이벤트는 일상적 다반사가 되었다니요! 한국의 정치가들중 상당수도 연초에 복집을 찾아다니고 있는 현실이니 대한민국의 장래가 참 그렇네요. 그러니 조그만 관공서에서 시장님이 그러는 것은 애교로 봐주라구요? 혹시 청와대 뒤뜰에서도 이런 푸닥거리와 같은 허무맹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헬조선하며 탈조선을 외치는 것을 보면서 기성세대의 저런 무뇌와 같은 한심한 작태가 괜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마져 듭니다. 


시장님, 시장님, 민원 실 앞 마당에서 고사를 지내신 것이 각종 골치 아픈 민원제기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셨나요? 그럴 의도라면 더더욱 정신차리고 정의롭고 공의롭게 9만 과천시민들을 위해 일하세요. 물론 하셨으리라 믿지만 혹시 업무추진비로 흑임자 인절미라도 사서 시청 직원들에게 한턱을 멋지게 쏘시든가, 아니면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가장이나 어려운 이웃들을 한번 더 찾아보시든가 하는 것이 허공에 대고 의미없는 몸짓하는 것보다는 훨 나을 것입니다. 친절과 성실로 맡은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는 시민을 위한 다른 길이 없다는 정도는 과천시의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요? 올해는 원숭이 해라지요? 원숭이 재롱이라도 부리셨습니까? 시장님, 시장님, 거기서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품위를 지키소서! 체통을 사수하소서! 통촉하여 주소서~


지금까지 병신년(丙申年) 전통재래식 시무식 유감이었습니다.


[과천시 민원실 마당에 차려진 조촐한 소반]

고사.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성서교실이 http://www.rbc2020.kr 로 리뉴얼하여 이전합니다. 류호준 2020.08.24 4585
공지 "무재개 성서교실은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5] 류호준 2018.03.29 2930
549 일상 에세이: “대학입학 시즌에 부쳐” file 류호준 2016.02.18 5553
548 프레드릭 비크너,『어둠 속의 비밀』홍종락 옮김 (서울: 포이에마, 2016) file 류호준 2016.02.12 13936
547 일상 에세이: 신복윤 박사님의 귀향(歸鄕)에 부쳐 [4] file 류호준 2016.01.15 1253
546 울림이 있는 시: "내려놓음" (홍경주) file 류호준 2016.01.13 1769
545 일상 에세이: “건배(乾杯)와 흰 돌” file 류호준 2016.01.08 1631
544 일상 에세이: “이민과 신학과 교회” file 류호준 2016.01.06 4569
» 일상 에세이: “시장님, 거기서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file 류호준 2016.01.04 1174
542 송년 에세이: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file 류호준 2015.12.31 6550
541 신앙 에세이: 유진 피터슨, 『메시지 성경: 공식 완역 한국어판』 [1] file 류호준 2015.12.21 3095
540 신앙 에세이: 불후의 명곡: “내 주를 가까이” file 류호준 2015.12.19 2018
539 신학 에세이: “경건한 가정과 교리와 가정예배” file 류호준 2015.12.17 1719
538 신학 에세이: “입관과 빈 무덤” file 류호준 2015.12.09 1468
537 일상 에세이: “불필요한 것으로 스스로에게 짐 지우기” file 류호준 2015.12.08 1110
536 신학 에세이: 닐 플랜팅가의 “문학과 신학과 독서와 설교” file 류호준 2015.12.04 1776
535 신학 에세이: “일반은혜” 교리와 개혁신학 지형도 [2] file 류호준 2015.12.02 3094
534 신학 에세이: “루터파와 개혁파의 신학적 강조점” file 류호준 2015.11.29 1773
533 신앙 에세이: “종말론적 중앙공원” file 류호준 2015.11.20 1028
532 일상 에세이: “식사시간이 거룩한 이유” [1] file 류호준 2015.11.19 1246
531 신앙 에세이: “길(道)의 사람들과 교구(敎區)와 순례자들” file 류호준 2015.11.08 1100
530 일상 에세이: “만남: 로버트 건드리, 김세윤 그리고 나” file 류호준 2015.11.06 4993